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궁으로, 서관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침실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적막을 마주하기 싫었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끌어 보고 싶었다.
결국, 케이든은 나무가 만든 그늘 밑에 쪼그려 앉는 걸 택하고 말았다. 꺼슬꺼슬한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스스로가 너무 우습게 느껴져 그랬다.
이제 케이든은 아문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사드의 방문을 바랄 필요도 없어졌다. 손님을 맞이할 일에 마음이 들떠 너른 침실 안을 서성일 일도 더는 없었다. 그러지 못하게 됐다.
우기의 마지막 날 내내, 케이든은 자신의 침실 한편에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또 하면서였다.
비가 그친 후에는 침실을 나섰다. 제게 주어진 너무나 크고 아름다운 방에 적응하지 못하고 발코니로 도피했을 때처럼, 오후의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빛의 정원으로 도망쳐 버렸다.
빛의 정원은, 케이든이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을 괴로운 진실을 알고 있었다. 별궁 가운데에 몸을 수그리고 있는 이 정원만이 제 유일한 이해자처럼 느껴졌다. 케이든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곤 했다.
“…….”
왼쪽 손목에 매달려 있는 팔찌들을, 약지를 지키는 테가 얇은 반지를, 케이든은 매만졌다. 마음이 불안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들을 만지게 됐다. 아주 오랜 버릇으로 남을 것만 같았다. 언젠간, 이것들 역시 침실 한편에 두고 떠나게 되겠지만.
〈전하께선, 여전히 몸이 안 좋으세요.〉
아사드가 아주 지독한 감기에 걸려 버렸다고, 리헤트는 케이든에게 알려 줬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잔병치레해 본 적 없는 건강한 황태자 전하께서 어쩌다 침대 신세를 지시게 된 건지 모두들 의아해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였다. 치료 마법사들이 힘을 냈으니 금세 몸이 나으실 거라고, 걱정하지 마시라 케이든을 향해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
케이든은 아사드가 걱정됐다.
아사드는 제 걱정 같은 걸 바라지 않을 텐데. 걱정이 돼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하나 아사드를 찾아갈 수는 없었다. 감기 열이 옮을지도 모르니 황태자비를 동관 근처에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내려졌다고 했다. 아사드가 직접 내린 지시였다. 먼발치에서나마 그의 얼굴을 잠시 확인하고 돌아오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됐다.
‘나한텐…… 건강 신경 쓰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 놓고.’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나을 텐데. 줄이 겹쳐진 팔찌를 만지작대며 케이든은 생각했다.
케이든의 사랑은 비를 맞아 허물어지지도, 사그라지지도 않았다. 그저, 무른 진흙을 파이게 만든 장대비를 품에 안고 미지근한 온도로 고여 있는 웅덩이와 다를 바가 없는 상태였다.
나를 원치 않는 사람을 여전히 사랑하다니.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케이든은 아사드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아사드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이런 게, 당신의 흠이 될 순 없어.〉
아사드는…… 보기 싫을 제 흉터를 흠이 아니라고 말해 줬다.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제국어를 가르쳐 줬고, 저는 알지 못하는 세상을 매일같이 속삭여 줬다. 오직 저를 위해, 새하얀 눈을 내려 줬다. 갑자기 사라졌던 저를 찾아내 줬다. 제게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선물을 안겨 줬다. 보기 싫을 눈물을 다정히 닦아 줬다.
아사드는 희락기를 맞은 알파도 오메가에게 다정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줬다.
〈당신 페로몬이 느껴져. 좋은 향기가 나.〉
사람들이 싫어한 허름한 페로몬을…… 진심으로 좋아해 줬다. 적어도 아사드 앞에선, 제 페로몬을 창피해하지 않을 수 있게 해 줬다.
아사드는 제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줬다. 제가 북부에 갈 수 있게 해 줬고, 엠마의 결혼식에 함께해 줬다. 꿈같은 이야기를 속삭여 줬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그는 저를 위해 싸워 줬다.
그리고 아사드는…… 제게 죄가 없다고 말해 줬다. 저는 잘못한 게 없다고 말했다.
〈케이든. 내가 당신을 지켜 줄 거야.〉
〈감히, 그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당신을 지켜 주겠다고, 아사드는 약속했다. 제가 아프지 않길 바랐다.
그런 이를, 어찌 원망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케이든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아사드가 제게 보여 주고 베풀어 준 모든 것들이, 그저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한 연기였다고 해도 괜찮았다. 뒷골목의 거지에게 던지는 동전 한 닢과 다름없는 적선이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제가 아문과 그리고 아사드와 함께 있을 때 느낀 행복만은 진짜였으니까. 그러니 괜찮았다.
비는 그쳤다. 붕 떴던 마음 역시 이전처럼 가라앉았다. 잠시 저를 찾아왔던 원망이나 배신감 따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생각이었다.
