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디에든
케이든은 그의 주치의인 라몬을 만났다. 제 침실 맞은편에 자리한 접견실에서였다.
몇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던 라몬과의 독대도 이제는 응당 거쳐야 하는 일과 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오늘은…… 곧 쓰러질 것처럼 안색이 나쁜 의사 선생님을 처음 소개받던 날처럼 마음이 조여들었다. 라몬의 이상 행동 때문이었다.
본래의 약속 시간보다도 더 일찍 케이든을 찾아온 라몬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 줬었다. 말이 많았다는 얘기였다.
오늘도, 케이든은 라몬이 쉼 없이 중얼거리는 제국어를 똑바로 알아듣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라몬의 말을 바로 알아듣는 일은 여전히 버거웠지만, 그래도 리헤트에게 따로 번역을 부탁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는 익숙해졌다.
그런데 그 말 많던 라몬이 별안간 뜻 모를 침묵에 빠져 버렸다. 꼭 낮과 밤처럼 다른 분위기를 내보였다. 검진을 마친 직후의 일이었다.
“음…….”
라몬은 도통 말을 잇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그런 라몬을 앞에 두고 케이든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처음이라 저절로 긴장이 됐다.
라몬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흘러내리지도 않은 안경을 자꾸만 추켜올리고, 이유 없이 주먹을 쥐고 펴길 반복했다. 갑자기 안경을 벗어 들고는 마른세수를 하기까지 했다. 안 그래도 피곤해만 보이는 얼굴이 수심에 푹 잠겨 버렸다.
“제 건강에…… 문제가 있나요?”
큰마음을 먹고, 케이든은 라몬에게 먼저 물음을 건넸다. 이러다간 오후가 되도록 접견실 밖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아 라몬을 대신해 입을 열어 본 거였다.
걱정이 없다는 듯 가볍게 묻기는 했으나 케이든 역시 사실은 불안한 상태였다. 저런 라몬의 모습을 본 게 처음이라 그랬다. 라몬은 술을 잔뜩 마신 사람처럼 정신없이 굴고 있었다. 술 냄새는 조금도 나질 않는데 말이다.
“혹시 병에 걸렸다거나…….”
“병이라뇨! 가당치도 않습니다!”
깜짝 놀란 라몬이 외쳤다.
“그저, 아직은, 말을 아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
“당장 제 소견을 말씀드리고 싶지만, 제가 내릴 진단에 관한 확신이 부족합니다. 시간을 두고 더 자세히 살펴본 뒤에 말씀드리죠. 너무 늦지는 않을 겁니다.”
다시 한번 안경을 추켜올리며 라몬은 말했다.
확신이 부족하다는 건 뭘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케이든은 병을 앓아 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한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았다. 황실의 의사들이며 치료 마법사들 역시, 페로몬 문제를 빼면 케이든의 건강에 별다른 이견을 표하지 않았었다. 지금 케이든의 눈앞에 있는 라몬 역시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의사나 치료 마법사를 찾아갈 돈이 없으니 아프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쳐 그런 건지, 운이 좋아 튼튼하게 태어나 그런 건지. 그 이유는 몰랐다. 어찌 됐건 가난한 제겐 다행인 일이라고, 케이든은 내내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그 행운도 끝이 날 모양이었다. 죽을병에라도 걸린 건가. 그런 우습고 맥 빠지는 생각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게 됐다.
“질병이 아닙니다. 물론…… 아프시긴 하겠지만요. 하지만 걱정하실 질병 따위와는 분류가 다른 아픔이고, 아뇨, 됐습니다. 황제 폐하 밑에서 계속 일을 하려면 주둥이 조심해야죠…….”
주절주절 빠르게 이어지는 라몬의 혼잣말을 케이든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주둥이를 조심해야 한다는 다짐 정도만이 확실하게 귀에 꽂혔다.
“나쁜 일은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낯을 하고 케이든은 답했다. 아사드 못지않게 제 건강을 염려해 주는 남자의 말이니 믿을 수 있었다. 다소 당혹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부군 되시는 황태자 전하와 계속 접촉하셔야 합니다. 시간이 되는 대로 알파 페로몬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요.”
무심히 건네진 라몬의 말이 케이든을 굳게 했다.
알파의 페로몬이 필요할 거라는 말을 들은 케이든은 이전보다 더한 당혹감에 빠졌다. 드디어 제 페로몬이 완전히 망가질 때가 왔나 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저는 인위적으로 형질이 전환된 오메가였다. 안 그래도 미약하던 페로몬이 약을 과용하며 완전히 망가지기까지 했었다. 그래도, 아사드와 몸을 섞은 뒤로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찾아 가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지도 몰랐다.
두렵지는 않았다. 문제라고 해 봤자, 아사드를 만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일 테니까. 어쩌면 그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페로몬이나 희락기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어질 테니 말이다.
하지만…….
