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84)화 (84/97)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질 낮은 따돌림이라도 당할까 걱정하며 야영지에 남을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그들에게 과격한 경고를 건네는 아사드의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센은 불 너머의 케이든을 빤히 바라봤다. 하나 다시 입을 열기는 망설였다. 막힘없이 말을 이어 가던 게 언제였냐는 듯 말이다. 그러나, 침묵이 길어지기 전에 결국 말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사람이 사람에게 품은 애정은 숨길 수가 없어요. 눈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궁에 떠도는 소문 같은 건 믿지 않아요.”

“…….”

“해가 뜨기 전에, 황태자 전하를 다시 만나게 되실 거예요. 분명 그럴 거예요.”

센의 목소리에 담긴 단단한 믿음을 케이든은 부정하지 못했다. 센이 건넨 말을 평범한 농담으로 간주할 수도, 반문을 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품은 애정은 숨길 수가 없어요. 눈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잖아요.〉

센의 목소리가 케이든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사드는 나를 아낀다. 나를 사랑하진 않지만, 나와 함께하길 원한다.

케이든은 그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내내 부정하던, 필사적으로 돌아보지 않으려 했던 어떤 사실을 곱씹어 봐야 했다.

길어지는 밤의 적막 속에서, 케이든은 오래도록 아사드를 생각했다.

밤이 깊어졌다. 시간이 얼마만큼 흐른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확실한 건, 사막의 하늘이 이전보다 더욱 짙은 색으로 변했다는 사실뿐이었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센은 불가의 온기를 느끼며 꾸벅꾸벅 졸다가는 결국 케이든의 외투를 뒤집어쓴 상태로 잠이 들었다.

케이든은 그저 타는 불꽃만을 바라봤다. 자신을 괴롭히는 소란한 생각들까지 태워 주길 바라면서였다.

낮은 모래 언덕 너머에 던져 둔 마법석의 빛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아미나에게선 여전히 소식이 없었다. 케이든은 어쩌면, 아미나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게 됐다. 아미나 본인에게 문제가 생겼을 거란 판단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아미나보단 그녀의 말에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높다고 여겼다.

「……불어야지.」

케이든은 목에 걸린 호각을 들어 올렸다. 호각을 부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 아사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뭐가 문제라고, 심장이 뛰었다. 바퀴가 빠진 수레처럼 덜컹대며 요란하게 뜀박질을 했다. 안 그래도 든 게 없던 머릿속이 더 새하얗게 변했다.

케이든은 꽤 한참이나 망설였다. 긴장감 사이를 헤맸다.

그러나 결국, 호각의 바람구멍에 입을 댔다. 아사드가 알려 준 대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호각에 세 번 숨을 불어 넣었다. 저 하늘을 날고 있을 수색꾼들에게 소리가 닿길 바랐다.

「……간단하네.」

고작 이런 걸 두려워했었구나. 너무나 쉬워서, 허무함에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고개를 든 케이든의 눈이 천천히 깜빡였다. 그는 높고 낮은 모래 언덕들이 짊어진 밤하늘을, 어둠 속에서 더욱 하얗게 반짝이는 별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사막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운 곳입니다. 언젠가는, 케이든 님께서도 모래 위에 앉아 그 밤을 마주하시게 될 겁니다.〉

별궁의 예술관에 걸린 그림 앞에서 아문은 케이든에게 말했었다.

그 낮보다 아름다운 밤을, 케이든은 천천히 마음에 새겨 봤다. 아문의 말이 맞았다. 사막의 밤은 아름다웠다. 케이든은 이제야 그 사실을 깨우쳤다.

아문을 다시 만나게 될 일은 없을 거다. 그걸 알면서도, 케이든은 자신이 마주한 아름다운 풍경을 아문에게 전해 주고 싶어졌다. 아문 네가 말한 아름다움이 뭔지 알게 됐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도 잠시였다. 케이든은 다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쪼그려 앉은 저와 센을 간신히 가려 주는 낮은 모래 언덕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어딘가 부산한 소란이었다. 무언가가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단 것 역시 소름 끼칠 정도로 잘 느껴졌다.

호각을 분 건 고작 10여 분 전의 일이었다. 저 소리의 주인공이 아사드일 리 없었다.

케이든은 제 허리춤을 더듬었다. 아미나가 건네줬던 단검을 찾아 손에 쥐었다. 검집을 벗기자 드러난 검날이 너무나 날카로웠다.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뜩였다.

‘아미나라면 다행이지만…….’

목구멍을 간질이는 꺼림칙한 기분을, 케이든은 애써 무시해야 했다.

그는 조심히 언덕을 넘었다. 모래 언덕 앞에 우뚝 서 있던 새까만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케이든은 두려움을 다잡았다.

