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카 같은 아이가 아사드의 짝이 아닌 게, 아쉽진 않으십니까?”
침묵하던 황비가 입을 열었다. 어느새 황제의 옆에 가 선 채였다.
“내가 혼인할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잖아. 누가 그 애 옆에 서건 상관없어. 기왕이면 황태자의 마음에 들어온 이가, 그 애와 함께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앞으로 시끄럽긴 하겠군요. 아사드의 관을 물려 쓸 아이까지 생겼으니.”
“말만 많은 놈들이 쓸려 가겠지. 뭐, 때가 되면 아사드가 나서서 혀를 뽑아 주려나?”
“예. 제 반려 문제로 황제 자리를 지키지 못할 놈이라면, 애초에 폐하의 후계자가 되지 못했겠죠.”
카심의 말이 헤세트의 입꼬리를 올라가게 했다.
“일이 잘 풀린 듯해 다행입니다.”
“사랑도 모르는 알파의 아이를 가져 봤자 불행하기만 할 테니, 돈 걱정 없이 따로 잘 살아 보라고 하려 했지. 하지만 그 알파께서, 이제는 사랑을 안다고 단언하니…… 잘됐네.”
“네. 참 잘됐습니다.”
“내 아버지의 저주가 더는 이어지지 않겠어.”
“…….”
“뭐, 우리는 술이나 한잔하러 가자고. 손녀가 될지 손자가 될지 모를 아이 얘기나 하면서.”
말을 마친 헤세트가 제 남편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아니, 만졌다.
“알파 엉덩이는 다 이렇게 딱딱한가? 별로야.”
“마음에 안 드는 엉덩이를 왜 매일같이 만지시는 건지…….”
미간을 찌푸린 황비가 황제와 팔짱을 끼며 말을 흐렸다. 딱딱한 목소리와는 달리 귀 끝이 붉어진 채였다.
* * *
케이든이 피마에 머무른 지 벌써 일주일하고도 이틀이 더 지났다. 평온하던 피마에 몇 가지 사건이 더해지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몇 가지 사건 중에서도 가장 야단스럽고 반가운 일은, 바로 어제 일어났다.
자한이 이전에 말을 전해 줬던 대로, 새로운 손님들이 피마를 찾아왔다. 어린 자한에게 오랫동안 학문을 가르쳐 줬다는 연상의 친우가 자한의 초대를 받아 피마에 온 거다. 그녀의 자식들과 함께였다.
그런 자한의 친우가 바로, 헤카의 어머니인 마르완이었다.
낯선 땅 피마에서 케이든은 오랜만에 헤카를 마주하게 됐다. 우기에 열린 음악회 이후 처음이었다.
눈에 익은 건 헤카만도 아니었다. 마르완과 그녀의 가족들 틈에 짐처럼 끼어들어 온 사람이 둘이나 더 있었다. 제국 황실의 유일한 쌍둥이인 티티와 네프였다.
정적이면서도 어딘가 굳건한 느낌이 있던 성내의 분위기가, 고작 이틀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사령관의 성은 떠들썩해졌다. 그 안에 뜨거운 활기를 품은 웃음소리가 성내의 곳곳을 누볐다. 수도에서 온 쌍둥이들 덕분이었다. 그들을 원하는 건지 꺼리는 건지 알 수가 없는 헤카는 덤과 같았다.
쌍둥이들은 기운이 넘쳤다. 헤카의 가족들과 함께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한은 그들이 헤카의 형제자매들과 마르완에게 점수를 따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라고 평했다.
지금도 그랬다.
어쩌다 보니, 케이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쌍둥이들에게 등을 떠밀려 본성 아래의 훈련장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자한과 쌍둥이들, 그리고 자한의 밑에서 오래도록 훈련을 받은 전사들의 대련을 관전하기 위함이었다. 케이든을 따라온 황궁의 호위들 또한 얼떨결에 그 대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무기를 고른 전사들이 허공에 날붙이를 휘두르며 몸을 풀었다. 검기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 사이로, 쌍둥이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섞여 들었다.
티티와 네프의 손에 붙들려 의욕 없이 훈련장에 끌려온 헤카는 그런 쌍둥이를 쏘아봤다. 하지만 막상 쌍둥이들이 각자 창과 검을 쥐자, 대련장 안쪽을 향해 이전과는 의미가 다른 열렬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을 생각도 하지 않고 팔짱을 끼고 섰다. 쌍둥이가 헤카를 향해 장난스럽게 입맞춤을 날리자 성을 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케이든은 자한을 대신해 마르주의 옆을 지키고 앉았다. 피마에 머물게 된 지난 아흐레를, 케이든은 마르주의 말벗 아닌 말벗이 되어 보냈다. 이제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색하거나 어렵지 않았다.
“……열사의 땅에서 쫓겨나 이곳저곳을 돌다, 북부에 있는 불법 검투장에서 꽤 오랫동안 허드렛일을 했어요.”
훈련장의 소리를 하나하나 귀에 담아 보던 마르주가 입을 열었다.
“그땐,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정말 듣기 싫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네요. 조금도 불안하게 느껴지지 않아요.”
