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비님! 저기, 저기에 큰 나무가 있어요……!”
다행히, 센이 케이든에게 희소식을 전해 줬다.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이었다.
케이든은 제 허술한 승마 실력을 눈감아 준 똑똑한 말에게 제발 걸음을 멈춰 달라 구걸을 했다. 그 뒤에야, 간신히 자리에 멈춰 설 수 있었다.
케이든은 센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멀지 않은 곳에서 미약하게나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지막한 모래 언덕 너머에서였다.
키가 작은 나무를 반쯤 가린 얕은 모래 언덕 밑에 불을 피워 둔 이가 어떤 사람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위로 올라오는 연기에 힘이 부족한 걸 보아, 아예 사람이 없을 수도 있었다.
“여럿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응. 연기가 너무 약하네.”
“그럼…… 누가 있을까요? 유목민? 사냥꾼? 장사꾼? 아니면, 뭣 모르는 여행객일까요?”
“아무도 없길 바라자.”
어쩌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도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뒤로하고, 케이든은 센에게 답했다.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가야 했다. 케이든은 고삐를 잡은 손에 다시 힘을 줬다.
희미한 연기를 따라 언덕 너머에 도착한 케이든과 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기 동안 벼락이라도 맞았는지 반절가량이 까맣게 변해 버린 나무 옆엔 사람이 머물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을 만든 이는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인 듯 보였다.
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장작더미 속에 하급 마법석이 처박힌 게 보였다. 그것에서 피어난 불티만이, 이 자리에 남아 스스로를 태우고 있었다.
다행이다. 속으로 생각한 케이든이 조심히 말에서 내렸다. 그는 꼬부라진 고목의 기둥에 말을 묶었다.
“태워 줘서 고마워.”
새침한 눈을 한 흰 말에게 케이든은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곧장, 안장 위에 앉아 있던 센을 안아 들었다. 이제 17살쯤 됐을까 싶은 센의 체격은 리헤트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아이를 안아 들고 움직이는 게 조금도 어렵지 않았다.
케이든은 앓는 소리를 내는 센을 미약하게나마 열을 내는 불가에 조심히 앉혀 줬다. 케이든이 제 외투를 벗어 센의 어깨에 둘러 주자, 앓는 소리가 더 커졌다.
“다리가 많이 아파?”
“아, 아닙니다. 그저, 너무 황송해서……. 아니, 저는 이미 야영지에서 죽고 이렇게 마지막 꿈을 꾸고 있는 걸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센은 말을 얼버무렸다.
식은땀을 흘리는 센이 케이든은 걱정됐다. 열에 정신마저 흐려진 듯 보이기까지 했다. 다친 다리의 고통이 몸 전체로 퍼진 게 아닌가 염려스러웠다.
케이든은 센이 꽉 쥐고 있던 주머니를 슬쩍 뺏어 들었다. 아미나가 설명해 준 대로, 간이 야영지를 만들었던 이가 쌓아 둔 마른 나뭇가지 위에 돌을 던져 불을 피우기 위함이었다.
“화, 황태자비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냐. 넌 쉬고 있어.”
“안 됩니다!”
당황한 센이 다시 외쳤으나, 케이든은 적당히 웃는 것으로 센의 말을 넘겼다.
타고 남은 장작 위에 돌 몇 개만 던지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센을 뒤로하고, 케이든은 주머니에서 작은 돌들을 끄집어내 장작 위에 던졌다.
정말 불이 붙을까, 의심했던 것도 잠시였다. 붉은 불덩어리가 순식간에 꽃처럼 피어났다.
감탄을 닮은 침묵이 찾아들었다. 불을 지핀 케이든도, 접질린 발목의 통증을 참고 있던 센도, 마치 춤을 추듯 유려하게 움직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봤다.
하나 내도록 감탄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케이든은 몸을 일으켜 자리를 옮겼다.
낮은 모래 언덕 뒤편, 또 다른 나무가 시야를 가리지 않는 곳으로 케이든은 걸음을 옮겼다. 모래에 발이 잠기지 않는 땅을 골라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돌을 던졌다.
빛이 찾아드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오색찬란한 색깔이 터져 나왔다. 온갖 색이 은은하게 뒤엉킨 빛이 사방을 밝혔다.
이제, 아미나를 기다려야 했다. 남은 일은 그것뿐이었다.
센 몰래 한숨을 쉰 케이든이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다시 뒤를 돌아 센에게 향했다.
케이든은 온기를 품은 불덩어리를 사이에 두고 센과 마주 앉았다. 말을 몰아야 한다는 압박감과 낙마에 대한 걱정으로 잔뜩 굳었던 팔이며 어깨가 저렸다. 아니, 온몸이 저릿했다.
마주 앉은 케이든을 멍하니 바라보던 센이 불현듯 제 몸에 둘려 있던 외투를 벗었다. 케이든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줬던 옷이었다.
“황태자비님, 옷을 입으셔야 합니다. 사막의 밤은 추워요.”
“난 괜찮아. 외투가 없어도 될 정도로 옷을 여러 겹 입었어.”
“하지만…….”
