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90)화 (90/97)

“하지만 이제는…… 삼촌의 마음이 이해돼. 지금의 나라면, 삼촌을 미친 사람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

“누가 뭐라고 지껄이건, 그분의 편에 서 줬을 텐데.”

저와 눈을 맞춘 아사드가 내어 준 말이 케이든은 좋았다. 아문의 입을 빌려 자신의 외삼촌을 매몰차게 평가하던 때의 냉랭함보다, 지금의 연민이 훨씬 좋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그분들의 편이 되어 주시면 됩니다. 기뻐하실 거예요.”

“응. 그럴게.”

온순히 답을 하는 아사드를 대신해 케이든은 미소 지었다. 잠시 표정을 잃었던 아사드의 얼굴에도 금세 이전과 같은 기쁨이 퍼졌다.

“회담을 빨리 끝낼 거야. 최대한 완벽하게, 하지만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지. 당신에게 줄 선물을 잔뜩 짊어지고 돌아오려면, 시간이 필요하거든.”

“아닙니다. 선물 그런 건…….”

“그래. 선물은 됐다고 할 줄 알았어. 가지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도, 곤란해하면서 고개만 저을 게 분명해. 저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무사히만 돌아오세요. 그렇게 말하겠지?”

정곡을 찔린 케이든이 무어라 대꾸는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읽어 내는 수밖에.”

“하지만 저는…… 정말, 전하가 무사히 귀환하시기만을 바랍니다. 그게 다예요.”

“응. 선물을 들고, 일찍 돌아오기까지 할게.”

아사드는 작게 속삭였다.

귓가에 닿는 숨이 너무 간지러웠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케이든은 다시 한번 웃었다.

“케이든. 자고 가도 돼?”

짧은 물음을 건넸던 아사드가 곧장 말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동관으로 돌아가는 길은 너무 멀어. 나는, 너무 피곤해서 걸을 힘도 없는데.”

어울리지도 않게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하는 말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아사드가 걸을 힘이 없을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그의 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네. 전하의 침의를 미리 준비해 뒀으니, 괜찮을 듯합니다.”

하지만 오늘도, 케이든은 모른 척 아사드에게 속아 넘어가 줬다. 과장되게 지어낸 표정이라고 한들 아사드가 실망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어쩌면, 아사드의 투정을 핑계 삼아 그와 더 오래 붙어 있고 싶어서 이러는 걸지도 몰랐다. 하나 케이든은 제 속내를 들여다볼 생각을 빠르게 접었다. 민망하기만 할 테니까.

케이든이 답을 내놓기 무섭게 포옹이 풀렸다.

맞닿았던 몸이 떨어진 대신 아사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고개를 기울인 아사드는 케이든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마치 문을 열어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케이든의 다물린 입술을 핥고, 아프지 않게 깨물어 왔다.

‘강아지 같아…….’

조금, 아니, 많이 큰 강아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케이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사드를 위해 입을 열었다.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진 아사드의 페로몬이, 저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곧, 아사드가 수도를 떠날 것이다. 이유 없이 사람을 울적하게 만드는 사실을 곱씹으며 케이든은 아사드의 목을 끌어안았다.

* * *

자한은 멸망한 공국의 옛터이자, 이제는 황제 직할령이 된 중서부의 땅 피마를 지키는 사령관이고 감시자였다.

눈이 시린 에메랄드빛 바다 대신 검푸른 바다를 그 옆에 품은 서부 도시 피마는, 파도가 치지 않는 바다만큼이나 차분하고 평온한 곳이었다. 그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성격이며 일대의 지형과 날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마는 바닷길과 땅길 모두 모나지 않아 상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도시였다. 수도인 아크와도 그 사이의 거리가 멀 뿐이지, 험준한 지대를 지나칠 필요가 없어 이동이 힘들지 않았다. 그마저도 황실 내부의 포털을 이용하면 사흘은 걸릴 이동 시간을 반나절가량으로 줄일 수 있었다.

아사드가 회담장이 마련된 남단으로 떠난 어제, 케이든 역시 곧장 궁을 벗어나 피마로 가게 됐다.

피마에 완전히 다다를 때까지. 케이든은 꽤 오랜 시간을 낯빛이 어두워진 채로 보내야 했다. 부담감 탓이었다.

황제의 명에 따라,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 케이든의 여정에 동참하게 됐다. 황태자비가 올라탄 마차와 짐마차들을 따르는 호위의 수가 스물을 훌쩍 넘어가는 건 그러려니 했다. 황제 폐하께서 사랑하는 막냇동생에게 보내는 선물을 지키기 위해서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 외에는…… 다소 과했다.

함께 피마에 가기로 약속해 뒀던 리헤트와 별안간 출장을 떠나게 된 주치의 라몬을 필두로, 각양각색의 역할을 가진 시종들이 케이든을 뒤따랐다. 하다못해 황태자비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음악가들까지 따라붙었다. 케이든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어떻게서든 받아들여야 하는 황제의 뜻이기에 불만을 표할 순 없었다.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케이든은 홀로 걱정과 부담감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도록 얼굴이 굳어 있지만은 않았다. 함께 마차를 타 준 이들 덕분이었다. 리헤트와 젊은 호위 하나가 저와 마주 앉은 채 속닥속닥 떠드는 것을 구경하는 일이, 케이든은 즐거웠었다.

