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화
무호는 얼마나 피곤했는지 이틀을 내리 잤다.
덕분에 청연은 제 방을 내어 준 채 빈 객실에서 생활했다. 마교도들이 온 동네를 헤집고 지나가 분위기가 흉흉했으니 어쩌면 잠들어 있는 게 다행일지도 몰랐다.
그가 언제 일어날지 몰라 물과 간단한 요깃거리를 침상 옆에 두었다. 새로 사 온 옷도 잘 개어서 한쪽에 곱게 내려놓았다.
무협 세계관에서 열다섯이면 다 큰 성인이나 다름없다지만. 이러니까 꼭 애를 보는 것 같았다.
청연은 잠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왼쪽 눈가에 난 흉터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쓸어 보았다.
얘도 더 크면 경천동지할 미남일 텐데. 눈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오래된 흉터를 지울 방법은 없는 걸까, 고민하던 그때.
“손 떼.”
깊게 잠긴 목소리가 무호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아, 깼어?”
청연이 화들짝 손을 떼어 내자 감겨 있던 눈이 천천히 뜨였다. 몽롱한 한 쌍의 눈이 청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너 이틀이나 잤어.”
“음식에 약을 탄 건 아니겠지.”
고맙다는 말은 못 할망정 깨어나자마자 약 같은 소리나 하다니, 청연은 이를 빠득 갈았다.
‘참자, 참아. 어린애랑 똑같이 굴지 말자.’
“너 자는 동안 마교도들이 온 동네를 헤집고 다녔다더라.”
무호는 미간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놈들이 아직도 여깄어?”
“어젯밤에 사라졌대. 다른 쪽으로 이동한 모양이야.”
청연은 무호에게 물그릇을 건넸다. 아무래도 저는 너무 착해서 탈이었다. 제 목숨을 위협하던 악역에게 연민을 느껴 침상에 옷까지 내어 주고 극진히 보살피는 꼴이라니.
사실 꼭 동정심 때문인 건 아니었다. 그가 마교주가 되지 않는다면 저도 살고 중원의 수많은 목숨도 살리게 되는 거니까. 생존 본능인지 같잖은 정의감인지 모를 것들이 뒤섞여 무호의 흑화를 막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저기 새 옷 있으니까 갈아입고 내려와. 밥 줄게. 손님은 좀 있지만 이제 괜찮을 거야.”
청연의 말에 무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답했다.
“됐어. 떠날 거니까.”
“떠나다니? 어디로? 지금 당장?”
혼자 돌아다니다 잡히면 어쩌려고. 밀려드는 걱정에 청연이 우다다 묻자 무호는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갈 데는 있어? 돈은?”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 너 어려서부터 내가 얼마나 예뻐했는데. 그 쪼그만 게 어머니 드린다고 약재를….”
“좀 닥쳐.”
그래. 방금 건 내가 생각해도 좀 과했다. 청연은 머쓱해져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떠나더라도 좀 더 쉬다 가. 확실히 안전해지면 그때 가라고. 안 잡을 테니까.”
“됐….”
“옷 갈아입고 내려와. 너 주려고 고기 엄청 볶아 놨다.”
“…….”
역시 밥은 옳았다.
무호는 일 다경쯤이 지난 뒤 식당으로 내려왔다. 눈대중으로 골라 온 옷이 제법 잘 맞는 걸 보니 뿌듯했다.
청연은 그를 손짓해 불렀다. 평범한 손님이라 생각해 주문 받으러 오던 해령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예요? 못 보던 얼굴인데.”
“내 사촌 동생. 인사해.”
“에? 객주님한테 사촌 동생이 어딨어요.”
“내가 있다면 있는 거야.”
무호는 두 사람의 대화에 전혀 관심도 없는 듯 먼 산만 보고 있었고, 해령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섭게 생겼네요.”
“사람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하하….”
