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화
청연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익숙한 천장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이며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제하를 찾으러 나갔다가 불이 난 곳을 보고 곧장 달려갔던 것 같은데…. 그다음엔 어떻게 됐더라? 문짝을 뜯었던가?
청연은 양손을 들어 살펴보았다. 분명 손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본 것 같은데, 지금 제 손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설마 꿈이었나? 그럼 제하는?
조급해진 청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건지 세상이 핑 돌았다. 어지러운 머리를 짚고 침상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지그시 잡아 눌렀다.
“아직은 누워 계셔야 합니다.”
“대인?”
“기력을 회복하실 때까지는요.”
소명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여태 약을 달인 건지 몸에선 은은한 약재의 향이 풍겼다. 청연은 그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물었다.
“제하는요? 어떻게 됐습니까?”
“멀쩡합니다. 울고불고 시끄럽게 굴어 휴식에 방해가 될까 하여 내보냈습니다.”
“아….”
청연은 그제야 스르르 몸을 뉘었다. 아이가 멀쩡하다니 다행이었다. 그래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기를 많이 마셨을 텐데요.”
“건강에 해를 끼칠 정도는 아닙니다.”
“정신적인 충격이 클 텐데….”
“이겨 낼 겁니다.”
소명은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고는 침상 가장자리에 사뿐히 걸터앉았다. 흰 손가락이 이불 위를 톡톡 두드렸다.
“손의 상처와 화상은 처치해 두었으니 푹 쉬시면 됩니다.”
아, 어쩐지. 불구덩이에 들어갔다 나온 거치곤 너무 멀쩡하더라. 청연은 신기하도록 말끔해진 손바닥을 매만지며 물었다.
“제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습니까?”
“사흘 정도 되었습니다.”
“사흘….”
해령이랑 해우가 걱정할 텐데. 워낙 똑똑한 아이들이니 장사는 문제없겠지만.
청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명은 무겁게 입을 뗐다.
“아이의 말을 들어 보니 마교의 소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헌데 객주님께서는 그곳에 아이가 있다는 걸 어찌 아시고 찾아가신 겁니까?”
“…….”
할 말이 없었다. 빙의자라서 모든 걸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청연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캐물으려는 건 아닙니다.”
답변을 들을 수 없을 것이라 짐작한 것인지, 소명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어찌 됐든 자리를 비운 제 불찰이고, 제자를 구해 주셨으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씀하세요. 보답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청연은 손을 내저었다. 애초에 그가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건 저 때문이었으니 보답 같은 걸 바랄 면목도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의빈에 다녀온다고 했었지.’
“의빈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제 몸에 도움이 될 만한 걸 알고 계신다고….”
“…그걸 잊고 있었군요.”
“정말 저 때문에 그 먼 길을 다녀오신 겁니까?”
“꼭 객주님 때문인 건 아닙니다. 단전이 파괴되어 폐인으로 살아가는 무인들은 수두룩하니까요. 부서진 단전을 되돌릴 방법을 찾게 되면 그야말로 의술의 진일보 아니겠습니까.”
“아, 그렇… 예? 단전을 되돌린다고요?”
도움이라고 해 봤자 수명 연장 정도일 거라 생각했던 청연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건 원작에도 없던 이야기였다.
“그게 가능한 겁니까?”
“저도 불가능할 거라 생각해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방법이 뭡니까?”
“환골탈태하시면 됩니다.”
“…….”
소명의 대답에 청연은 맥이 탁 풀리고 헛웃음이 나왔다.
‘환골탈태? 수 갑자의 내공을 쌓은 사람들도 깨달음을 얻어야 할까 말까 한 걸 이런 몸으로 어떻게 해?’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합니까.”
“하실 수 있습니다.”
“…….”
“교… 교룡….”
“말도 안 된다 생각하시는 거 압니다. 전설에나 나오는 영물이니까요.”
“아, 아닙니다. 말씀해 보세요.”
소명은 청연의 눈을 들여다보며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건강한 사람이 교룡의 내단을 흡수한다면 수련의 경지가 대폭 상승하게 됩니다. 반면에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즉시 환골탈태를 이루고 새로운 몸을 얻게 된다는 옛 문헌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
“당시에는 저도 헛소리라 생각하고 넘겼습니다만…. 얼마 전 이 객잔에서 오래전에 함께 수학하던 친우를 만났습니다.”
“그 이상한 음식 주문하시던 분 말씀이십니까?”
“예. 그자가 영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여도 꽤 쓸 만한 데가 있습니다.”
“아….”
그, 그런가요. 청연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자가 말하길, 2년 전 의빈의 장강 유역에서 교룡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확인차 짧게나마 다녀온 겁니다.”
“찾으셨습니까?”
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습니다. 2년 전이라고 하니 서식지를 옮겼을지도 모르고요.”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시는군.
청연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도움이 되지 못해 유감입니다. 전설 같은 이야기라 생각하시고 흘려 넘기세요.”
“노력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교룡…. 교룡이라….
사실 청연은 교룡이 어디에 있는지, 아니, 10년 뒤에 어디에 있을지 알고 있었다.
교룡의 내단에 그런 쓰임새가 있다는 걸 몰랐을 뿐이다. 다만 그것은 제가 가져서도, 탐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틀린 것 같다.
