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을 들긴.”
헤세트는 고개를 저었다. 선명한 금빛을 머금은 두 눈에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케이든의 부정에 기분이 상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쌀쌀맞게만 느껴졌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른 변화였다.
어쩌면…… 달라진 건 분위기가 아니라, 제 마음일지도 몰랐다. 황제의 웃는 얼굴이 너무나 아사드를 닮아 있어서, 그를 생각나게 해서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 거다. 그 말도 안 되게 민망한 생각을 미처 부정하지 못한 채 케이든은 멋쩍게 웃어야만 했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영양가 없이 무익한 말만 늘어놓는 것도 좋지만, 자네가 겁먹은 집토끼처럼 발발 떨며 까무러치는 건 보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해야 할 말만 간결하게 하는 수밖에.”
“……아닙니다.”
겁먹은 집토끼. 그 이상한 비유를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던 케이든이 간신히 답을 내놨다. 교재 속에서 봤던 커다랗고 새까만, 그런 데다 사납게 생기기까지 한 헬리오의 집토끼 그림을 떠올려 보면서였다.
“거짓말은.”
“…….”
“자한을 알지? 아사드의 외삼촌.”
팔짱을 낀 헤세트가 말했다. 케이든은 생각지도 못했던 화제였다.
“네. 지난 연회에서 뵈었습니다.”
“그 애에게 아주 기쁜 일이 생겼어. 대단한 일이기도 하지. 남은 평생을, 광대처럼 웃는 낯으로 살게 될 거야.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붙들고 있던 문제가 완벽히 풀렸거든.”
“…….”
“마르주. 자한이 그 애의 연인을 찾았어.”
헤세트가 전해 준 자한의 소식에 케이든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아문에게서 들었던 오래된 사랑 이야기가, 해묵은 씁쓸함이 묻어 있던 자한의 두 눈과 목소리가 생생히 떠올랐다.
〈내가 그랬잖아요. 당신이 내 연인을 닮았다고. 당신 같은 사람들은 욕심이 없어요. 하지만 속에 담은 걱정만은…… 사막의 모래알처럼 많죠. 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헤아릴 수 없던 연인을, 자한은 다시 만나게 됐다. 케이든은 자한이라는 사람을 잘 알지 못했다. 고작 며칠 본 게 다였다. 그런데도, 절친한 사람의 행복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마음이 기뻤다.
“나는, 내 어린 동생이 숙원을 이룬 걸 너무나 축하해 주고 싶어. 내 두 눈으로 그 애의 기쁨을 맛보고 축복을 전하고 싶지. 나 역시 도움을 준 일이니 더욱 간절해. 하지만 공교롭게도, 황제인 내가 궁을 비울 수 없어서 말이야.”
“…….”
“자한과 마르주가 당장 아크로 오는 것 또한 요원하고. 마르주는 시력을 잃은 상태야. 두 눈이 먼 이가 자한의 품을 익숙하게 느낄 수 있게, 시간을 줘야겠지.”
헤세트의 말이 이어졌다.
“고작 내 흥미 좀 채우겠다고, 아픈 사람을 오라 가라 하고 싶지 않아. 괴롭힘밖에 되질 않잖아. 그래서, 나를 대신할 이를 피마로 보내려고 해.”
케이든은 입 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어딘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헤세트가 더할 말이 무엇일지 예상이 가서 그랬다.
“내 앞에 있는 황태자비가 나를 대신해 줘야겠어. 피마로 가서 자한에게 선물을 안겨 줘. 적당히 축하를 건네면서, 편지엔 담을 수 없는 이야기도 전해 주고.”
“제가 어찌…….”
“공적인 일이 아니라 사적인 일이야. 특사 따위가 아니라 가족으로, 우리 황실의 일원으로서 피마에 가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어.”
“…….”
“자네의 방문은 자한과 그놈의 반려가 될 남자가, 마르주가 원하는 것이기도 해. 물론, 나 역시 그걸 바라지.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도 없고.”
케이든은 혼란스러웠다. 왜 황제가 제게 가족 간의 일을 맡기려 하는 건지, 왜 자한과 그의 연인이 제가 방문하길 바라는 건지…… 무엇 하나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눈치 없는 자신이 본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피마로 가는 것이 정말 가족 간의 일이라면, 저보단 황녀인 마트가 나서는 편이 맞지 않겠는가.
“나는 자한과 마르주, 그 애들을 서너 달은 더 지난 후에야 보게 될 거야. 아쉬운 일이지.”
“저는…….”
“그때까지. 자네에게 전해 들을 이야기로 궁금증을 덜어 내며 지내는 수밖에. 그러니, 내 막냇동생의 행복을 머릿속에 잘 담아 오도록 해. 그 순간을 내게 온전히 전해 줄 수 있도록.”
눈앞에 있는 이는 황제였다. 헤세트는 케이든에게 부탁을 하는 게 아니었다. 반드시 따르고 해내야 할 명을 내린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반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케이든은 순순히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헤세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예상치 못한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사드에겐 비밀이야.”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그 애가, 연의 왕세자를 만나기 위해 남부로 떠날 준비 중인 건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케이든은 답했다. 바로 엊그제, 아사드가 제게 전해 줬던 이야기들을 떠올리면서였다.