싸움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제 손에 들린 단검 역시 너무나 낯설었다. 제가 믿을 거라곤 아문이 알려 준, 괴한의 명치에 검날을 박아 넣고 즉사시키는 법 따위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손놀림이 참으로 가관이라는 말을 들으며 아문에게 낙제점을 받았었다.

케이든은 자신이 몸을 숨긴 나무 앞쪽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불빛을 향해 달음박질해 오는 말과 눈이 마주쳤다. 피워 뒀던 마법석의 영롱한 빛이 까만 말의 얼굴을 완전히 비출 정도로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아사드의 말이었다.

등자도 밟지 않고 말에서 뛰어내리는 남자를, 케이든은 멍하니 바라봤다.

마법석의 빛은 아사드의 얼굴에도 닿았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백금색 머리카락을, 그 아래로 보이는 땀에 젖은 이마와 날카로운 황금색 눈을, 그 위에 서린 초조와 갈급을 비췄다. 아사드의 꽉 다물린 입술과 뺨에 묻은 새까만 핏자국을 밝혔다.

“케이든!”

아사드가 저를 부르고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든 결국 저를 찾아와 준 남자가 제 이름을 불렀다.

저렇게 간절하게 자신을 찾는 목소리를, 케이든은 일평생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사드가 나를 찾아와 줬다.

온몸을 저릿하게 하는 커다란 안도와 기쁨 속에 푹 잠긴 채로 케이든은 그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움직였다.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에게 화답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걷게 했다.

케이든은 제 몸을 숨겨 주던 나무를 벗어났다. 떨리는 손으로 꽉 쥐고 있던 단검이, 모래 위에 힘없이 꽂혔다.

아사드를, 아문을, 저 어렵고 복잡한 남자의 이름을 케이든은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그를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사드는 금세 제 반려를 찾아냈다.

욕지거리를 내뱉은 아사드가 케이든을 향해 뛰었다. 말도 안 되게 창백한 낯을 한 남자는, 곧장 케이든을 끌어안았다.

하염없이 부르던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 초조함을 머금은 안도가 찾아왔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품에 단단히 갇혔다. 한참이나, 자신의 귓전에 쏟아지는 아사드의 숨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황태자님…….”

“내가.”

“…….”

“내가 얼마나, 당신을…… 찾아 헤맸는지 알아?”

케이든은 정답을 알지 못하는 물음을 아사드는 입에 담았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불러 주기만, 찾아 주기만 바라면서, 이 개같이 넓은 사막을 뒤졌어.”

아사드는 품에 안은 케이든을 더 꽉 끌어안지도, 그렇다고 놓아주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아사드를 케이든은 황급히 마주 안아 줬다. 마치 아이를 달래듯 제 손으로 아사드의 등을 천천히 쓸어 줬다. 어루만져 줬다.

“왜. 도대체 왜, 당신이 나를 찾지 않는 걸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내가 너무 미워서, 차라리 사막에서 길을 잃길 바라는 건가? 어쩌면, 유랑민들을 찾아서 그 속에 숨으려는 걸지도 몰라. 어떻게 해서든 나한테서 도망을 치려는 거야. 그래서 호각을 불지 않는 건가? 온갖 상상을 하면서…… 말을 타고 달렸어.”

낮아진 목소리로,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자신의 불안을 고백했다. 케이든의 답을 바라지 않는 말들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뭐든 안 돼, 케이든. 당신은 나를 떠날 수 없어. 아니, 떠나도 돼. 대신 붙잡힐 걸 알고 가.”

“그게 무슨…….”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을 찾아내는 일에 통달해 버렸거든. 지금도 그래. 그 망할 호각 없이 이렇게 당신을 찾아냈잖아.”

케이든을 끌어안은 아사드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절대 못 놔줘.”

아사드는 중얼거렸다. 케이든에게 건네는 경고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전하는 다짐에 가까운 것이었다.

케이든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사드의 심장께에 들러붙은 초조가 그에게도 전해진 탓이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아사드가 숨기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내보이는 불안이, 당혹스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아사드가 왜 저러는 걸까.

도통 똑바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아사드의 숨이 차분해질 때까지, 그리고 자신의 머릿속이 차분해질 때까지, 케이든은 제 두 손으로 계속해 아사드를 도닥였다.

케이든이 다시 입을 연 건,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도망 그런 건…… 생각도 안 해 봤습니다.”

침묵하는 아사드에게 케이든은 조심히 말을 건넸다. 느릿하게나마 변명을 이어 갔다.

“아직 사냥이 끝나지 않았을까 봐, 그래서 호각을 불 수 없었습니다. 전하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저보단, 야영지에 남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습니다. 괜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아미나 님이 오시기만 기다렸어요. 너무 늦게 꺼내 들긴 했지만…… 호각을 불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제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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