“아이들이 오는군요.”
“예?”
소명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의원님! 객주님 아직 안 일어나셨나요?”
해령의 목소리였다. 청연이 대신 답했다.
“나 깨어났어. 들어와.”
곧장 문이 벌컥 열리고 울상을 한 해령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침상에 매달리다시피 하는 기세에 소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 물러섰다.
‘…넌 또 왜 우니.’
“객주니이이임,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갑자기 뛰어나가시더니 초주검이 돼서 업혀 들어오시는데, 허어어엉…. 저번에 죽는다 어쩐다 하시더니 이런 말씀이셨어요?”
“아, 아니… 그….”
“저한테 객잔을 맡으라시길래, 좋아하기는 했는데, 그, 솔직히 조금 신났는데, 그래도 이렇게 금방일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흐엉, 죽지 마세요!”
곧이어 따라 들어온 해우가 동생을 말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 청연은 문 틈새로 저를 빼꼼히 들여다보고 있는 제하를 발견했다. 차마 들어오지 못하고 문 앞에서 쭈뼛거리는 듯했다.
쟤는 또 왜 저러고 있대.
“너도 들어와.”
청연이 몸을 일으켜 양팔을 벌려 보이자 제하는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겼다. 얼마나 울었는지 목이 다 쉬어 있었다.
“저 때문에… 객주님이… 저를 구하시다가….”
방 안이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꼭 로판 소설 속 모종의 음모로 인해 죽다 살아난 귀족 영애가 된 기분이었다.
청연은 가만히 제하의 등을 토닥였다. 정신없기는 해도 애들이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걸 보면 사랑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원작의 청연이었어도 이랬을까 상상해 보니 조금 씁쓸해졌다.
해우는 침상 위에 엎어진 해령을 질질 끌어내며 말했다.
“객주님, 객잔 걱정은 하지 마시고 주무세요. 저희는 나가 볼게요.”
두 사람이 떠난 뒤, 다 포기한 듯 고개를 돌리고 먼 산만 바라보던 소명도 제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일어나거라.”
제하는 고개를 저으며 청연에게 딱 달라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폐를 끼칠 셈이냐. 일어나래도.”
“…싫습니다.”
‘아니, 넌 또 왜 반항을 하고 그러니….’
청연은 머쓱하게 웃으며 소명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또 벌을 받고 싶은 모양이지.”
“벌받겠습니다. 필사를 하라시면 만 번도 하겠습니다. 하나 지금은 가기 싫습니다.”
울음이 섞였어도 단호한 아이의 목소리에, 소명은 머리가 아픈지 태양혈을 문질렀다.
청연은 제하를 몇 번이고 달래 보았지만 통하지 않자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대인께서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은 그냥 제 방에서 재우겠습니다.”
“이 방은 침상도 하나뿐인데….”
“침상이 넓으니 괜찮습니다.”
“이렇게 고집을 부린 적은 없는 아인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내일 제대로 벌을 줄 테니 오늘 밤만 부탁드립니다.”
“하하…. 괘념치 마세요.”
소명은 한숨을 내쉬고는 방을 떠났다. 문이 닫히고, 청연은 아직도 제 무릎 위에서 훌쩍거리는 제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스승님 말씀 잘 들어야지. 응?”
그 사람이랑 나중에 어떻게 될 줄 알고.
“내일부터… 잘 들을게요.”
“그래. 착하지. 가서 불 좀 끄고 올래?”
제하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등잔불을 껐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청연은 아이가 누울 만한 공간을 만들어 주고 팔을 내밀었다.
“베개가 하나뿐이라서.”
제하는 조심조심 침상 위로 올라와 청연의 팔을 베고 누웠다. 맑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반짝 빛나는 것 같았다. 잠이 들기는커녕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청연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이 안 와?”
“객주님.”
“응?”
“단전은 어쩌다 다치신 겁니까?”
제하는 세상 진지한 얼굴을 하고 청연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건 나도 모르는데. 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나쁜 놈들이랑 싸우다가.”
“그게 어떤 놈들입니까? 누가 그런 겁니까?”
아 참, 애 앞에서 말조심한다는 게. 제하는 씩씩거리며 거의 화를 낼 기세였다.
“다 지난 일이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됐으면 상대는 어떻게 됐겠어? 아주 혼이 났겠지.”
“그런 놈들은 혼이 나도 쌉니다.”
허허…. 설마 내가 그 나쁜 놈은 아니었겠지.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딱히 알아낼 방법도 없었다.
청연은 손을 뻗어 제하의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그러자 아이가 살며시 손을 잡아 왔다.
“손이 찹니다.”
그러고서는 청연의 손을 제 볼 위에 올려놓았다. 덕분에 귀여운 볼살을 마음껏 주물럭거릴 수 있었다. 심신이 안정되는 말랑함이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손길을 받아 내던 아이는 이내 졸음이 쏟아지는지 청연의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며 웅얼거렸다.
“제가 더 열심히 수련하여 강해지겠습니다…. 강해져서… 꼭 객주님을 지킬 것입니다….”
그래그래, 기특하다. 혹시라도 십 년 뒤에 내 계획이 잘못되어 천마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네가 나를 지켜 주렴.
청연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어, 그런데 방금 그 대사…. 원작에서 스승님한테 했던 대사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