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화
또 이 꿈이다.
청연은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지난번 꿈속에서 보았던 방이 확실한데, 이상하게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아, 천장이 도는 게 아니라 내가 도는 건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온몸이 축축하면서도 으슬으슬했다. 무거운 팔을 들어 올려 이마를 더듬어 보니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깼어?”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저번의 그 남자가 침상 옆에 앉아 있었다. 그 하얀 얼굴을 보는 순간 불안했던 마음이 한시름 놓이고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차올랐다.
“나 아파?”
“엄청.”
“그렇구나.”
“그렇구나는 무슨.”
청연은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제가 아프다고 한참이나 걱정했을 그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마셔.”
입가에 다가온 나무 수저를 물자 시원한 물이 흘러들어 와 마른 입 속을 적셔 주었다. 말하기가 수월해지기 무섭게 청연은 언제 아팠냐는 듯 수다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형이니까 널 돌봐야 하는데. 매번 네가 날 돌보네. 이렇게까지 나잇값을 못 하다니.”
“…….”
“그냥 시랑 형님이라고 부를까 봐.”
“시끄러워.”
“형니임, 아우가 형님께 신세만 지니,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가진 건 이 보잘것없는 몸뚱이뿐이니 오늘 밤에도 성심성의껏 봉사를… 으앗!”
차가운 물수건이 얼굴 위로 철퍽 떨어지는 바람에 청연은 화들짝 놀라 뛰어올랐다.
“으으…. 차가워. 너무해요, 형님.”
“열 내릴 때까지 금지야.”
“막상 시작하면 붙들고 안 놔주는 게 누군데…. 이렇게 억울할 수가.”
“다 네가 시작한 거잖아.”
“내가 언제에…. 내가 뭘 어쨌다고.”
시치미를 뚝 떼는 청연의 얼굴 위를 시원한 물수건이 훑고 지나갔다. 뜨거운 열을 식혀 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그의 세심한 손길이 좋았다. 오랜 시간 검을 잡아 굳은살이 단단히 박였음에도 곧고 예쁘게 뻗은 손가락이 좋았다. 특히 이렇게 저를 보살펴 줄 때면 그 손마디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놔.”
“에? 머를?”
청연은 그새 시랑의 손가락 하나를 이로 물고 있었다.
“안 놓으면 열흘 금지야.”
“느무해!”
급하게 벌려 낸 입술 사이로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다시금 얼굴을 시원하게 닦아 주는 손길에 청연은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입까지 다문 건 아니었다.
“그런데 너 열흘 동안 안 할 수 있어?”
“너는 그런 생각 좀 안 할 수 없어?”
“없어. 내 머릿속엔 그런 것밖에 없어. 어렸을 때 네 머릿속에 검밖에 없었던 것처럼….”
아차.
시랑의 손이 멈칫함과 동시에 청연도 입을 합 다물었다.
말실수했다.
청연은 살며시 눈을 뜨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렇지 않아 보이기는 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들떴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음과 동시에 잊고 있었던 죄책감이 몰려왔다. 파도가 넘실대는 수면 아래로 조금씩 잠겨 가는 기분이었다.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미안….”
청연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잘못 아니야.”
굳은살 박인 손이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이런 사소한 일로 힘들어하지 말라는 듯 다정한 손길이었지만, 기분은 이미 심해 속을 헤엄치는 중이었다.
청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랑.”
“응.”
“너 그냥 돌아가면 안 돼?”
“…….”
“아직 갈 수 있잖아. 늦지 않았잖아. 그치?”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그는 단호하게 내뱉으며 이불을 끌어 올려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래도….”
“너 지금 아파서 헛소리하는 거야.”
“…….”
“쉬어.”
말을 뚝 잘라 버린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등을 돌렸다. 이윽고 그가 방을 떠나자 청연은 침상 위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다.
…못난 놈.
눈치 없는 놈.
항상 이놈의 입이 문제였다. 차라리 날 때부터 말을 못 했다면 좀 나았을까. 그랬다면…. 그와 엮이지 않았다면….
끊임없는 자학 속에 열병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청연의 의식은 돌아왔다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정신이 혼몽한 와중에 그를 깨운 건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시랑의 것보다 높은,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음성이었다.
“…부님께서… 그러니까…”
누가 왔나? 이 험한 산속에 누가 찾아왔다고?
청연은 흐릿한 눈을 벅벅 비비며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제 돌아오세요, 사형. 이 정도면 됐잖아요.”
사형이라면….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황급히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귀를 틀어막았다. 열 때문인지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떨려 왔다. 심장이 빠르게 뛰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또렷하게 귓속을 파고들어 왔다.