해령이 원작 소설을 읽었다면 그런 불경한 말은 입에 담지 못했을 거다. 청연은 무호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다행히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무튼 당분간 여기서 지낼 테니까 알아 둬. 얘 이름은 천….”
“십칠.”
청연이 이름을 말하려 하자 무호가 대뜸 입을 열었다.
음? 그렇게 불리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아무래도 본명으로 불리는 게 아직은 어색한가 보다.
“십칠이야.”
“천십칠? 이름도 이상해.”
“…….”
해령이 더 이상 업보를 쌓기 전에 보내야겠다. 자칫하면 얘도 고문 엔딩을 맞을지 몰라.
청연은 해령에게 그만 일하러 가 보라고 손짓하고는 여태 딴청을 피우고 있는 무호에게로 돌아섰다.
“동갑이니까 친하게 지내. 너도 친구 하나 있으면 좋잖아.”
“…….”
“이리 와. 우리 객잔 숙수도 소개해 줄게.”
작게 들려오는 무호의 한숨을 무시한 채, 청연은 그를 끌고 주방으로 향했다. 마침 재료를 손질하던 해우가 무심한 시선을 보내왔다.
“해우! 얘는 내 사촌 동생이야. 이름은….”
“저 손자국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해우가 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에는 그날 밤에 남겨진 무호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패어 있었다.
“수리하게 사람을 부를까요?”
“아니야, 주방인데 뭐 어때. 얘 이름은….”
“당근이 좀 부족하네요.”
“그래. 내가 이따 가서 사 올게. 아무튼 얘는….”
“주문이 밀려서요.”
“…….”
너도 관심 없구나. 또 나만 신났지.
무호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청연은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
“이건 해우가 만든 거야. 내가 한 것보다 솜씨가 나을걸.”
무호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돼지고기볶음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었다.
“어때? 맛있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시무룩했었다고, 금세 헤헤 웃으며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 빛내는 청연에게 차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먹고 살던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게 훌륭한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여기 처음 온 날에 먹었던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덜 고파서 그런가.
“너 진짜 친구 안 필요해? 쟤네가 말은 그렇게 해도 착한 애들이니까 잘 지내 봐.”
“필요 없어.”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성가시게.
확실히 객주에 대한 의심은 옅어졌다. 이상하고 귀찮은 사람이기는 했으나 제게 의도를 갖고 접근한 거였다면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와중에 무슨 일이든 벌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저를 해치기는커녕, 어린애처럼 돌봐 주지 않았던가.
어찌 됐든 저는 곧 떠날 사람이었고, 이런 곳에 정을 붙일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멀리 갈 것이다. 아예 중원을 벗어나도 좋겠지.
그러니까 딱 이것만 먹고 떠나자.
떠날 건데….
떠나야 하는데….
떠나야….
“이것도 한번 먹어 봐.”
“음….”
“어때? 어때?”
“식감은 나쁘지 않은데 너무 달아.”
“그래? 그럼 좀 덜 달게 해 볼게. 기다려!”
분주하게 주방과 식당 사이를 오가는 청연의 뒷모습을 보며 무호는 이마를 짚었다.
떠나기로 한 지 며칠이 지났는데 어째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지. 심지어 맛 평가까지 해 주면서.
‘재미 삼아 새로운 메뉴 개발 좀 해 보려는데 도와줄래?’
‘메뉴? 그게 뭔데?’
‘앗…. 그런 게 있어.’
웃으며 머리칼을 헝클어 놓던 객주의 손길이 저를 붙잡은 것인지. 배 채울 것 있고 몸 뉠 곳 있는 안락한 삶에 젖어 버린 건지. 아니면 어디서 몸을 꼼짝할 수 없게 만드는 주술이라도 걸린 건지.
무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주방에서 또 다른 접시를 들고 나오는 청연의 모습이 보였다.
‘이러다 살찌겠는데.’
되지도 않는 걱정이나 하고 있던 그때, 객잔 한쪽에서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와장창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악!”
