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소리를 따라가 발견한 것은 누군가의 쪼그려 앉은 뒷모습이었다.
누구지…? 무호?
한밤중에 밖에서 뭐 하는 거람.
“너 거기서 뭐 해?”
청연의 말에 첨벙거리던 물소리가 뚝 멈췄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무호의 눈빛이 매서웠다.
“오밤중에 왜 나와 있어? 빨래하는 거야?”
빨래 통 속에는 몇 벌 안 되는 옷가지가 물에 잠겨 있었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걸 왜 이 늦은 시간에 빨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지. 내가 나중에 모아서 하면 되는데.”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냐. 무호는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꼭 비밀스러운 짓을 하다 들킨 모양새였다.
“내가 마저 할게. 두고 들어가.”
“…됐어.”
“늦게 자면 키 안 큰다?”
거기서 더 클까 봐 무섭긴 하다만.
청연은 무호의 옆에 앉아 빨래 통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나름대로 할 일이 생겨 다행이었다.
“들어가 주무세요.”
“됐다고!”
무호는 버럭 신경질을 내며 빨래 통을 다시 끌어갔다. 겨우 빨래 하나 가지고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조금 의심스러운데.
“옷에 뭐 묻었어?”
“…….”
“너 혹시….”
“혹시 뭐!”
“아오, 귀청 떨어진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너 혹시 야한 꿈 꿨어?”
무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청연을 내려다보았다.
“어, 진짜야? 그냥 농담한 건데.”
“꺼져!”
“말끝마다 꺼지래. 새파랗게 어린 게. 그래, 꺼진다. 꺼져.”
청연은 하는 수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혼자 빨래나 실컷 하라지 뭐.
“아니, 잠깐만.”
발걸음을 돌리려던 청연은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쟤한테 맞춰 줘야 해? 안 그래도 꿈 때문에 힘든데 쟤한테까지 살살 기어야 돼?’
숙식 제공에 글까지 가르쳐 주는데,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해 줘야 할까. 무슨 말만 하면 꺼지라고 하고 성질부리고.
생각하다 보니 점점 화가 치밀었다. 빙의 후 지금까지 참아 오던 스트레스가 속에서 펑 터진 것만 같았다.
청연은 무호에게로 돌아섰다. 여전히 얼굴을 붉힌 채 서 있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읊조렸다.
“내가 그렇게 싫으면 가면 되잖아.”
“…….”
“떠난다며? 가라고. 밥값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
“나도 이제 지친다.”
청연은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는 무호를 뒤로한 채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 일을 후회하기까지는 일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방에 도착한 청연은 그대로 침상에 엎어져 이불 위에 얼굴을 묻었다.
‘어린애랑 똑같이 유치하게 구냐…. 한 번 더 참고 좋은 말로 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심하게 말했지? 상처받아서 진짜 떠나면 안 되는데.’
아무래도 내일 사과해야겠다, 다짐하며 애꿎은 이불을 걷어찼다.
***
무호는 청연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하….”
한심한 놈. 뭘 어쩌자고.
다 그 빌어먹을 꿈 때문이다. 저 성가신 사람이 꿈에서까지 나타난 탓이다. 하필이면 제게 글을 알려 주던 그때의 모습이었다.
꿈속에서 본 객잔은 평소와 달리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날 날씨가 이렇게 좋았던가. 창틈으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고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손에 들린 붓이 종이 위로 매끄럽게 선을 그었다.
‘이게 네 이름이고.’
부드러운 머리칼이 쏟아져 목덜미를 간지럽혔고.
‘이건 내 이름.’
옷깃 사이로 보이는 하얀 가슴팍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어때, 쉽지?’
하나도 쉽지 않았다.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 사람만 보였다. 꼭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시간이 잠시 멈추었다.
‘뭐야, 글자를 보라니까 왜 나를 보고 있어. 너 이거 쓰는 거 제대로 봤어?’
모르겠다. 당신 얼굴은 제대로 봤는데.
‘너무 빨랐나? 다시 쓸 테니까 잘 봐.’
그와 닿아 있는 피부가 찌릿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다. 붓이 가루가 되어 부서져 버렸다.
차라리 잘됐다. 이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호는 붓을 집어 던지고 청연의 가느다란 허리에 팔을 감아 바짝 끌어당겼다. 긴 머리칼이 휘장처럼 드리우며 제가 좋아하는 꽃향기가 훅 끼쳐 왔다.
그는 놀라지도 않고, 무호를 내려다보며 예쁘게 웃었다.
‘나랑 이런 거 하고 싶었어?’
아니라고. 그런 마음 품은 적 없다고 말해야 하는데. 누가 입을 꿰매 놓은 것처럼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그의 얼굴부터 목선, 어깨와 쇄골까지 눈으로 훑어 내려갔다.
한 번만 만져 보고 싶다.
어? 내가 방금 무슨 생각을….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사람을 상대로 그런 마음을 품을 리가.
‘천무호. 뭘 그렇게 봐.’
위에서 들려오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물을 들이부어도 해소되지 않을 것만 같은 갈증이 일었다.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부드러워 보이기도, 탄탄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몸 선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쏙 들어간 허리와 골반에 눈길이 닿았다. 몸을 칭칭 감싼 천 쪼가리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목구멍이 점점 쪼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더욱 심해지는 갈증에 목이 말라비틀어질 것만 같았다.
