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달라지는 점은 아무것도 없을 거다. 하지만…….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걸까.’
적어도, 남은 2년 동안은 아사드를 좋아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까? 케이든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그런 음흉한 기분을 느끼고 만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어 그랬다.
“내 몸. 내 마음. 모두 순결해. 심지어, 내가 내 입으로 나의 순수를 읊어 주기까지 했잖아. 설마, 그 말도 믿지 않았던 거야?”
“아뇨. 그, 그건 믿었습니다.”
“그럼 더 문제지. 몸과 머리가 따로 노는 변태로 본 거잖아. 나를, 왕국 놈들처럼 봤어.”
아사드는 흥분해 말했다. 속내를 들킨 케이든이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는 귀가 빨갛게 변했다.
“……두 분이 혼인을 준비하셨었다는 걸 알고, 그런 오해를 했습니다.”
“…….”
“이젠, 절대, 그런 오해 안 할게요. 저는 전하를 믿습니다.”
케이든은 황급히 이야기했다.
누가 봐도 삐친 얼굴을 한 아사드가 케이든을 쏘아봤다. 기가 죽은 케이든은 눈치껏 말을 줄였다.
주인 없는 방 안이 적막했다. 저택의 이곳저곳을 두드려 대는 빗소리가, 친밀한 방문객의 노크 소리처럼 들렸다.
“희락기 억제제를…….”
“…….”
“내가…… 내 연인에게서 아이를 보려고, 당신 입에 억제제를 욱여넣고 있다고 생각했어?”
불현듯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묘한 물음을 건넸다.
차마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두고 케이든은 입을 다물었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까.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사드의 과격한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사드는 그저, 황실의 법도를 따랐을 뿐이니까.
왜, 하필 제게 3년이란 시간이 주어졌을까. 케이든은 한참이나 그런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다 아사드의 희락기에 시종장이 전해 준 말을 듣고는 ‘아, 억제제를 먹어야만 하는 시간이 3년이라 그랬구나.’ 하고, 궁금증이 해소됐다.
케이든은 이제, 자신이 아사드가 새로운 신부에게 가는 길 위에 놓인 징검다리라고 생각하게 됐다. 제가 할 일은 그저, 아사드가 신탁에 묶인 3년이라는 시간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돕는 거였다.
아사드의 발목을 잡는 건, 제 일이 아니었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인생에 걸림돌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게, 케이든이 희락기 억제제니 피임약 같은 걸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군말 없이 목 뒤로 넘기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혼인식을 기점으로 3년이 지날 때까지, 황태자비는 그 형질이 알파건 오메가건 매일 희락기 억제제를 복용해야 한다고 시종장님께서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케이든은 시종장 사반이 그에게 알려 줬던 법도를 그대로 입에 담았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듯 웃으며 아사드를 달랬다.
“……건강에 안 좋아.”
“3년 정도는 괜찮습니다.”
“당신에겐 3년이 3주처럼 느껴지나 봐?”
“…….”
“다른 방법을 찾아낼 거야. 방법을 찾으면, 사반도 당신에게 억지로 약을 먹이지 않겠다고 했어.”
눈을 가늘게 뜬 아사드가 가깝게 몸을 붙여 왔다. 순식간에 좁아진 거리가 부담스러워 케이든은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지금. 당신한테 입 맞출 거야.”
하지만 이런 소리를 듣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입 맞추겠다는 말을 저렇게 경고하듯이……. 케이든은 민망했다.
“당신이 먼저 입 맞추는 것도 좋아.”
“…….”
“나를 오해한 게 미안하다면.”
모른 척, 케이든은 자신의 손을 향해 아래로 시선을 옮겼다. 맞닿은 채 가볍게 포개져만 있었던 왼손도, 진작 붙들려 있던 오른손도, 어느덧 모두 아사드의 두 손과 단단히 얽히고 말았다. 이래선 제 손 뒤로 아사드의 눈을 숨길 수도 없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망설이던 케이든은 고개를 들었다. 아사드의 눈을 마주하는 대신, 그의 입술만을 바라봤다.
케이든은 떨리는 속내를 숨기려 노력했다. 바보 같아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아사드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댔다. 그저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게 다인, 짧은 입맞춤이었다.
“당신…… 입 맞추는 방법을 까먹은 건 아니지?”
내 선생님 노릇을 해 주던 사람은 어디 간 건지. 아사드가 중얼거린 말이 케이든을 더욱 민망하게 했다.
“다시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
“그런데.”
“……네.”
“나. 정말, 다른 사람이랑 교제해 본 적 없어.”
무게를 잡던 아사드가 재차 뜬금없는 말을 꺼내 놨다. 이미 끝을 맺은 줄 알았던 화제를 붙잡고 다시 끌어 올렸다.
