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93)화 (93/97)

“황태자비를 빼돌린 건 아니야. 그저 사라지게 한 것뿐이지.”

“제가 아는 헬리오의 황제는, 냉정하지만 자애롭죠. 힘없는 사람을 다치게 할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 신부의 안위를 걱정하지는 않아요.”

“…….”

“제 신부가, 케이든이 어디에 있는지만 말씀해 주세요.”

저 위에 앉은 헤세트를 올려다보며 아사드는 말했다. 그는 분노를 드러내지 않기에 더 꺼림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런 제 아들의 낯이 마음에 들었다.

“내가, 왜 그걸 말해 줘야 하지?”

손끝으로 이마를 쓸며 황제 헤세트는 말했다.

“선황제이자 나의 아버지께서 삿된 감정에 이지를 빼앗겼던 자한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놨듯, 나 역시 황태자가 정신을 차리게 도우려는 것인데 말이야.”

“……하.”

“아사드. 그 애는 사라졌어. 그게 끝이야.”

“…….”

“예정보다 작별이 일러지긴 했지만, 어쩌겠니. 그 애를 대신할 네 신붓감을 새로 구해야겠구나. 자기 아들을 황비로 만들겠다고 고군분투하던 쿠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헤카는 안 돼. 쌍둥이가 그 애에게 푹 빠져 있잖니.”

과장된 한숨이 헤세트의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너는 어떤 신부를 원하니? 아름답고 총명한 데다 똑 부러진 귀족 자제? 성인이 되기 전의 네가 원했던 훌륭한 신부의 표상이지.”

“…….”

“외모만 따지면, 황태자비도 잘생기긴 했지. 총명하고 똑 부러진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말이야.”

“다른 신부는 필요 없어요.”

“고작 1년 사이에 네 취향이 바뀐 건지, 아니면 황태자비에게 정이 든 나머지 이전의 이상형을 부정하는 단계에 다다라 버린 건지. 궁금하구나.”

“이런 식으로 말장난을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그래?”

“시간만 뺏겼네요. 이만 나가 봐야겠습니다.”

차가운 눈으로, 아사드는 헤세트를 흘겨봤다.

시간 낭비. 그 말만이 떠올랐다. 어차피 케이든이 잠시 머물렀을, 어쩌면 지금도 머무르는 중인 곳이 어딜지 대강 예상이 갔다. 지금 제 앞에서 속 모를 얼굴을 하고 웃고 있는 어머니가 케이든의 이동을 도왔을 것이 분명했다.

어떤 결과를 얻게 되건, 일단은 길을 떠나야 했다. 아사드는 알현실을 그리고 황궁을 나서기로 했다.

“하나뿐인 어머니에게 버르장머리 없게도 구는구나. 아주 놀라울 정도야.”

혀를 찬 헤세트가 황좌에서 일어섰다. 낮은 계단을 내려온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내게도 첫사랑이 있었단다. 아버지에게 들켜 헤어지게 됐지. 그 사람은 황제 될 나의 반려가 되기엔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고, 제국을 이끌 내게 그런 유치한 사랑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당연한 결과였어.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잠깐은 세상이 잿빛으로만 보이더구나.”

“…….”

“하지만 아사드, 너는 그리 힘들지 않을 거야. 그저 신탁으로 엮이게 된 신부잖니. 네 형질이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몸정이 든 것뿐이니, 쉽게 보내 줄 수 있을 거다. 지금의 초조함도 금세 사그라들 테지.”

헤세트는 어느새 아사드의 앞에 섰다. 두 모자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던 황비가 다시금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도록 원했던 완벽한 신부를, 아름다운 신부를…… 왜 마다하려 할까. 역겹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릴 정도로 말이지. 나는 참 궁금해.”

“…….”

“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반려가 편해진 거니?”

“그 사람을 마음대로 휘두를 생각 없어요.”

다신, 그러지 않을 겁니다. 아사드는 말했다. 잠잠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 눈빛만큼이나 서늘했다.

“그래. 그렇다고 하자.”

제 아들을 올려다보며 헤세트는 웃었다.

“아사드. 너도 누누이 배워 왔잖니. 황제는 사랑을 취하면 안 돼. 네가 취해야 할 것은, 네게 득이 될 무기와 방패야. 너는, 그 남자의 존재가 네게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

“아니면 황태자비를, 정말 사랑하기라도 해?”

“폐하께 답을 드려야 할 의무가 제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섭섭하구나.”

아주 약간의 아쉬움도, 서운함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헤세트는 말했다.

“황태자비가 제 발로 궁을 나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네. 재밌어. 왜, 그 애가 너에게 정이 떨어졌을 거란 생각은 하질 못하지? 너처럼 어리고 오만한 것이 아니라, 다정한 연상의 알파와 마음이 맞게 됐을 수도 있지 않니. 그 알파의 손을 잡고 떠난 거야. 어때?”