무호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건 물 따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저잣거리 이야기꾼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산 사람의 피를 마시는 강시도 있다던데.
그의 목덜미라도 물어뜯어 강시처럼 흡혈을 해야지만 마른 목을 축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가운 살갗에 입술을 묻고 그가 살려 달라고 애원할 때까지 피를 빨고 싶었다.
저 긴 속눈썹 끝에 눈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리는 상상을 하니 어느새 입 안에 군침이 돌았다.
길고 하얀 목선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처음 만났던 그날 밤, 빨갛게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움켜쥐었던 그 목선이, 이제는 잇자국을 남겨 달라 조르고 있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무호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마른 입술이 부드러운 피부에 닿으려던 순간, 번쩍하며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이게 무슨 개꿈인지….
왜 하필 그 사람이 나왔고, 왜 하필 그 장면이었을까. 나는 왜 그따위 징그러운 욕구를 느꼈을까.
복잡한 마음에 자리에서 뒤척이던 무호는 문득 하반신이 찝찝함을 느꼈다. 바지 안쪽이 축축했다.
아, 설마….
이윽고 이불을 들춰 본 그는 한동안 충격에 빠져 있어야 했다.
그래서 빨래를 하러 나온 참이었는데….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청연에게 또 화를 내고야 말았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 당황하고 창피한 와중에, 그의 가느다란 목선이 또다시 눈에 들어온 탓이다. 그 재수 없는 꿈이 다시 생각나 버렸다.
저 이상한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니 머리가 어떻게 돼 버린 걸까.
늘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꺼지라고 말하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눈이 붉었고 안색이 어두웠다. 꼭 한참을 울다 온 사람처럼. 그러고서는 지친 목소리로 조곤조곤 차가운 말들을 내뱉었다. 떠나라고. 가 버리라고.
왜?
여기서 더 머물라고 잡을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떠나라는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잘못한 거야?
꿈속에서는 그렇게도 울리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막상 진짜 운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하자 심장이 내려앉았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
다음 날, 잠을 설친 무호는 아침 일찍부터 식당에 앉아 기다렸다. 이미 아침 장사도 시작했건만 청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웬일이냐, 이 시간에.”
어김없이 해령이 말을 걸어왔다.
“아침이라도 먹게?”
그러거나 말거나, 무호의 정신은 온통 계단에 쏠려 있었다. 언제쯤 그가 내려오려나. 방에 찾아가 봐야 하나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밤새 고민해 보아도 결론은 하나였다.
‘떠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일단은 사과라도 해 봐야겠지. 그동안 버릇없이 군 건 사실이니.
생전 낯간지러운 소리를 해 본 적이 없기에 상상만 해도 손끝이 오그라들었다.
무호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청연이 나타난 건 아침 장사가 거의 끝나 갈 때쯤이었다.
다행히 어젯밤보다는 안색이 조금 나아 보였다. 눈이 마주치고는 싱긋 웃어 주기까지 했다.
그 웃음을 보는데 또다시 꿈이 떠올라서 무호는 제 이마를 내리칠 뻔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망측한 상상을 애써 지워 내고, 슬며시 청연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차마 벌어지지 않던 입술이 힘겹게 떨어졌다.
“그… 어젯밤엔….”
“어젯밤엔 미안.”
“어…?”
“내가 다른 일이 있어서 좀 예민했나 봐. 그래도 너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미안해.”
“…….”
청연은 웃으며 무호의 어깨를 툭툭 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분명 사과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무호는 당황하여 굳어 버렸다.
평생을 수많은 사람과 싸우고, 또 이기며 살았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사과하고자 마음먹었는데, 오히려 그 사람이 제게 먼저 미안하다고 하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밝은 얼굴로 손님들을 맞이하는 청연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렇게 예뻤던가.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요란스러운 옷차림의 젊은 남자가 객잔으로 들어섰다.
뺀질뺀질한 얼굴을 한 남자는 환하게 웃으며 청연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몸을 밀착한 채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기도 했다.
‘저 새낀 누구야? 아는 사이야?’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을 저렇게 만질 리가. 청연의 어깨 위에 올라간 손이 심하게 거슬렸다.
두 사람을 노려보며 혼자서 속을 부글부글 끓이던 와중에 옆에서 해령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송 단주님 오랜만에 오셨네.”
‘단주님?’
“누군데.”
“네가 웬일로 남한테 관심을 다 가지냐.”
“누구냐고.”
“저분? 대경상단 송원 단주님. 성격도 호탕하시고 워낙 마당발이셔서 이 동네에 모르는 사람이 없어. 얼마 전부터 우리 객주님이랑도 친하게 지내시더라고.”
“…친해?”
“응. 가끔 두 분이 놀러 가셔서 술 한잔 드시기도 하고. 근데 왜?”
놀러 가서 술을 마셔? 저 새끼랑? 뭐 하러?
갑자기 피가 끓어올랐다. 꿈속에서처럼 다시금 참을 수 없는 갈증이 일었다. 무호는 청연의 어깨 위를 지분거리는 손가락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냥 다 부숴 버릴까.
저 얄궂은 손가락의 힘줄을 하나하나 뽑아내 저놈의 입 속에 처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