“저 사람 때문에 사형까지 이 꼴 난 거 보고 있으려니 제 가슴이 다 답답해서 그래요. 언제까지 이러고 사실 거예요?”
듣기 싫어. 그만해. 그만 말해.
청연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날 선 말들이 가시가 되어 피가 나도록 찔러 댔다.
“그렇잖아요. 저 사람만 없었어도 사형은 미래가 창창했을 거라고요.”
어떻게 찾아왔지? 또 누가 알고 있지?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두려움이 점차 몸집을 불려 그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다. 청연은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감싸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럼 전 갑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꼭 정리하시고 돌아오세요.”
그의 발소리가 멀어져 갈 때쯤, 청연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시랑이 방 안으로 돌아왔을 때도 그는 이불 속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채 끊임없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깨어 있었어?”
시랑이 다급하게 걸어와 이불을 젖혀 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던 청연은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나… 나 무서워…. 나 두고 가지 마.”
청연을 마주 안은 그의 손이 흠칫하더니 이내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아무 데도 안 간다니까.”
“아니… 아니다…. 너 그냥 가. 빨리 가.”
“…….”
“가서 나 죽었다고 해. 응? 제발….”
이미 죽었다고,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그리 말해 주었으면 했다. 더 이상 아무도 찾아오지 않도록.
“어차피 나 이제 힘도 못 써…. 이러다 금방 죽어. 그러니까 너도 제발 가.”
“…….”
“너라도 살아….”
등을 토닥이던 손이 멈추고, 시랑의 고개가 청연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세화야.”
단단하게만 보이던 사람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 들었고, 어깨가 축축이 젖어 갔다.
“나한테 이러지 마, 세화야.”
***
‘미친, 이게 뭐야.’
꿈에서 깨어났을 땐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 있었다. 지금 이곳이 현실임을 알고 있음에도 꿈속의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어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진짜 뭐 하자는 거야….”
왜 자꾸 이런 걸 보여 주는 거야. 나보고 뭘 어쩌라고.
아무리 눈가를 닦아 내도 다시 젖어 버려서, 청연은 결국 양쪽 옷소매에 얼굴을 묻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 꿈을 꾼 것뿐이라고 위로해 보아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감정 소모가 극심했다. 19금 로코인 줄로만 알았던 과거가 알고 보니 피폐물이었던 것이다.
피폐물은 정말 제 취향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감정을 고스란히 빙의해서 겪어 버리기까지 했으니 마음이 찢어지다 못해 너덜너덜해졌다.
청연은 눈이 다 따가울 정도로 울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여전히 서러운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지만 일단 눈물은 멈추었다.
거울에 비춰 본 제 모습은 그야말로 꼴불견이었다.
‘와…. 충혈된 것 봐.’
안색은 초췌하고, 눈은 퀭한 게 원작에서 묘사된 청연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항상 말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알 수 없는 사람. 어딘가 처연하고 가까이하기 어려운 사람.
아무래도 잠들기엔 틀린 것 같다.
청연은 옷을 여러 겹 겹쳐 입고 밖으로 나섰다. 방 안에 혼자 누워 있다가는 밤새도록 울기만 할 것 같았다. 그러니까 후원이나 걸으면서 정리를 좀 해 봐야지.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밤바람은 싸늘했다. 꼭 꿈속의 설산에 와 있는 것 같아, 청연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화… 라고 불렀지.’
그 이름을 떠올리자 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본명이 청연이 아니었던 걸까. 제 이름을 따서 객잔 이름을 지은 건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 반대였나 보다.
세화. 원작에는 전혀 없는 이름이었다.
이것저것 유추해 봤을 때, 도망자 신분이었던 것 같으니 가명을 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망자라니.’
빙의하고 나서 세웠던 가설 중에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점점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유청연이 나쁜 놈이었다는 것.
‘저 사람만 없었어도 사형은 미래가 창창했을 거라고요.’
그 말은 분명, 청연이 저지른 어떤 일을 그의 연인이 함께 감당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제가 알지 못하는 적이 얼마나 될까. 그중에 이 몸의 단전을 파괴한 사람도 있을까.
‘아, 그냥 다 때려치우고 싶다!’
청연은 터덜터덜 후원을 거닐었다. 다시 잠들었다가는 꿈속으로 돌아갈 것 같아 차라리 밤을 새울 작정이었다.
밤의 적막함을 깨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위안 삼아 걷던 청연은 문득, 풀벌레 울음 속에 또 다른 소리가 섞여 있음을 눈치챘다.
‘첨벙거리는 게 꼭 물소리 같은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분명 직원들의 거처가 있는 쪽이었다.
누가 이 야심한 밤에 빨래라도 하나. 청연은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