“누굴 좋아해 본 적도 없어. 사랑? 그건 더 말이 안 되지.”
속이 탄다는 얼굴을 하고 아사드는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러니 오해하지 마.”
“…….”
“지금, 이렇게 내 옆에 있을 권리를 가진 사람은…… 당신뿐이야. 당신도 그걸 아는 줄 알았어.”
아사드의 두 뺨이 그의 귀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름다운 남자의 뺨에 퍼진 생기를 케이든은 넋을 놓고 바라봤다.
“…….”
아사드의 얼굴을 붉어지게 한 건, 아까와 같은 당혹감과 분노 따위가 아니었다. 아사드와 눈이 마주친 순간. 케이든은 혼란을 느꼈다.
케이든은 저런 얼굴을, 저런 분위기와 색을 알았다.
문득, 옛 기억 하나를 떠올리게 됐다. 입을 꾹 다문 채로 쌓인 기억 사이를 뒤적였다.
〈봐. 내가 쟤네 금방 사귈 거라고 했지? 저 미묘한 표정, 분위기 그리고 색깔. 그것만 봐도 안다니까.〉
별안간 가깝게 붙어 다니기 시작한 두 일꾼을 가리키며 엠마는 말했었다. 도통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케이든을 위해 몇 달을 반복해 재차 설명해 주기까지 했었다. 그녀가 입에 담았던 표정과 분위기, 색깔에 관해서 말이다. 마주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 농장 안에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젊은 일꾼들이 엠마의 교본이 되어 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든은 엠마의 이야기를 반절도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하나 남은 반절가량은 간신히 이해했다. 이해했다기보단 그대로 외운 거였다.
지금, 아사드는…….
아사드는 엠마에게 놀림을 당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체화하지 못한 엠마의 가르침을 불현듯 떠올리게 할 정도로 오묘한 낯을 하고, 다른 사람이 아닌 저를 보고 있었다.
“…….”
케이든의 입이 다물렸다. 케이든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우려 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다. 망상이 지나쳤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를 들으며 케이든은 눈을 깜빡였다. 조금 길게 눈을 감아 보기도 했다. 하나 아사드의 얼굴을 눈꺼풀 뒤로 숨겨 봤자였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래도, 제가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픈 웃음과 함께 케이든은 시선을 떨어트렸다. 간신히 위를 향해 끌어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망상은 독이었다. 그런데도 그 망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독을 마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아사드가 헤카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밖엔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 하나가, 케이든을 멈춰 서지 못하게 했다.
‘아사드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아는데도, 나를 계속 사람으로 봐 주니까.’
지금도, 내가 먼저 입 맞춰 주길 바라잖아. 거짓말처럼 다정히 바라봐 주고 손을 잡아 주는걸. 내가 오해하는 게 싫어서, 내가 그를 나쁘게 보는 게 싫어서, 저렇게 필사적으로 연인이 없다고 말하잖아.
그래서…….
음습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제 망상의 책임을 아사드에게 돌리려 드는 스스로를 케이든은 비웃으려 했다. 하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다.
케이든은 초조함을 느꼈다. 오래된 불안을 삼키게 된 사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묻고 싶었다. 난도질당했던 낡은 물음의 조각을 끌어모아, 아사드에게 건네 보고 싶었다.
아사드라면…… 나를 비웃지 않을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헛된 기대가 자꾸만 주위를 맴돌았다.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었다.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케이든은 숨을 죽였다. 자신의 얼굴 역시 엠마가 말했던 색으로 물들어 있을 거란 사실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케이든은 아무런 물음도 건네지 못했다. 비어 있던 손님방의 문이 고용인의 손에 열리고, 아쉽다는 듯 혀를 찬 아사드가 다시 저를 이끌고 연회장으로 걸음을 돌릴 때까지…… 케이든은 침묵했다.
아사드를 마음대로 오해하고 그에게 사랑을 구걸하게 될까 봐, 케이든은 겁이 났다.
연회가 완전한 끝을 맺을 때까지. 케이든은 아사드와 똑바로 눈을 맞출 수 없었다. 차마 그럴 수 없었다.
* * *
여전한 우기의 밤에, 아사드는 케이든의 침실을 찾았다. 아니, 뒷골목 무뢰배처럼 씩씩대며 제 신부의 침실에 쳐들어갔다고 해도 무방했다.
케이든과 혼인식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처럼 아사드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황태자비의 침실에 들어선 뒤엔 곧장 문을 걸어 잠갔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문가를 향해 반쯤 돌아앉아 있는 케이든에게로, 아사드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케이든의 앞에 당도했다.
아사드는 비가 내리는 바깥의 풍경을 등지고 섰다. 무뢰배 노릇을 그만둘 모양인지, 그 낯이 침실 문을 열 때보다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케이든.”
어딘가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아사드는 제 신부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