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65)화 (65/97)

참 나.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네.

다소 뚱해진 얼굴로 아사드는 케이든을 빤히 바라봤다. 케이든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우고 구겨져 앉은 상태였다. 입가엔 여전히, 어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아사드는 케이든을 향해 몸을 굽혔다. 안 그래도 가깝던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마치 입을 맞추기 직전처럼.

그 밀접한 거리감이 아사드에게 묘한 안도를 선사했다. 그러나 동시에 화가 끓어오르기도 했다. 케이든의 얼굴을 코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자니, 그의 상태가 더 처참하게 느껴져서 그랬다. 누가 봐도 얻어맞은 사람의 꼴이 아닌가.

기분 나빠.

자신의 기분이 왜 이렇게까지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건지도 모르고, 아사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알렉스 쿠퍼의 손가락이 아니라 손목을 날려 버려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랬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 버렸겠지만.

“자렌 저택 오찬에 참석 못 하게 된 거, 아쉽지 않아?”

“아뇨. 괜찮습니다.”

의연한 답변이었다.

케이든은 엠마의 초대에 응할 수 없어졌다. 눈치가 빠른 엠마에게 괜한 걱정을 안겨 주고 싶지 않다는 케이든의 선택이었다.

어제의 일로 분노한 쓰레기가 엠마에게 찾아가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봐 걱정되기도 했을 거다. 제가 엠마 부부의 저택에 사람을 붙여 뒀다는 이야길 전해 주자 눈에 띄게 안심했던 걸 보면 말이다.

걱정의 주인공인 알렉스 쿠퍼는, 정작 자기 손가락 찾기 바빠서 엠마의 근처에도 가지 못할 텐데.

하지만 그 사실은 케이든에게 비밀이었다. 케이든의 마음은 너무나 부드럽고 섬세했다. 잔인한 방법을 쓴 저를 꺼리게 될지도 몰랐다. 케이든이 그 쓰레기의 낯짝을 단 1분이라도 떠올리는 꼴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언젠가, 적당한 때에. 그 도련님의 부고 소식만을 케이든에게 알려 줘야지. 아사드는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 친구에게 편지와 꽃을 전해 줬어. 조금 아쉬워하긴 했는데, 꼭 답장을 보내겠대.”

오늘 오전, 아사드는 엠마에게 직접 찾아가 오찬에 불참할 수밖에 없는 케이든의 사정을 알렸다. 상단에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해가 뜨기도 전에 다른 지역으로 먼저 떠나게 됐다고 말했다. 당연히, 그 이야길 받아든 엠마의 눈썹은 아래로 축 늘어졌었다.

“감사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고생을…….”

“고작 편지 배달을 한 것뿐이야.”

아사드는 가볍게 대꾸했다. 하나 케이든은 아사드가 한 일이 고작 편지 배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안해 죽으려고 하는 얼굴로 아사드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전했다.

자기가 시킨 일도 아닌데 미안해하기는. 숙소의 일꾼 중 하나에게 부탁하면 될 일을 제가 직접 하겠다 나선 거였다. 어찌 됐건, 저 역시 엠마 부부의 오찬에 초대되지 않았었던가. 케이든의 사적인 일을 남한테 맡기기도 싫었고 말이다.

“아픈 선배를 위해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셈이지. 뭐, 당신의 하나뿐인…… 착한 후배가 된 도리로.”

아사드는 싱긋이 웃어 보였다.

선배니 후배니 하는 실없는 소리를 할 때마다 케이든이 민망해하는 걸 보는 게, 솔직히 즐거웠다. 후배 노릇을 하려 드는 제 앞에서 더 물렁물렁해지는 남자의 모습이 재밌기도 했고 말이다.

적어도 헬리오에선, 제 신부가 후배 같은 걸 만들 일이 없어 다행이었다. 기분 나쁘게 생긴 알파 나부랭이에게 선배 소리 들으며 쑥스러워하는 케이든을 보면 기분 더럽지 않겠는가. 알파만이 아니지, 베타와 오메가도 마찬가지였다. 후배는 없는 편이 나았다. 물론, 저는 케이든의 배우자니까 그의 하나뿐인 후배가 돼도 괜찮았다.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아사드는 케이든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무릎 위에서 꼼지락대고 있던 손이 별안간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케이든. 당신한테 약속할게.”

