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67)화 (67/97)

케이든은 알지 못할 생각 속에 푹 잠긴 채로, 아문은 말을 잃어버렸다.

라몬은 아문이 케이든을 감시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든이 억제제를 복용하지 않을까, 피임약을 챙겨 먹지 않을까 눈에 불을 켜고 통제한다고 여겼다. 라몬만이 아니었다. 별궁에서 일하는 모두가 그리 여겼다. 황태자가 가장 아끼는 심부름꾼인 아문이 모르는 일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됐으니까.

케이든은 아문이 저를 감시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줄도 생각지 못했다.

라몬과 말을 나누던 아문은 억제제니 뭐니 하는 이야기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듯 보였었다.

아문은 말을 잘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자신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에는 함부로 입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라몬에게도 대꾸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문 거다. 얼굴만 벌겋게 익어서 말이다.

케이든은 슬쩍 아문의 낯을 살폈다. 그는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아까 전보다는 눈에 빛이 돌아와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응?”

갑자기 눈을 마주쳐 온 아문에게 케이든은 되물었다. 놀란 탓이었다.

케이든은 급히 자세를 똑바로 다잡았다. 넋을 빼고 있던 아문이,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여서 그랬다.

“배우자가 있는 분이, 그것도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배우자를 두고 계신 분이, 매일 억제제를…… 희락기 억제제 같은 걸 먹어야 한다는 게 이상해요. 억제제만이 아니죠. 다른 것까지 함께…….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

“황태자 전하는 그런 거 안 드십니다.”

“그거야, 건강에 좋지 않으니까……. 당연히 그러셔야지.”

“당연하다고요?”

얼굴을 구긴 아사드가 케이든에게 물었다.

“그럼.”

케이든은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왜인지 흥분하기 시작한 아문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케이든 님의 건강은요?”

“…….”

“귀한 건 전하의 몸뿐입니까? 케이든 님의 몸은, 상하고 망가져도 됩니까?”

가라앉은 아문의 목소리가 침실 안을 울렸다. 그 낯만큼이나 차가운 음성이 빗소리에 조금도 파묻히지 않고 뚜렷했다.

“나는…… 괜찮아. 감기 한 번 제대로 걸려 본 적 없을 정도로 튼튼해. 정말이야. 그리고 형질에 문제가 생겨도 그냥…… 넘어갈 수 있어. 어차피 원래도 문제가 많았으니까. 이러다 희락기가 영영 오지 않게 되면 더 편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황태자님은 아니잖아. 건강한 형질이 망가지면 안 돼. 조심해야지.”

케이든은 아문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놨다. 화가 난 건지 슬퍼하는 건지 모를 오묘한 감정을 내비치는 아문을 달래 주고 싶었다.

억제제를 먹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또 익숙한 일이었다. 북부에서도 도련님이 건넨 히트사이클 억제제를, 약들을 거의 매일 챙겨 먹었으니까.

그런 별것 아닌 일에 아문이 갑자기 마음을 쓰게 됐다는 게, 왜인지 불편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만 들었다.

“아문 너도 나중에 배우게 되겠지만, 알파의 희락기보다 오메가의 희락기가 오는 게 더 위험하대. 그래서 황태자님이 아니라 나한테 억제제가 더 필요한 거야.”

“뭐가 위험해요?”

“아이…… 아이가 더 잘 생겨서 그렇대.”

머뭇대던 케이든이 말했다. 제가 아문의 선생님도 아닌데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걸까 하는 고민에 멋쩍었다.

“아이…….”

아문은 그 짧은 단어를 입에 담아 봤다.

“황태자 전하께는 너무 안 어울리는 말이지? 어리시잖아.”

케이든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빨리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정식으로 혼인한 부부가 아이를 맞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닌가요? 왜 그걸 사람 건강까지 해치며 꾸역꾸역 막으려 드는 건지…….”

아문이 중얼거렸다. 생각에 잠겨 내뱉은 혼잣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말도 맞았다. 하지만 아문이 내놓은 이야기에 저와 아사드를 끼워 넣는다면 그건 틀린 말이 됐다. 끝을 정해 둔 채로 엮인 부부가 아이를 갖는 건…… 너무나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둘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마저 일방적이었다. 아이는 한 사람에겐 반짝이는 축복이, 다른 한 사람에겐 쿰쿰한 악몽이 될 것이다.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악몽을 안겨 주고 싶지 않았다.

케이든은 고개를 숙였다. 아이 이야기를 하게 되니 기분이 이상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서 숨이 막혔다. 사라져야 할 황태자비가 아이를 갖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게 좋은 일은 아닐 거다. 그 정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나를 닮지 않으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네? 그런 게 어딨습니까. 부모를 반씩 닮아야죠.”

아니, 날 닮지 않아야 조금이나마 사랑받을 수 있을 거야. 케이든은 생각했다. 하나 아문에게 제 비루한 속내를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케이든은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케이든은 그 누구에게도 사랑 한 번 받아 보지 못한 채로 어른이 됐다. 유년기의 외로움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얼마나 쓸쓸한 건지를 잘 알았다.

어차피, 의미 없는 상상일 뿐이었다.

