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82)화 (82/97)

“자, 이제 가야 합니다.”

아미나의 요청에 따라, 케이든은 급히 말 위에 올라탔다.

승마 역시 제 유일한 스승이었던 아문의 가르침 중 하나였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단검술 교육에 비하면, 꽤 오랜 시간을 진득하게 가르쳐 줬었다.

〈말들은 케이든 님을 좋아합니다. 케이든 님의 몸이, 말들이 바라는 것만큼 움직이질 못할 뿐이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렇게 한탄하긴 했지만 말이다.

케이든은 승마에 재능이 없었다. 황궁 내부에 세워진 포털을 이용해 강변으로 이동한 후 야영지에 발을 들이게 될 때까지. 내내 저와 함께 말을 타겠다는 불편한 선택을 한 아사드를 끝내 말리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긴장을 떨치기 위해 케이든은 숨을 골랐다.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누군가에게 쏘아붙여지는 거친 음성이 귀를 찔러서였다.

멀지 않은 곳에 시종 아이 하나가 넘어져 있었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곧장 일어나질 못하고 발목을 부여잡은 채 울먹이는 걸 보니, 다리를 접질린 게 아닌가 싶었다.

“너 때문에 말이 도망갔잖아!”

아사드의…… 육촌 형제 되는 이가, 그러니까 마탄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넘어진 시종 아이에게 삿대질하며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그의 시종이 혼자 넘어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마탄에게 밀쳐진 듯했다.

“…….”

망설이던 케이든은 고삐를 돌려 그들을 향해 갔다. 제 행동이 너무나 충동적이란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케이든은 자신의 초조함을 숨기며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래에 있는 여자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손 잡아. 말 위에 올려 줄게.”

별안간 제 앞에 말을 타고 나타난 미남자를 얼떨떨하게 올려다보던 시종 아이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가 저를 도우러 온 아무개 나라의 왕자님 같은 게 아니라 황태자비님이란 사실이 뒤늦게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금세 시종 아이의 앞으로 그의 주인이 끼어들었다. 남자는 시종에게 내밀어졌던 케이든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케이든이 손을 물릴 새도 없었다.

“황태자비님, 잘 오셨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절친한 벗, 오늘에야 이리 황태자비님과 독대하게 되었습니다.”

“…….”

“일단은 저를, 저를 도와주십시오!”

절친한 벗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저 남자를 사람 취급도 하질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사드의 눈만 봐도 그게 느껴질 텐데……. 이 남자는 저보다도 눈치가 없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단단히 붙잡힌 제 손과 남자의 뒤로 보이는 여자애를 보며, 케이든은 두려움이 퍼지려 하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무심한 기색을 가장하려고 노력했다.

얼굴에서 표정을 지운 케이든이 남자를 내려다봤다. 사실, 무심해 보이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멍청하고 만만해 보이지만 않길 바랐다.

케이든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속으로 숨을 마시고 내쉬었다. 그리고 그는, 아사드의 흉내를 냈다.

“내 손을 잡아야 할 이는 공이 아니라 저 시종 아이입니다. 다리를 다쳐 이동이 쉽지 않을 이를 도우려 하는 것이니, 두 다리가 멀쩡한 공께서 양보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어두운 낮과 환한 밤에 필요한 건, 그 무엇보다 연민이다. 그 누구보다 약한 자들을 먼저 도와야 한다. 타라 신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더군요. 전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

“제가 틀린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전하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쩌면, 아사드가 아니라 아문의 흉내를 낸 걸지도 몰랐다.

덜덜 떨리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케이든은 마탄의 손을 쳐 냈다. 무어라 말을 더듬는 남자를 밀어 내고 다시 시종 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간이 없어. 나와 함께 가자.”

“여, 영광입니다. 황태자비님.”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던 시종이 다급히 케이든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케이든의 도움을 받아 곧장 말 위에 올랐다.

제 앞에 앉은 이를 팔 사이에 가둔 케이든이 지척에서 저를 기다려 준 아미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케이든은 자신을 앞에 태우고 말달리던 아사드를 떠올리며 다시 고삐를 쥐었다. 긴장감으로 마음이 울렁였다.

“전하께선, 제게 황태자비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라 당부하셨습니다. 전하께 미움을 사는 것이 저 뱀 마물과 단둘이 싸우는 것보다 두려우니, 이제는 정말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제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아뇨, 정말 잘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옆에 계셨다면, 함박웃음을 지으셨을 겁니다.”

뒤이어 목소리를 낮춘 아미나가 말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케이든이 아니라 시종 아이를 향해 건넨 말이었다.

“너는 운 좋은 줄 알아. 황태자비님 덕에 뱀에게 먹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고.”

“예, 예.”

긴장한 시종 아이에게 픽 웃어 준 아미나가 곧장 말달리기 시작했다. 케이든이 그런 아미나의 뒤를 다급히 따랐다. 황당하다는 얼굴을 한 채 멍청히 서 있는 마탄을 돌아볼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전투가 길어지기야 하겠지만, 걱정하실 만한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많은 전사며 마법사들이 저 뱀 하나 해치우지 못하면 나가 죽어야죠.”

“다행입니다…….”

