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우리 객잔 정상 영업합니다 (1)화 (2/145)

001화

객주 유청연은 마치 게임 속 NPC 같은 수동적인 인물이었다. 극강의 내향형 성격으로 방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특정 이벤트가 있을 때 얼굴 살짝 비추고 사라지는 그런 엑스트라. 가족도, 친구도 없는 혈혈단신으로, 교류하는 사람들이라곤 객잔 직원들이 전부였다.

그런 그가 천마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천마는 어린 시절 마교의 지하 감옥에 갇혀 학대당하던 중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는데, 한번은 우연히 이 객잔에 숨어들게 되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청연은 아이를 숨겨 주기는커녕 마교에게 이 정보를 팔아넘겼다.

그리하여 다시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 아이는 10년 뒤, 마교의 교주와 장로들을 싹 쓸어버리고 스스로 교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 기세는 실로 대단했다. 천마는 미친 살육광이라 불리며 구파일방1)과 오대세가2)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런 그가 청해 다음으로 도륙한 곳이 이곳, 사천성이었다. 모두가 그의 앞에 무릎 꿇어야 했고, 그에게 복종하지 않은 자는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다.

청연은 자신을 잊지 않았던 천마에게 잡혀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온갖 잔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불쌍하긴 했지만 제 업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유청연에게 빙의한 신우는 다짐했다. 제가 빙의한 이상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십 대 어린애를 돈 몇 푼에 팔아먹는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어느 날 그가 이 객잔에 찾아오게 되면 꽁꽁 숨겨 주는 걸로는 모자라 품 안에서 부둥부둥해 주겠다고!

***

<스승님 제자가 어쩌구> 소설에 빙의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사천의 성도(省都)에 위치한 이 객잔은 객주의 이름을 따 청연객잔이라 불렸다. 2층짜리 건물은 주변 다른 건물들처럼 휘황찬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더 절제된 멋스러움이 느껴졌다.

1층에는 주방과 식사 공간이 자리했고 2층에는 객실들이 줄지어 늘어섰다. 후원에는 직원들이 상주하는 거처가 있었는데, 청연은 그곳에 머무는 대신 객잔 2층 복도 끝 가장 깊숙한 곳의 객실을 자신의 방으로 사용했다.

빙의한 뒤 그는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는 지금 시점이 원작 소설의 극초반 부분이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주인공이 없을 때도 이 세계는 무협 클리셰에 충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놈의 클리셰가 문제였다.

손님들은 마치 메뉴에 죽엽청3)과 소면밖에 없다는 듯 같은 음식만 주야장천 시켜 대서 국수가 동나지 않도록 온종일 같은 재료를 사다 날라야 했고, 틈만 나면 객잔 안에서 무림인들 간에 시비가 붙었다. 날아다니는 암기와 젓가락에 얻어맞지 않으려면 몸을 사려야 했다.

청연은 참담한 심정으로 부러진 문짝을 내려다보았다.

이 문짝도 무협 클리셰의 희생물이었다. 오늘 아침, 여자 손님에게 치근덕거리던 시정잡배들이 어디선가 나타난 정의로운 협객에게 두들겨 맞다가 문을 뚫고 튕겨 나간 것이 사건의 전말이었다.

물론 그 시정잡배들과 협객은 수리비를 청구하기도 전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청연은 눈물을 머금으며 망치를 들어야 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가구와 집기들이 부서지니, 매번 수리할 사람을 부르지도 못할 노릇이었다.

“객주님! 그거 직접 수리하시게요?”

해령이 다가와 물었다. 해령은 이제 열다섯 살이 된 아이로, 현대 나이로 치면 중2에 불과하지만, 생계를 위해 이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객잔의 숙수(熟手)4)를 맡고 있는 해우의 친동생이기도 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제가 이따가 오라버니한테 말해서 고쳐 달라고 할게요.”

“아니야. 해우는 요리하느라 힘들 텐데 이 정도는 내가 해야지.”

“그럼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또 쓰러지실라.”

“그래…. 고맙다.”

청연은 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내가 아무리 허약해도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질까.

뚝딱뚝딱, 망치질 소리가 이어졌다. 망치를 잠시 좀 두드렸다고 금세 팔뚝이 저려 왔다. 청연은 팔을 주무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는 그리 허약해 보이는 체격도 아니었다. 조금 마르기는 했지만 근골이 꽤 탄탄해 보였다. 키는 6척에 약간 못 미쳤는데 이 정도면 작은 편도 아니었다.

아무튼 외관과 달리 속은 엉망진창인 건지 청연의 몸은 저질 체력의 끝을 달렸다. 조금만 무리해도 픽픽 쓰러지기 일쑤였으니.

