021화
완연한 여름이 왔다.
푹푹 찌는 더위에 조금만 움직였다 하면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청연은 가장 얇은 천으로 지은 옷을 골라 입고, 침상에 걸터앉아 열심히 부채질했다.
조금이라도 바람이 통하도록 창문을 죄다 열어 놓았지만 바람 자체가 뜨거우니 무용지물이었다. 이럴 땐 현대의 에어컨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에어컨이 뭐야, 선풍기라도 있었다면 현대 과학 기술을 향해 큰절을 올렸을 것이다.
아무리 남들보다 체온이 낮다고 해도 더운 건 더운 거였다. 청연은 꼭 전골냄비 속 양배추처럼 흐물흐물해졌다. 몸을 단련한 무림인이 아닌 이상 이런 무더위를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추위도 더위도 타지 않는 무호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때마침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어와.”
문이 천천히 열리고, 무호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이밀어 방 안을 살핀 뒤에야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을 발로 뻥뻥 차고 마음대로 벌컥 열던 걸 생각하면 개과천선이나 다름없었다.
이전에는 청연이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할 때도 기척 없이 들이닥치곤 했는데, 그럴 때는 제가 더 못 볼 꼴을 봤다는 양 화를 내고 나가 버리기 일쑤였다. 역시 저 나이대 애들은 별거 아닌 일에도 부끄러워하기 마련이었다.
아무튼 가끔 성질을 부리기는 하지만, 처음에 비해 나름대로 유순해진 태도를 보고 있자면 괜히 뿌듯해졌다. 이대로라면 바른 청년으로 키워 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까지 들었다.
그럼 저도 살고, 중원의 수많은 사람도 살고, 결국에는 무호까지 살 것이다. 제하도 고생을 많이 덜고 스승님이랑 알콩달콩 사랑만 하며 살 수 있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생각.”
“…….”
“어떻게 해야 널 잘 키울까 하는, 그런 생각?”
“별….”
무호는 얼굴을 굳히더니 청연의 옆에 걸터앉았다. 그의 눈길이 정신없이 팔랑거리는 부채로 향했다.
“왜 불렀는데.”
“이것 좀 부쳐 봐.”
청연은 들고 있던 부채를 무호에게 내밀었다. 하나뿐인 제자를 이럴 때 써먹어야지 또 언제 써먹겠나.
“지금 겨우 이딴 걸로….”
“좀 해 봐. 너는 안 덥잖아. 난 지금 더워 죽겠다고.”
무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부채를 바라보다 마지못해 받아 들었다. 역시 그가 유순해졌다는 건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좀 더 위로.”
“…….”
“더 위에. 응, 거기. 좋아.”
힘이 좋아 부채질도 잘하는 건지.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청연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얇은 옷감과 가슴팍 사이로 시원하게 밀려들어 오는 바람에 기분까지 상쾌해졌다.
“더 세게 해 줘.”
“…….”
“더… 더….”
“…….”
“응, 그렇게….”
“집어치워!”
무호는 결국 신경질을 내며 부채를 저 멀리 던져 버렸다. 부챗살이 벽에 꽂힐 기세로 날아가더니 끝내 벽에 부딪혀 꺾어지고 말았다. 청연은 바닥에 떨어져 너덜너덜해진 부채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살림살이를 다 부술 셈이니….”
“누가 쓸데없는 거 시키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여름에 부채질이나 시킨 내 잘못이지.
청연은 탁자 위에 쌓여 있는 책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이제 새 책 필요할 것 같아서 가져왔어. 저거 가져가서 공부해. 너 요즘 공부에 소홀하더라?”
“무슨 상관.”
“무슨 상관이긴. 내가 말했잖아. 공부하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나중에 네가 여길 떠나더라도 글을 알면 세상 살기 훨씬 편해질 거야.”
글의 중요성에 대해 한바탕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던 청연은 무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다음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 쌍의 검은 눈동자가 저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듯한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내가 너무 꼰대같이 굴었나.’
그러나 무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내가 떠났으면 좋겠어?”
“어?”
“떠나기를 바란다든가….”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청연은 생각에 잠겼다.
별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는데.
그동안 무호가 여기에 있는 게 너무나 당연해져서 잊고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떠나고 싶어 했다는 걸.
그러고 보니 잘 키운다 어쩐다 하던 생각도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가 떠나겠다고 하면 더 이상 막을 명분도 없었다.
아직 많이 어리기는 하지만 무협 세계관에서 따지면 성인에 가까운 나이니까. 아무리 걱정된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잡을 수는 없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고민하던 청연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난 그냥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말고.”
“…….”
“네가 가고 싶다면 막을 생각은 없어.”
애매하게 내놓은 답변에 무호도 덩달아 말이 없었다. 무거워진 분위기가 어색해, 청연은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섰다.
“아무튼 책 가져가. 그러라고 부른 거야. 나는 해우랑 시장이나 가야겠다.”
그러자 무호가 청연의 손목을 낚아채듯이 잡아 왔다. 저를 올곧게 응시해 오는 검은 눈동자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왜?”
“나는?”
“너 뭐?”
“왜 나랑 안 가?”
“너는 공부해야지. 시장에서 뭐 필요한 거 있어? 있으면 사다 줄게.”