아사드의 짝은 제가 아니었다. 홀로 남은 그는 다시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할 거다. 아사드의 아이는 반짝이는 사랑과 축복 속에서 세상에 모습을 내보이게 되겠지. 분명, 그를 닮아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이리라.

케이든은 완벽하게 세공될 아사드의 삶에 흠을 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흠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조심해야 했다. 매일 약을 챙겨 먹는 일 따윈 아무것도 아니었다.

“케이든 님.”

“응?”

“그 우중충하게 생긴 의사가 했던 얘기들…… 전하께선 모르실 겁니다.”

이어진 짧은 침묵 속에서 아문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은, 케이든 님의 몸이 상하는 걸 원치 않으실 거예요. 정말로요.”

아문의 눈썹이 억울하다는 듯 아래를 향했다. 곧장 한마디가 더 덧붙었다.

“제 말 믿으셔도 됩니다.”

원치 않으실 거다. 아문의 말은 확신이 아닌 추측이었다. 확실함을 좋아하는 그답지 않은 어투였다.

“응. 믿을게.”

그래도…… 케이든은 아문의 말을 믿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졌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케이든은 속삭이듯 말했다. 아사드의 진짜 마음이 아문의 바람과 그 결이 같기를. 케이든은 소원했다. 스스로를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런 케이든의 미소가, 아문을 안도하게 했다.

침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더욱 거세진 빗소리가 두 사람의 목소리를 훔쳐 달아난 탓이었다.

열흘짜리 우기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날이었다.

* * *

“도대체 이 밤에…… 무슨 일로…….”

시종장 사반은 자신의 침실에 쳐들어온 아사드를 앞에 두고 아연실색했다.

자정을 넘긴 어두운 심야였다. 황태자가 사고를 쳤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급히 침실을 뛰쳐나간 적은 있어도, 아사드 본인이 직접 사반의 거처를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대관절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이러나 싶어 사반은 겁이 났다.

……결국, 사람이라도 죽이셨나?

이미 하얗게 세어 버린 머리가 더 하얗게 변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사반은 아사드를 급히 자신의 침실에 들였다.

아사드는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황태자와 마주 선 사반은 공손한 자세를 유지하며 아사드가 입을 열기만 기다렸다. 아니, 기다리지도 않았다. 아사드가 곧장 말을 쏟아 냈으니 말이다.

사나운 얼굴을 한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사반이 전혀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영감이, 나한텐 억제제 같은 건 입에도 대선 안 된다고 성을 냈잖아.”

“예?”

“그런데 왜. 내 신부의 입엔. 그 입에도 대선 안 될 약을 매일매일 처넣는 거야?”

흥분한 아사드가 시종장을 향해 쏘아붙였다.

“몸을 섞고 싶어도 못 섞, 아니, 잠자리를 갖지도 않는데 피임약은 왜 먹이는 건데?”

“…….”

“사반. 나는 그걸 몰랐어. 내 반려가 희락기 억제제 같은 걸, 그딴 걸 꾸역꾸역 목구멍 뒤로 밀어 넣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고.”

“……전하, 헬리오의 후계자는 혼인식을 치른 후 3년여가 지나기 전에는 아이를 갖지 않습니다. 황실의 비밀스러운 법도이지요.”

얼빠진 낯을 한 아사드에게 사반은 황실의 오래된 법도를, 암묵적 규칙 하나를 알려 줬다.

반려 신탁이 끊긴 200여 년간 여러 문제가 일어났다. 가짜 신탁으로 엮이게 된 두 사람의 정략혼이니, 다양한 변수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정치적 문제와 외도 등, 그 내용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리하여, 황실은 후계자에게서 일찍 아이를 보는 걸 견제하게 됐다. 뒤로 물러서 배우자와 거리를 두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며 3년을 채워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헬리오의 후계자를 배우자로 맞이한 비께선, 그 형질과 관계없이 다들 억제제와 피임약을 드셔야 합니다. 전하의 첫 희락기 이전과 이후, 황태자비님께도 이 사실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런…….”

아사드의 말끝이 흐릿해졌다.

“왜 알리지 않았느냐 물으셨지요.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기에, 알리지 않은 겁니다.”

“…….”

“희락기와 색사가 끝난 이후의 일을 신경 써야 하는 건, 황제와 그 후계자의 몫이 아닙니다. 황태자비와 황태녀비의 그리고 황비 전하의 일이지요.”

무거운 적막이 아사드와 사반 사이에 내려앉았다. 나이 든 시종장의 눈에는 여전히 어려만 보이는 아사드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그와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수심이 드리웠다.

“하지만 케이든과 내 경우는 다르잖아…….”

“…….”

“그 사람은 등에 업은 가문이, 아니, 뒤를 봐줄 가족조차 없는 사람이잖아. 외척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없어. 자기 혼자 문제를 만들 사람도 아냐. 누군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되겠지.”

아사드는 사반에게 말을 늘어놨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느 순간 다시 뚝 끊기고 말았다.

찾아온 짧은 침묵 속에서, 아사드는 입을 달싹였다. 곧, 미약한 한숨 같은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나는…….”

“…….”

“황태자비의 일에, 케이든의 일에 바보처럼 굴기 싫어. 아무것도 모르고, 멍청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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