“다른 알파라……. 그 알파가 죽어 슬픔에 잠긴 제 신부의 옆자리를, 제가 차지하면 될 일이군요.”

“흠.”

“케이든이 다른 알파를 만난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나게 된다면요.”

“황태자비의 사랑을 너무 믿는구나. 너는 그 애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으면서. 누굴 닮은 건지, 참 이기적이지.”

삐딱한 웃음이 번져 있던 아사드의 입꼬리가 굳었다. 헤세트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아사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순간,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사랑이라는 말이 짜증 나니? 어쩌겠어. 황태자비는 너를 사랑한다는데.”

“사랑한다고요? 누구를요?”

“왜 멍청하게 굴지? 방금,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 같은데.”

“……나를 사랑할 리가 없는데요.”

아사드가 중얼거렸다. 이제 막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얼이 빠진 채였다.

그의 마음 한편엔, 빛의 정원에서 마주했던 케이든의 창백한 낯이 지독할 정도로 선명히 남아 있었다. 제게 실망한 케이든은, 비를 맞은 사람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달이 뜬 밤의 사막에서도 케이든은 저를 떠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평생 옆에 있어 달라 협박하는 제게, 울며 매달리는 제게, 마지못해 곁을 허락해 줬다. 억지로 안겨 드는 저를 가엾게 여겨서, 마음이 약해져 다정히 마주 안아 줬을 뿐이었다.

그런 케이든이…… 나를 사랑한다고?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기대감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어쩌겠어, 내가 그리 들은 것을.”

내가 들었다. 그 말이 아사드의 낯을 더욱 굳어지게 했다. 계속해 입을 달싹여 봐도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나가 보겠습니다.”

간신히, 아사드는 말 한마디를 읊조렸다.

아사드가 느끼는 혼란이 그의 페로몬에 섞여 숨길 새도 없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제 모습을 어머니가 비웃으리라는 걸 아사드는 알았다. 그런데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더욱 명확해졌으니까.

“제국의 황태자가, 가치 없는 일을 행하겠다며 궁을 뛰쳐나가려 하는구나. 내가 허락할 것 같니?”

헤세트의 물음에 아사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제 신부와 황태자 자리.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그럼, 이 자리를 포기하겠습니다. 마트를 제국의 새 후계자로 삼으세요.”

“…….”

“저는 황태자비에게, 아니, 케이든에게 갈 겁니다.”

아사드는 말했다. 만면에 번진 웃음을 따라, 쨍하니 얼어붙어 있던 황금색 눈동자에도 불꽃이 피었다.

“그 사람을 만나서 제 마음을 전할 겁니다.”

아사드는 낡은 저주를 내던졌다. 제 눈과 입을 막았던 오래된 저주를 뒤로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어머니.”

“…….”

“제게 사랑을 물어보셨죠. 네.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 신부를, 케이든을 사랑하고 있어요.”

한낮의 볕보다 환한 생기가 아사드를 둘러쌌다. 숨길 수 없는 기쁨이 쏟아져 나왔다.

“아사드. 너는 지나치게 흥분했어. 비이성적인 사고를 숨기지도 않고 헛소리를 내뱉는구나. 네가 일국의 황태자라는 게 한심할 정도야.”

“상관없습니다.”

“뭐, 그게 나쁘진 않아.”

더는 말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헤세트가 뒤로 물러섰다.

“나름 대견하기도 하구나.”

심드렁한 얼굴로 팔짱을 끼는 황제의 두 눈에 미련은 묻어 있지 않았다. 아사드는 헤세트가 자신을 붙잡지도, 막아서지도 않으리란 걸 알게 됐다.

“……제 마음을 알고, 일부러 이러신 겁니까?”

헤세트는 아사드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픽 웃어 버릴 뿐이었다.

아사드는 헤세트의 뜻을 완전히 파악할 순 없었다. 제게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건지, 정말 저와 케이든을 떼어 놓으려 했던 것인지, 그저 놀리고 싶어서 이러는 건지. 무엇도 확신할 순 없었다.

하나 헤세트가 품은 진짜 뜻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그 어떤 것도 상관없었다. 일단은 케이든을 만나는 게 먼저였다. 남은 일은…… 아크로 돌아온 뒤에, 다시 마주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피마로 가겠습니다.”

“피마?”

“폐하를 알현한 케이든이 괜히 제게 삼촌 이야길 한 게 아니겠죠. 어색한 티가 났어요. 그 사람은 거짓말을 더럽게 못 하니까.”

“자신만만하구나. 하나 너의 고생을 내가 알 바는 아니지. 황태자비와 관련한 문제는 이제 네가 알아서 하려무나. 나는 네 아버지와 술이나 마시고 싶으니까, 빨리 나가.”

헤세트가 아사드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 짧은 손짓이, 황제와 황태자의 대화를 끝맺는 신호가 됐다.

아사드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미처 갈아입지 못한 흰 제복이 창 너머에서 들어오는 한낮의 빛을 받아 더욱 하얗게 반짝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알현실의 문이 완전히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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