미묘한 욕심이 케이든을 잡아끌었다.
케이든은 자신의 페로몬이 참 어정쩡하고 초라하다고 생각했다. 황홀할 정도로 달콤하고 따뜻한 아사드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질 않았다.
하나 그런 제 페로몬을, 그 어정쩡하고 초라한 것을 아사드가 좋아해 줬다. 그래서, 케이든은 자신의 페로몬 향을 잃고 싶지 않았다.
덤덤하기만 하던 케이든의 마음에 나지막한 풍랑이 일었다.
〈나쁜 일은 아닐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케이든은 라몬을 믿었다. 아니, 자신의 페로몬에 아무런 문제가 없길 바라서 라몬의 말을 믿으려 했다.
“제가 괜한 불안을 심어 드린 겁니까?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미간을 찌푸린 라몬이 웅얼거렸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라몬의 모습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걱정 안 해요.”
굳은 표정을 푼 케이든이 웃어 보였다.
“나 걱정 많습니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으신데요.”
너무 빠르게 간파된 거짓말이 민망해 케이든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크게 한숨을 내쉰 라몬은 곧이어 잠시 미뤄 뒀던 잔소리를 케이든의 앞에 모조리 쏟아 냈다. 당장의 걱정을 잊게 해 드리겠다며 새로운 걱정거리들을 잔뜩 속삭였다.
10여 분간 쉼 없이 이어진 잔소리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귀에 담은 뒤에야, 케이든은 자신의 주치의와 작별할 수 있었다.
무거워진 마음을 모른 척하며 케이든은 접견실을 떠났다. 다시 그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라몬에게 들은 말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아 그랬다. 케이든은 그저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어야 했다. 하나같이 영양가 없이 어둡기만 한 생각들이었다.
자신이 떠올리는 모든 것이 너무 이른 걱정이고 과한 상상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다가올 불행에 대비하려 하는 마음을 막지 못했다.
하나 케이든의 걱정이 방패처럼 단단해지기 전에 또 다른 손님이 그를 찾아왔다.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낯을 한 리헤트였다.
케이든의 불안을 깨부순 건, 리헤트가 내놓은 말 한마디였다.
“황제 폐하께서, 황태자비님을 뵙길 원하십니다.”
황제 궁 남관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그리 말씀을 전하셨어요. 잔뜩 긴장한 리헤트가 말을 끝맺었다. 평소의 리헤트답지 않게 기가 죽은 모습을 하고서였다.
무언갈 준비할 새도 없었다. 케이든은 리헤트를 따라 급히 방을 나섰다. 케이든에게 찾아든 새로운 불안이 그의 주위를 맴돌던 걱정을 단번에 삼켜 버렸다.
* * *
황제 궁의 알현실도 접견실도 아닌 가족 응접실에서, 케이든은 황제 헤세트 메케리우스를 마주하게 됐다.
황제의 침실 왼편에 딸린 응접실은 총천연색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별궁의 응접실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이곳은, 삭막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색이 없었다. 흰 화병에 꽂힌 꽃마저 그 풍성한 잎이 하얗기만 했다.
이 무채색의 공간에서, 헤세트는 케이든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파 위에 홀로 앉은 채였다.
헤세트는 응접실에 발을 들인 케이든을 빤히 바라봤다. 케이든이 자신에게 예를 다해 인사를 올리자 그 시선이 더욱 빤해졌다. 머뭇대는 케이든에게, 헤세트는 자리에 앉으라 눈짓만을 보냈다. 곧장 입을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케이든은 헤세트의 맞은편에 놓인 흰 소파에 황급히 걸터앉았다. 푹신한 가죽 소파가 꼭 오래된 나무 의자처럼 불편하게 느껴졌다. 제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는 헤세트의 시선 탓이었다.
짧은 백금색 머리카락과 그 아래로 보이는 황금색 눈동자부터 발목에 걸린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전신이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생기 없는 공간에서 홀로 빛나는 태양과도 같았다.
너무나 아사드와 닮은 헤세트를 앞에 두고, 케이든은 제 마음이 조여드는 걸 느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무거운 적막이 응접실 안에 내려앉았다.
“얼굴이 많이 좋아졌어.”
헤세트가 말을 건넸다. 부드럽지도 딱딱하지도 않은 저음의 목소리가 무심했다.
“……다, 황태자 전하께서 마음 써 주신 덕분입니다.”
긴장으로 굳은 손을 모아 쥐며 케이든은 답했다. 아문에게 배웠던 황족들의 어투가, 그의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걔가 뭘 해 줬다고. 자기 반려를 괴롭히기나 했겠지.”
그 목소리만큼이나 나지막한 헤세트의 웃음소리가 귀에 박혔다. 케이든은 화들짝 놀라 모았던 손을 다시 풀어야 했다.
“아뇨, 괴롭힘이라니, 그런…… 그러신 적 없습니다.”
“편을 들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