〈남은 평생…… 당신은 내 곁에 있어야 해. 내 눈이 닿을 곳에, 내 손이 닿을 곳에 있어. 그래야 해.〉
하지만 아사드의 정부 같은 게 되고 싶진 않았다. 이 너른 황궁 구석에, 농장의 와인 창고 옆에 난 작은 방처럼 어두운 곳에 숨기 싫었다. 아사드와 몸을 섞을 때나 간신히 그의 얼굴을 훔쳐보는 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몸이 약할지 모를 아사드의 신부를 대신해 아이를 낳고, 아이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척 그 애를 돌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사드가 왕국 귀족들의 도덕심 없고 문란한 생활을 경멸하는 걸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정원에 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사드와 마트의 이야기를 엿듣지 못했다면, 계속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지냈다면…… 어땠을까.
큰 착각 속에 빠진 채로 시간을 흘려보내다, 아사드의 웃는 얼굴을 마음에 품고 헬리오를 떠났을지도 몰랐다. 당신과는 협상 같은 거 하지 않겠다는 아사드의 말이 진실이라면, 또 그가 결국 제 몸에도 질리게 됐다면 말이다.
기억할 가치도 없는 허튼 망상이었다.
스스로를 비웃으며, 케이든은 제 팔찌를 다시 한번 손끝으로 쓸어 봤다. 아문에게서 그리고 아사드에게서 받은 팔찌 두 개의 줄이 또 한 번 겹쳤다. 보석들이 부딪쳐 잘그락 소리를 냈다. 케이든의 불안을 닮은 소리였다.
정말, 모든 게…… 꾸며 낸 거짓이었을까.
〈하지만 케이든, 난, 이젠 그딴 생각 안 해. 아문으로 변하는 짓도 그만두려고 했어. 이 우기가 끝나기 전에, 내가 숨겼던 모든 걸 당신한테 솔직하게 내보이려고 했어.〉
케이든은 아사드가 토해 낸 부정을 다시금 되뇌어 봤다. 어제 침대 위에 앉아 그랬던 것처럼, 아사드의 말 속에서 손톱만 한 진심이라도 발견하길 바라며 지난 시간을 헤집었다. 미련이었다.
‘신은, 왜 하필 나를 아사드의 옆으로 데려온 걸까.’
신이 축복한 운명 위에 함께 선 아사드조차, 저 같은 건 끝내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
「……그럴지도 모르지.」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뾰족한 초록 잎 사이로 빛이 반짝였다. 그 빛을, 케이든은 말없이 바라봤다. 시간이 빨리 가면 좋겠다. 헬리오에 오게 된 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케이든은 아사드를 믿고 싶었다. 다만, 아직 그를 믿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8. 사막에 부는 바람
우기가 끝난 헬리오에는 새로운 여름이 찾아왔다. 태양은 열흘간 이어진 우기가 남겨 둔 습기를 게걸스레 먹어 치웠다. 한낮의 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 새로운 여름에 뒤따라오는 연례행사가 바로, 마물 토벌이었다.
일을 마친 신이 먹구름을 거둬 사막을 떠나면, 헬리오의 황족들은 명예로운 전사들 그리고 사냥꾼들과 함께 이아로강을 넘어 열사의 땅으로 향했다. 마물 토벌 기간이 시작됐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였다.
사막을 휘젓고 다니는 마물들은 그 모습도 위험도도 각기 달랐다. 하나 모두 저마다의 쓸모가 있는 훌륭한 자원이었다. 속된 말로 돈이 됐다. 그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지만 말이다.
사막의 전사들과 마물 사냥꾼들은 이지를 잃은 마물들을 잡는 일로 돈과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마물을 사냥하는 일이 아무 때나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악에 물들기는 하였으나 그들 역시 존중해야 할 생명이라고 여기는 신의 말을 받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냥꾼들은 그들이 나설 만한 명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모래 위를 떠도는 유랑민들에게 해를 입힌 마물들을, 도시와 마을을 습격한 마물들을, 어쩔 수 없이 사막을 횡단해야 하는 상단을 곤란에 빠트리는 마물들을 찾아다녔다. 황실의 현상금이 걸린 마물만을 쫓는 이들도 있었다.
하나 모두 우기 이전의 이야기였다. 우기가 끝나고 새로운 여름이 오면, 상황이 달라졌다.
새로운 여름은 저 깊은 모래 아래에서 새로이 태어나고 힘을 얻게 된 마물들이 위를 바라보는 시기였다. 세상이 마물로 들끓게 되면, 신의 말도 절로 그 힘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마물을 토벌해야만 하는 때가 오는 거다. 살기 위해서였다.
마물 토벌 기간의 시작을 알리는 건, 대개 황제의 관을 이어받게 될 후계자였다.
나이 15세를 넘긴 후계자가 새로운 여름의 첫 마물 사냥을 마치면, 그의 뒤를 따르던 전사들이 긴 나팔을 불어 세상에 마물 토벌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짧고도 긴 사냥철의 도래였다.
이번 사냥의 주인공은 황태자 아사드 메케리우스였다. 당연하게도, 황태자의 반려가 그와 함께했다. 황태자비와 황태녀비의 존재가 마물에게서 후계자를 지켜 줄 것이란 오랜 미신 덕분이었다.
이동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다. 신관들과 제사장이 토벌 기간이 왔음을 신에게 알리는 제사를 지낸 후였다. 사냥꾼들이 안전을 보장한 자리 위에 제법 큰 규모로 세워 둔 야영지가, 토벌대의 첫 목적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