“훈련을 게을리하신 몇몇 높으신 분들껜 특별한 일이 생기겠지만요. 뱀의 꼬리나 몸뚱이와 부딪치거나, 날아온 잔해에 맞아 뼈가 부러질 확률이 가장 높을 듯싶습니다. 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게 될지도 모르고요.”

“……이런 사고가, 전하께 해가 될 수도 있을까요?”

“설마요. 전하의 경고를 무시한 건 그분들입니다. 본인들이 자처해서 토벌대에 합류한 것이니, 억울해하지도 못할 겁니다.”

속도를 조금 늦춰 케이든의 옆에 붙으며 아미나는 말을 이었다.

“뱀을 쫓아내거나 죽이는 데 성공하면, 북소리를 내 끝을 알려 올 겁니다. 마물들은 듣지 못할 소리라고 하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 잠시 고개를 올려 하늘의 색을 확인한 아미나가 앓는 소리를 냈다.

“사막의 밤은 아주 차갑습니다. 밤을 버틸 자리를, 불을 피울 곳을 찾아봐야겠어요.”

케이든은 아미나를 따라 주위를 둘러보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똑바로 모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앞에 탄 시종 아이 역시 제 승마 솜씨가 부족함을 눈치챘는지 바짝 긴장해 버린 상태였다.

“이런.”

쓸 만한 자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던 아미나가 말을 멈춰 세웠다. 잠시 뒤를 돌아본 직후였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케이든 역시 아미나를 따라 눈치껏 고삐를 잡았다.

“작은 마물들이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뱀의 등을 타고 온 놈들인 듯하군요. 고작 서넛 정도이니,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먼저 가세요.”

“하지만…….”

“저런 것들은 검 한 자루만 가지고도 없앨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아미나가 케이든의 앞에 앉은 시종 아이를 향해 작은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받아 든 시종 아이는 안에 든 것이 뭔지 아는 눈치였다. 그러나 한 번 더 확인이 필요하다는 듯 아미나에게 빤한 시선을 줬다.

“돌들이다. 작은 것은 장작 위에 던지면 불이 될 것들이야. 큰 것은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면 모래 위에 던져. 불꽃을 닮은 빛이 터질 테지. 내가 그 빛을 따라갈 거야.”

“알, 알겠습니다.”

“너를 살린 분이야. 황태자비님을 성심껏 보필하도록.”

잘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키운 아미나가 한번 더 같은 말을 빠르게 반복했다. 시종 아이에게 모든 걸 전한 아미나는 고개를 올려 케이든과 눈을 맞췄다.

“앞을 향해 적당한 속도로 달리시면 됩니다. 장작으로 쓸 수 있을 마른 나무를, 불을 지켜 줄 나지막한 모래 언덕이나 오아시스를, 토벌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사냥꾼들과 상인들이 만들어 둔 야영지를 찾으세요. 모인 사람의 수가 적을수록 좋으니 이미 사람이 떠난 곳이 더 낫습니다. 그런 곳에서 절 기다리시면 됩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고 믿어요.”

“그럼. 저는 일을 마친 뒤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아미나가 활대를 몸 앞으로 돌렸다. 그러곤 허리춤에 매달았던 검 하나를 빼내 들더니 곧장 길을 되돌아갔다.

케이든 역시 아미나가 말한 대로 다시 앞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노을 진 사막의 붉은 하늘이 완전한 어둠 속에 잠기지 않길 바라면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케이든은 자신의 이름을 센이라 말해 준 시종 아이와 함께 허허벌판을 달리고 있었다. 불안함을 숨기며 말을 몰았다. 긴장해 시야가 좁아진 케이든을 대신해 센이 부지런히 주위를 둘러봐 줬다.

야영지에 남은 이들은 어찌 됐을까. 저와 센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은 아미나는 마물을 물리쳤을까? 홀로 답을 낼 수 없는 물음들이 케이든의 머릿속에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아사드는…… 무사히 사냥을 마쳤을까.’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제 목에 걸린 줄을, 그것이 붙들고 있는 자그마한 호각을 매만졌다. 하지만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 금세 손을 떼어 냈다. 괜한 생각을 한다며 꾸짖기라도 하려는 듯, 그 안에 모래를 품은 바람이 뺨을 치고 달아났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마물 토벌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사냥이 어찌 되어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끝마쳐야 할 신성한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이 끝난 지 오래라고 한들 달라질 것도 없었다. 아사드가 가장 먼저 도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니 말이다. 아사드는 이 사막의 황태자였다. 그는 야영지에 남은 이들에게 가야 했다. 전투가 길어질 거라고, 아미나가 말하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하늘이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내 열기를 잃지 않을 것만 같던 사막이, 밤의 어둠을 받아들이면서 공기 역시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사막 한복판에 주저앉아 아사드가 오기만을 기다릴 순 없었다. 아미나의 조언에 따라 편히 불을 피울 곳부터 찾아야 했다.

저 한 사람만 말에 올라타 있었다면, 나아가질 않고 가만히 서서 누군가 절 도와주기만을 바랐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는 센과 함께였다. 다리를 다친 데다 외투도 없이 얇은 옷만 입은 시종 아이에겐 온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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