“센, 나는 북부 사람이라 추위엔 강하고 더위엔 약해. 조금 움직였다고 더워서 땀 흘리는 거 보이지?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자신의 겉옷을 담요처럼 쓰라고 말하는 케이든의 얼굴이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 센은 괜한 말을 더하지 못했다. 그저 케이든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느끼며 그의 외투를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밤의 사막은 쓸쓸한 고요에 잠겼다. 마법석에서 피어난 불꽃이 장작을 까드득 먹어 치우는 소리만이 계속해 울려 퍼졌다.
“마물을 막겠다고 남으신 분, 그러니까, 아미나 님도…… 금방 오시겠죠?”
바람을 맞아 울렁이는 불을 보며 센은 물었다.
“그럴 거야.”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케이든은 답했다. 그렇게 강건한 눈을 가진 이가 마물에게 당하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미나 본인도, 뱀을 따라온 마물 따윈 검 한 자루만으로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분이 오길 기다리면서, 쉬고 있자.”
미소 지은 케이든이 센을 달랬다. 몸이 아픈 센이 겁먹지 않길 바라며 제 불안한 속내를 숨겼다. 한숨이 나오려는 걸 막았다.
“…….”
케이든의 손이 다시금 자그마한 호각 위에 닿았다.
아사드가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리라 약속했던 밤이 왔다. 그리고 지금, 저는 야영지의 아늑한 천막 안이 아닌 모래 위에 있었다. 아사드가 말한 혹시 모를 일이 생긴 탓이었다.
그래도 불안하기만 한 말의 안장 위가 아니라 따뜻한 불 앞에 앉게 됐다. 기약 없이 사막 한복판을 헤맬 때보다 상황이 좋아졌다. 마음 편히 호각을 불 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케이든은 차마 호각의 끝에 입을 댈 수 없었다. 그러지 못했다.
불지도 못할 호각을 매만지는 자신의 행동이 케이든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 한숨만 나왔다.
이 호각을 불면, 소리 없는 신호가 하늘에 닿을 것이다. 날개 달린 크고 작은 수색꾼들이 저를 찾아내 줄 거다.
하지만 그다음은? 장작 위에 올라탄 불덩이가 완전히 사그라들고, 모래 능선 위로 새로운 해가 뜬 뒤에도 아사드가 오지 않는다면? 어쩌면…… 아사드가, 사람들이, 이 모래 숲에서 제가 사라지는 것을 택한다면?
케이든은 자신이 아사드에게 거는 기대가 무서웠다. 두려웠다. 다시, 제 믿음이 짓밟힐까 봐 상황을 회피하게 됐다. 음침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반복해 머리통을 두드리는 걸 내버려 뒀다.
하지만 케이든은, 결국 제 생각을 고치는 편을 택하게 됐다. 계속해 어두워지려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았다. 아사드의 뜻을 곡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잠들지 말고 기다려 줘. 이제야, 다시 마주 볼 수 있게 됐잖아. 당신과…… 못다 한 말을 마저 하고 싶어.〉
당혹스러울 정도로 다정한 얼굴을 하고, 아사드는 제게 속삭였었다. 그저 저와 말을 나누길 원했었다.
케이든은 아사드를 믿기로 했다. 아사드가 제 목에 걸어 준 호각 안에 담긴 걱정이 가짜가 아닐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야영지에서 했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다시 만난 아사드에게 듣게 될 이야기가 어떤 것이건 괜찮았다. 그 대화가 저를 어떤 길로 이끌더라도, 여전히 상관없었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앞에 마주 앉아 그의 말을 들어 주고 싶었다. 그거면 됐다고 여겼다.
지금, 저는 센과 함께였다. 제게 올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저 애와 함께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버릇처럼 오른뺨을 매만지며 케이든은 생각했다.
“황태자비님께서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침묵하는 케이든의 낯을 살피던 센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저는 돌아가지 못할 거란 걱정은 안 해요. 황태자 전하께서 와 주실 거니까요. 저는 알아요.”
“……그래?”
센이 꺼낸 뜻밖의 이야기에 케이든은 당황했다. 기대감이 잔뜩 묻어나 있는 앳된 얼굴에 대고 무어라 답을 해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됐다.
“네, 전하께선 황태자비님을 정말 아끼시니까요.”
어딘가 신이 나 보이기까지 하는 센을 마주한 채로, 케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오늘 낮에도 전하께서 제가 모시는 어른께 오셔선, 황태자비님께 허튼소리 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고 경고를 하셨어요.”
“그게 무슨…….”
“이번엔 물이 아니라 모래에 네 면상을 처박고 숨통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눈만 마주쳐도 죄를 물을 거라고도 하셨습니다!”
“…….”
“전하께 그런 경고를 들으셨으면서, 멋대로 황태자비님의 손을 잡고 막, 난리를 치셨으니…… 정말 큰일 나셨네요. 비밀이 지켜질 리 없잖아요. 마탄 님이 황태자비님께 매달리시는 걸 본 게, 저 한 사람만이 아니니까요.”
센의 메마른 두 뺨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마탄에게 닥칠 큰일을 그려 보는 게 기쁜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