한 우락부락한 몸집의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중년의 남자는 벌벌 기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 댔다.
“아악! 갚는다고! 갚는다고 했잖아! 조금만 기다려 달라니까!”
“그래, 잘도 갚겠다! 도박한다고 처자식까지 팔아넘긴 놈이 잘도 갚겠어!”
이어진 무분별한 폭력에 남자의 새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구경꾼들은 그들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쑥덕거렸다.
관심 없다. 싸움 구경이라면 이골이 났다. 소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해령이 말을 붙여 왔다.
“와, 살다 보니 장 씨가 맞는 걸 다 보네.”
무호는 가볍게 그 말을 무시했다. 며칠간 안면을 익혔다고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게 불편했다. 객주는 친구처럼 지내라고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필요 없었고.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해령은 계속해서 설명해 댔다.
“저기 맞고 있는 아저씨가 장 씨인데, 동네에서 유명한 파락호야. 젊었을 때부터 도박에 빠져서 집안 재산 다 말아먹고 부인이랑 자식들까지 팔아 버렸대.”
“…….”
“근데 또 돈을 빌린 모양이야. 이번엔 제대로 걸렸나 봐.”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무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맨날 빌린 돈으로 또 도박하고 술 마시러 오더니 꼴좋다. 저런 인간들은 좀 맞아도 싸. 어? 객주님이 말리시려나 보네?”
해령의 마지막 말에 무호는 퍼뜩 시선을 돌렸다. 구경꾼들을 헤치고 나아가는 청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
이 넓은 땅에 싸울 곳이 객잔밖에 없는지,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또 시작이다. 애들도 있는데 이런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청연은 맞아서 곤죽이 된 장 씨 앞을 막아섰다.
“뭐야.”
“제 가게에서 이러시는 건 못 봅니다. 대화로 해결하시든가, 아니면 나가세요.”
“하, 별 같잖은 게.”
저보다 두 배는 큰 몸집의 남자가 가볍게 비웃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청연은 가까스로 커다란 주먹을 피했으나, 그 바람에 뒤로 콰당 넘어지고 말았다.
‘더럽게 아프네….’
이 세계 사람들은 단체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틈만 나면 주먹질에 무고한 사람까지 치려고 들었다. 아주 지긋지긋했다.
힘겹게 숨을 고르던 청연은 문득 들려온 사람들의 비명에 고개를 들었다.
‘무호…?’
어느새 끼어든 무호가 남자를 두들겨 패고 있었다. 제 몸집보다 두 배는 큰 남자를, 내공 하나 실리지 않은 손길로 때려눕히더니 성에 차지 않는 듯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발길질을 한번 할 때마다 뼈가 우두둑 부러지며 소름 돋는 소리가 났다. 무표정한 얼굴과 망설임 없는 몸짓이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겁을 먹은 구경꾼들은 이미 저 뒤로 물러났고, 무호에게 친근히 말을 걸던 해령의 얼굴마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안 돼!”
정신을 차린 청연은 욱신거리는 허리를 부여잡고 일어나 무호를 붙들었다. 이러다가 저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그를 소란에 휘말리게 해서는 안 된다.
무호의 시선이 청연을 향했다. 방금까지 폭력을 행사하던 것치고는 너무나도 덤덤해 보이는 표정에 소름이 끼쳤다. 청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그만해.”
“…….”
“이제 됐으니까….”
그는 청연의 손을 뿌리치더니 몸을 숙여 남자의 옷깃을 잡아 들었다.
“컥… 내 다리… 살려 주….”
남자는 무호의 손에 질질 끌려가 객잔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제야 부러진 다리를 끌며 도망칠 수 있었다.
청연도, 구경꾼들도 모두 할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 수십 개의 시선이 무호를 향해 있었다.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와 벙쪄 있는 청연에게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밥값 한 거야.”
누가 밥값을 그렇게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