“…….”
“그저, 자한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불안이 사라져 버렸다는 게…… 참 신기해요.”
마르주의 말이 천천히 이어졌다.
“자한은 황태자비님과 제가 많이 닮았다고 했어요.”
“그건, 너무, 마르주 님께 억울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억울함을 느껴야 하는 건 제가 아니라 황태자비님이시죠. 저 역시 자한처럼, 황태자비님과 제가 많이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니까요. 피마에서 황태자비님과 함께 보낸 시간 내내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가요. 중얼거리는 케이든의 목소리에 민망함이 듬뿍 묻어 있었다.
“황태자비님.”
마르주는 케이든을 불렀다.
“예전의 저는, 자한의 마음을 믿지 않았어요. 그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은 그토록 확신하면서 정작 자한의 마음은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어요.”
“…….”
“그러다 사막을 떠나게 됐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난 뒤엔 더 멀리로 도망치게 됐어요.”
뿌연 막이 서려 하얗게만 보이는 마르주의 두 눈이 훈련장 어딘가에 있을 자한을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을 곳만을 전전하면서, 이렇게 눈이 멀게 되면서…… 매일같이 한 후회가 뭔지 아십니까?”
절 닮은 남자에게, 마르주는 자신이 오래도록 품어 온 후회를 알리려 했다.
“한 번만 용기를 내 볼걸.”
“…….”
“자한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마음을 솔직히 전해 볼걸. 그런 후회를 했어요.”
먼발치에서도 마르주만 바라보고 있던 자한이 제 연인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마르주가 알아채지도 못할 텐데, 그를 보며 너무나 기쁘게 웃음 지었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죠.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후회 없이 살려고 해요. 몸도 성하지 못한 제가 자한과 함께한다는 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란 걸 알아요. 그걸 알면서도, 저 사람을 떠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
“황태자비님께서도, 후회 없이 사셨으면 좋겠어요.”
케이든은 침묵했다. 입을 달싹여 봤지만 끝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마르주는 말이 없는 케이든을 재촉하지 않았다. 답을 들으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다는 듯, 그저 조용히 미소 짓는 것으로 대화를 끝맺었다.
〈자한에게. 단 한 번만이라도, 내 마음을 솔직히 전해 볼걸. 그런 후회를 했어요.〉
마음을 전한다. 케이든은 마르주의 후회를 입 안에 머금어 봤다.
무심코,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제 모습을 떠올리게 됐다.
해를 등지고 선 아사드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사드에게 저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외쳤다. 아니, 당신도 나를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사드는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평소처럼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맞춰 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림자가 순식간에 걷혔다. 아사드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마음을 고백한 남자를 힘껏 끌어안아 줬다.
형편없는 망상이었다.
‘추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케이든은 맥없이 오른뺨을 쓸었다. 속이 울렁이고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러면서도, 심장께가 뜨거워졌다.
케이든은 자신이 초조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도대체 무어라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모를 낯선 초조였다.
“…….”
피마의 분위기만큼이나 아늑한 침묵 속에 잠겼던 케이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비님!”
익숙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 와서 그랬다.
그새 친해진 피마의 시종들과 더 깊고 은밀한 대화를 나눠 보겠다던 리헤트가, 그녀가 남았던 본성이 아닌 훈련장에 나타나 저를 찾고 있었다. 목소리도 낮추지 못한 채였다.
마르주에게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을 남긴 케이든은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리헤트를 향해 갔다.
케이든은 저렇게 부산하게 구는 리헤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걱정이 들었다.
“리헤트.”
저보다 한참이나 키가 작은 리헤트를 위해 살짝 몸을 굽히며, 케이든은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리헤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숨이 거친 걸 보면, 훈련장까지 쉼 없이 뛰어온 게 분명했다. 제 근처에 서 있던 호위 역시 리헤트를 알아보고 더 가까이 붙었다.
“그, 그게 황태자 전하께서…….”
리헤트는 다급히 말을 꺼냈다. 하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훈련장 너머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소란한 소리 탓이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검은 말을 탄 남자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훈련장 앞에 당도했다. 등자를 밟지 않고 곧장 말에서 뛰어내린 남자의 거친 걸음걸이를 따라, 그가 입은 흰 제복의 금장 장식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훈련장에 모여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남자에게로 쏠렸다. 오메가와 알파들은 침입자의 주위를 맴도는 위협적인 페로몬이 거북하다는 듯 한껏 낯을 찌푸렸다. 불쑥 나타난 미친놈에게 영문도 모르고 목을 졸리게 된 느낌이었다. 무시하기 힘든 존재감이 사람들의 오감을 뾰족하게 했다.
무기를 쥔 이들의 손에 대련을 준비할 때와는 다른 힘이 들어갔다. 큰 소동 없이 무사히 해치를 지나왔으니, 위험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남자가 가까워져 올수록 사람들의 적대감이 흐릿해졌다. 적대감을 대신해 찾아온 건 거나한 침묵이었다.
신의 기사인지 신의 대적자인지 모를 기이한 분위기를 가진 침입자는, 제국의 황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