“다녀와서 하면….”
“지금 해. 미루지 말고.”
청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무호의 손을 떼어 놓았다. 커다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공부하고 있어. 저녁에 맛있는 거 해 줄게.”
“…필요 없어.”
“해 주면 잘 먹을 거면서.”
돈을 챙겨 방에서 나가려던 청연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어 발걸음을 멈추고 무호를 돌아보았다. 그는 여전히 침상 위에 걸터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맞다. 너 그 대도 함부로 들고 다니면 안 돼. 누가 보면 의심하니까 꼭 방 안에만 둬.”
“안 들고 다녀.”
“그래, 착하다. 그거 이름은 지어 줬어?”
청연의 질문에 무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뭔데?”
“알 거 없어.”
“…네. 그럼 알 거 없는 사람은 시장이나 다녀오겠습니다.”
사실 굳이 물을 필요 없었다. 그가 대도에 어떤 이름을 붙여 주었을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저였으니까. 보나 마나 현월도라고 지었겠지, 뭐.
청연은 그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잠시 객잔을 비운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 채.
***
주방을 정리하느라 바쁜 해우 대신 해령과 함께 시장으로 향했다. 매일 아침 식재료를 배달받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날씨에는 아무리 신선한 재료라도 금방 시들해지기 마련이라, 저녁 장사를 위해 장을 조금 더 볼 생각이었다.
“해우는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몰라. 쉬엄쉬엄하라고 해도 쉬지를 않아.”
“저희 오라버니가 원래 그래요. 어렸을 때부터 저 먹여 살린다고 고생하던 게 습관이 돼 버린 거예요.”
해령은 무덤덤하게 지난 일들을 털어놓았다.
“저는 사실 부모님 얼굴도 기억 안 나거든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것부터 기억나는데 그때도 오라버니는 일한다고 바빴어요. 제 손 잡고 이 집 저 집 가서 잡일 도와주고 겨우 떡 하나 받고. 그 떡도 저한테 다 떼어 주고는 ‘오라버니는 한 입만 먹어도 배부르다’ 그러더라고요. 그땐 그게 진짠 줄 알았지 뭐예요.”
“둘 다 고생이 많았네.”
“저는 별로 고생 안 했어요. 그냥 종일 오라버니 일하는 거 지켜보다가 떡이나 얻어먹었죠, 뭐. 제가 더 일찍 정신을 차렸어야 했는데.”
“더 일찍이라니. 너 지금 열다섯이잖아. 열다섯 살에 그렇게 일하는 것도 대단한 거야.”
“그럼 급료 올려 주세요.”
“어….”
“대단하다면서요. 올려 주실 거죠?”
“그래…. 올려 줄게.”
성공적으로 협상을 마친 해령은 밝게 웃었다. 역시 못 당하겠다 싶어 고개를 젓던 청연도 따라 웃었다.
“아, 그런데 십… 객주님 사촌 동생 말이에요.”
“응, 왜?”
“걔 좀 이상하지 않아요?”
걔한테 이상한 점이 한둘이겠냐마는. 청연은 애써 모른 척하며 무엇이 이상하냐 되물었다.
“평소엔 저한테 알은척도 안 하고 제가 말 걸어도 못 들은 척하거든요. 그런데 제가 객주님한테 가려고만 하면 꼭 와서 말을 붙이는 것 같아요.”
“뭐라고 하는데?”
“저기 손님이 널 찾는다는 둥, 주문이 잘못된 것 같다는 둥. 뭐 그런 얘기들이요. 그래서 확인하러 가 보면 손님은 전혀 그런 적 없다는 거예요.”
“그래? 그건 좀 이상하네.”
“아시잖아요. 걔 객잔 일에 별로 관심 없는 거. 왜 자꾸 그러는 건지 유심히 지켜봤는데, 꼭 제가 객주님이랑 이야기만 하려고 하면 그렇게 이상한 핑계를 대더라고요.”
“에이, 우연이겠지. 걔가 뭐 하러 그러겠어.”
“진짜예요. 꼭 저랑 객주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것 같더라니까요? 누가 보면 사촌 동생이 아니라 숨겨 놓은 정인인 줄 알겠어요.”
“정, 정인….”
제발 비엘 세계관에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 줄래. 그러다 말이 씨가 된다고.
“아무튼 이상해요. 생긴 것도 무섭고 성깔도 더럽고.”
이야기를 나누며 시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필요한 야채를 골라 담기 시작했다. 한동안 야채 고르기에 집중하며 조용히 있던 해령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아, 하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글은 또 잘 쓰더라고요?”
“누가? 십칠이?”
“네. 공부할 때 슬쩍 보니까 명필이 따로 없던데요.”
“…….”
그러니까, 그동안 일부러 붓을 이상하게 잡으셨겠다? 날 번거롭게 하려고?
“객주님한테 배워서 그런가. 서체까지 똑 닮았던데. 알고 계셨어요?”
“난… 하하… 몰랐네.”
이런 고얀 놈. 돌아가기만 하면 또 잔소리를 퍼부어 주겠다고, 청연은 생각했다.
그때였다. 귀를 찢을 듯한 굉음과 함께 온 세상이 진동하기 시작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