조만간 의원이라도 찾아가 봐야겠다, 생각하던 그때였다.

식당에서 시작된 소란에 정신을 차린 청연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자리에서 우르르 일어선 채 대치 중인 두 무리가 보였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눈빛이 흉흉했다.

“감히 사천 땅에서 우리 청성을 모욕해? 종남의 제자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뛴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군!”

“하, 구파일방의 말단 주제에.”

청연은 이마를 짚었다. 청성파와 종남파의 제자들 간에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일반 시정잡배들도 아니고, 이렇게 무림인들끼리 기 싸움을 벌일 땐 겨우 문짝 하나 부러지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벽에 구멍이라도 뚫리겠지.

‘그래도 정파니까 수리비는 받을 수 있으려나….’

청연이 고민하고 있을 때 격분한 청성파의 제자가 손을 검 자루로 가져갔다. 그러자 맞은편의 종남파 제자들도 검을 뽑아 들려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청연은 망치를 내려놓고 달려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냉랭한 수십 개의 시선이 그에게로 꽂혀 왔다. 청연은 불쾌한 표정을 지우고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대화로 해결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손님들도 계시고 하니….”

“뭡니까?”

청성파의 제자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청연의 웃는 얼굴에 식은땀이 삐질 흘러내렸다.

“이 객잔 주인입니다.”

“주인장께선 끼어들지 마십시오.”

아니, 여기 내 영업장인데?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이 진상들아. 청연은 입 밖으로 튀어 나갈 뻔한 속마음을 삼켜 냈다. 그리고 검을 뽑으려는 그의 팔뚝을 조심스럽게 잡아 세웠다.

“손님들께서 무서워하시니 조금만 자제를….”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화가 오를 대로 오른 남자는 청연의 말을 무시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식은땀을 흘리던 청연은 몸이라도 사리고자 저 뒤로 멀찍이 물러났다. 온갖 검법이 난무하는 혼란 속에 탁자가 엎어지고 와장창 소리와 함께 접시가 깨지며 객잔 바닥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밖으로 피신하기 위해 해령을 찾던 중, 어디선가 날아온 의자 하나가 청연의 몸에 쿵, 하고 부딪혔다. 의자 다리가 정확히 가슴을 치고 떨어지는 바람에 잠시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허억….”

부딪힌 부위에는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고, 목 안쪽에서 피가 울컥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닥에 쓰러진 청연은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픔보다도 비참함이 앞섰다. 예전에 읽은 소설들에서는 무협 세계관에 빙의하면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던데,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어렸을 때 동네 친구 영철이가 자전거도 못 타는 X밥이라며 꼽 줬을 때보다도 무력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쓰러져 있어도 저들은 싸우느라 바빠 이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 이제 2층 난간에서 사람들이 뛰어내리면 클리셰의 완성인데.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벌어졌다.

“누가 감히 우리 문파를 모욕했지?”

2층 난간에서 뛰어내린 남자들이 탁자 위에 사뿐히 착지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자포자기한 청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민아야.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한 거니. 쌍X바 아이스크림 나눠 먹을 때 내가 더 큰 쪽 먹은 거?’

인제 와서 민아를 찾아 봤자 아무 소용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이 객잔이 통째로 날아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

“객주님! 괜찮으세요?”

그나마 해령이 달려와 청연을 일으켜 주었다.

“응…. 깨진 접시 조각 있으니까 조심해.”

그 말을 뱉음과 동시에 쿨럭하는 기침과 함께 청연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본 해령은 기겁하여 외쳤다.

“아악! 피를 토하시잖아요! 제가 나가서 의원을 불러올게요!”

“아니야, 괜찮아….”

무협에서 각혈 정도는 별거 아니라고, 청연이 놀란 해령을 진정시키려던 그때였다.

“의원을 찾으셨습니까.”

뻥 뚫린 문간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에 두 쌍의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삿갓을 쓴 한 남자가 객잔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수수한 흰옷과 푹 눌러쓴 삿갓.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묘한 기운.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운 걸음걸이까지. 누가 봐도 고수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인물이었다.

객잔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분한 시선이 피를 흘리고 있는 청연에게로 향했다.

그의 뒤에는 열 살에서 열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었고,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하얀 얼굴은 찹쌀떡처럼 말랑해 보였다.

쭈뼛거리며 남자를 따라 객잔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본 순간, 청연은 숨을 헉 들이켰다.

‘오늘이 그날이었어? 백제하와 윤소명이 사천에 오는 날?’

그들의 정체는 바로 원작의 주인공 백제하와 주인수 윤소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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