〈1년에 두 번. 헬리오의 후계자는 바다 건너 동대륙에 있는 연국의 후계자와 만나야 해. 회담 때문에.〉
케이든의 손을 이유도 없이 주무르며 아사드는 말을 이어 갔었다.
〈회담은 두 나라 사이의 평화 조약을 되새기는 친목의 장이야. 하지만 그 뒤로는 다른 장이 열리지. 각 나라의 재상들이 모여 주판을 두드리며 수많은 거래를 하니…… 교역의 장이 더 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어.〉
사흘 뒤, 아사드는 헬리오 최남단에 자리한 항구 도시 무히트로 떠날 예정이었다. 지난해엔 혼인식 문제로 바쁜 아사드를 대신해 마트가 동대륙에서 왕세자를 만났으니, 올해는 아사드가 직접 왕세자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연국엔 왕세자비가 없어. 나이 스물일곱이 넘은 왕세자에게 반려자가 없다니 말도 안 되지. 그 말도 안 되는 일 덕분에 나는 회담에 혼자 가야 하고. 나만 반려와 동행할 수는 없다나. 하지만 내년엔, 그놈도 좋으나 싫으나 혼인을 해야 해. 그러니 다음 회담은…… 당신과 함께 갈 수 있어. 아주 큰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함께 동대륙에 가게 될 거야.〉
케이든의 손을 더욱 꽉 붙잡고 아사드는 말했었다. 두 뺨이 어느새 붉어진 채였다. 아사드를 바라보던 케이든까지 괜스레 들뜨게 할 정도로 그 색이 예뻤었다. 함께 바다를 건넌다니. 들뜨는 게 아니라 긴장을 해야 할 말이었는데 말이다.
“그래. 아주 미주알고주알 제 얘기를 떠벌려 놨겠네.”
“……그러시진 않았습니다.”
“그럴 리가. 여하튼, 자네도 아는 그 회담 준비가 문제야. 정신이 없는 와중에 불안증이 도지면 안 되니, 황태자비의 피마행을 숨기자는 거지.”
심드렁한 목소리로 헤세트는 말을 더했다.
“불안증이 아니라 의처증이려나.”
“아닙니다. 전하께선 그런, 그런 이상한 병은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케이든의 낯이 허옇게 변했다.
자신의 말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케이든을 보며 헤세트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곧, 헤세트가 손을 저어 보였다.
“나는 그 애가 제 일을 뒷전으로 둔 채 자네에게 참견하는 꼴을 봐 줄 생각이 없어. 지금처럼 회담 준비나 잘하게 두자고.”
케이든은 헤세트의 말이 의아했다. 제가 명받은 일이 아사드를 불안하게 할 것 같지 않아 그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의 외삼촌이 지키는 피마에 방문하는 게 아닌가. 아사드가 제 일에 관심이야 보이겠지만, 헤세트의 말처럼 그의 일을 뒷전으로 둘 정도로 과도한 신경을 쏟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사드가 괜히 신경 쓸 일을 만들지 말자는 헤세트의 이야기엔 공감했다. 헤세트가 건넨 이상한 농담에 부정한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정리하지. 피마에 있는 자한에게 나를 대신해 축복을 전하는 것, 아사드에겐 그 사실을 비밀로 하는 것. 이 두 개가 자네가 해내야 할 일이야.”
“알겠습니다.”
케이든은 급히 답했다.
헤세트는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케이든을, 자신의 눈을 피하는 방법을 까먹은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긴장한 남자를 말없이 바라봤다. 웃음기가 지워진 헤세트의 얼굴이 대리석을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흠결 없이 아름다웠다.
“겁이 많아서 그런가.”
“…….”
“남은 시간에 대해선 묻지 않는구나.”
헤세트의 말이 색 없는 응접실을 침묵 속에 빠트렸다.
“아사드는, 자네가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거라고 장담하더군. 몇 년 후에도, 몇십 년 후에도 여기에 있을 거라고 말이야. 아니, 몇백 년은 더 함께할 거라고 말했어. 꽤 유치하지?”
케이든의 낯이 다시 창백해졌다. 이전과 다른 빳빳한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하지만 동시에, 케이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
케이든은 헤세트를 통해 그가 아사드에게 들었던 말들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아사드가 정말, 적어도 당장은, 나와 함께하길 원하는구나. 정해 둔 기한이 지난 뒤에도 내가 옆에 있길 바라는구나.
그 사실이, 케이든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아사드가 저를 원치 않을 순간이 아주 빠르게 온다고 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오늘을 생각하면 웃을 수 있었다.
“그 애와 뜻이 같은지 묻고 싶구나.”
두려움과 기쁨의 교차로에 선 채로 케이든은 헤세트를 마주 봤다.
“저는…… 황실의 일은 모릅니다. 그저, 전하께서 저를 내치실 때까지 그분 옆에 있어 드리기로 약속했을 뿐입니다.”
입을 달싹이던 케이든이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제가 그분의 곁에 머무를 시간이 2년보다는 길어질 것 같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시는 것만큼 길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케이든은 헤세트에게 솔직한 속내를 전했다. 단내를 풍기는 기쁨 속에서도 케이든은 좋은 결말을 꿈꾸지 않았다. 욕심을 내는 법을 알지 못해 그랬다.
“……약속이라. 아사드 그것이 옆에 남지 않으면 발목이라도 부러트리겠다고 협박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