〈너. 왜 자꾸 황태자비님을 쳐다봐? 보지 마.〉

〈내가 지켜야 할 분을 보는 게 뭐가 문젠지 모르겠네. 그럼, 내가 그쪽이라도 봐야 하나?〉

〈너 알파라며. 알아서 눈 깔고 있어.〉

자꾸 이런 우스갯소리가 나오는 게 민망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케이든을 필두로 한 황실의 일원들은 순탄하게 피마에 도착했다. 볕이 하얀 오후가 돼서였다.

옛 공국의 성을 크게 고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는 자한의 거처는, 제국 헬리오와 북부의 왕국 엘바를 반씩 섞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과격해 보일 정도의 뒤섞임이 탄생시킨 오묘한 분위기가 신비로웠다.

성의 해치를 지날 때부터 본성의 입구에서 마차가 멈춰 설 때까지. 케이든은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을 홀린 듯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케이든은, 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자한을 마주하게 됐다.

〈피마에서 다시 보니 더 반갑네.〉

방긋 웃어 보인 자한은 케이든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인사를 건넸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남자의 얼굴엔 무어라 규정하기 어려운 기쁨이 묻어나 있었다. 해묵은 쓸쓸함과 분노는 몽땅 깎여 나간 채 둥글어져 있었다. 묵은 피로를 단숨에 잊고, 케이든은 금세 자한을 따라 미소 짓게 됐다.

자한은 누이를 대신해 저를 찾아온 황태자비와 황궁의 일원들에게 별관 전체를 내어 줬다. 본성만큼이나 색다른 분위기를 가진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저를 도우려는 시종들을 물리고 케이든은 욕실에서 홀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문득 창 너머에 시선을 줬을 땐, 하늘이 붉은색으로 또 보라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멀미약을 과하게 복용한 라몬이, 안경을 붙든 채 간신히 제 몸 상태를 확인하고 떠났을 때만 해도 볕이 환했는데 말이다.

약속된 저녁 만찬에 참석하기 전까지 케이든에겐 길지 않은 여유 시간이 주어졌다. 그 시간을, 케이든은 창 너머를 구경하는 일에 쓰게 됐다.

식사 자리에선 자한의 연인을, 마르주라는 남자를 만나게 될 것이라 했다.

〈내 연인이 아직 몸이 좋질 않은 데다,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툽니다. 황태자비님과도 긴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할 듯해요.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말도, 행동도 점점 더 자연스러워질 겁니다. 넓은 마음으로, 조금만 이해해 줘요.〉

장난스럽게 눈 한쪽을 깜빡이며 자한은 말했었다. 사람을 대하는 일에 서툰 건 저 역시 마찬가지임을 모르는 눈치였다.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왜인지, 제가 마주하게 될 자한의 연인이 좋은 사람일 것만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찾아와 그랬다. 긴장은 됐지만 말이다.

‘아사드는…… 뭘 하고 있을까.’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대며 케이든은 아사드를 생각했다. 사람이 많아 복잡하지만 그만큼 아름답다는 항구 도시에 발을 들인 아사드를 머릿속에 그려 봤다.

얼마 전, 황궁을 떠날 채비를 하며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자신이 제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 줬었다. 회담장에서 입어야 한다는 금장 장식을 단 새하얀 제복이었다.

낯선 차림새를 한 아사드는, 정말 눈부시게 아름다웠었다. 막 하늘에서 내려온 젊은 신처럼 보일 정도였다. 정작 멋있게 차려입은 당사자는 옷이 너무 불편하다며 투덜거렸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설프게나마 진심을 담아 칭찬하니, 얼굴을 펴고 밝게 웃어 줬었다.

헬리오 사람들도 저 동대륙에서 올 사람들도, 다들 넋을 놓고 아사드를 보고 있을 거다. 케이든은 확신했다.

아사드와 마주하고 앉을 왕세자가 그 아무리 대단한 미남자라고 해도 아사드처럼 아름답지는 못할 거다. 심지어, 아사드는 그와 그림처럼 잘 어울리는 하얀 제복까지 입을 예정이었다. 연국의 왕세자마저 아사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입가가 씰룩였다. 창 너머의 풍경을 등진 채로, 케이든은 몰래 웃음 지었다.

“…….”

아사드가 보고 싶었다. 저와는 어울리지 않는 간지러운 그리움을 느끼며 케이든은 꽤 오래, 아사드를 생각했다.

* * *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지 않은 이른 저녁에, 케이든은 다시 한번 자한을 마주하게 됐다.

성내의 그 어느 곳보다 더 밝게 불을 켜 둔 식당에서 자한은 케이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피마에 도착한 손님들을 맞으러 나왔을 때와는 달리 혼자가 아니었다.

자한은 한 남자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남자를 바라보는 자한의 눈빛과 행동이 애틋했다. 그만큼 조심스럽기도 했다. 순간, 자한이 아주 귀한 존재를 떠받드는 성기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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