“…….”

“다시, 당신 친구를 만나러 오자. 아니, 굳이 북부에 발 들이지 않아도 괜찮겠지. 당신 친구가 헬리오에 오는 것도 좋을 거야. 어디서, 어떻게든…… 그 여자를 또 만나게 해 줄게.”

저를 빤히 보는 케이든과 눈을 맞추며 아사드는 말을 마쳤다.

아사드는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를 향한 케이든의 시선 탓이었다. 케이든은 말수가 적고 소심한 남자였다. 아사드 앞에선 더 소심하게 굴었다.

그런 이유로, 케이든은 대개 아사드와 똑바로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아사드를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다. 눈길이 닿는 자리에 괜스레 열이 오를 정도로 뚜렷한 시선을 줬다.

케이든의 시선을 마주한 채로 아사드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러다 결국, 고작 숫자 열을 세기도 전에 얄팍한 평정이 박살 났다.

긴장됐다. 사막의 모래를 가르고 기어 나온 마물들을 상대할 때도 차분하기만 하던 심장이, 미친 망아지 새끼처럼 쿵쿵대며 날뛰었다. 케이든이 제 몸속을 뜯어보지 못하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거칠게 움직였다.

케이든은 그와 마주 앉은 남자의 두 눈 속에서 답을 찾고 싶어 했다. 제가 내놓은 말이 그저 쉽게 지나가고 잊힐 말인지, 진심으로 내뱉은 약속인지가 헷갈리는 모양이었다.

속으로 말을 고르던 아사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쉽게 생각해.”

“…….”

“언젠가 꼭 이루어질 일을 말한 거야. 내 의중 같은 건, 약속이 지켜진 그날에 느껴도 늦지 않아. 고맙다 소리를 하는 것도 그때 가서 해.”

“저는, 믿습니다.”

“…….”

“다시 엠마를 보게 해 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믿어요. 의심한 적 없습니다.”

케이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사드의 두 눈에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말을 마친 케이든의 귀 끝이 이전보다 더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아사드의 뺨을 물들인 선홍빛 열기를 그대로 닮은 색이었다.

“……고맙다는 말은 내가 해야겠네.”

“네?”

“나를 믿어 줬잖아. 고마운 일이지.”

다시, 아사드는 웃었다. 쓸데없는 긴장으로 차갑게 굳어 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런 아사드를 따라 케이든 역시 엷은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참아 낸 뒤였다. 아닙니다, 그렇게 부정하려다 말았을 거다.

아사드 역시 억지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지금의 적막이, 마주한 가까운 거리감이 마음에 들었으니까.

침대 아래에 오그려 앉은 채로, 아사드와 케이든은 한참이나 서로를 들여다봤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 * *

두 주인의 부재로 잠시 썰렁해졌던 별궁이 다시 사람으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황태자 부부의 귀환과 함께였다. 도통 모습이 보이지 않던 아문 역시, 별궁에 얼굴을 내비치게 됐다.

황태자비가 있는 서관으로 떠날 채비를 마친 아문은 거울 앞에 섰다. 아니, 아사드는 거울 앞에 섰다.

아사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무감하게 바라봤다. 제 본래의 모습보다 체격이 작은, 하지만 조금씩 남자의 느낌이 나기 시작하는 소년 또한 거울 바깥의 아사드를 쏘아봤다. 거울의 안팎에 선 두 사람이 입은 흰옷이 그들의 갈색빛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아문.”

한 발짝 뒤로 물러선 남자의 낯이 떨떠름해졌다. 거울 속 아문의 표정 역시 그대로 떨떠름해졌다.

언제까지 아문의 모습으로 케이든의 앞에 서야 할까. 지난 몇 주를 아사드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었다.

아문은 그 쓸모를 잃은 지 오래였다. 케이든의 옆에 둘 이유가 사라진 거다.

이제 아사드는 유인책과 감시자가 필요 없어졌다. 케이든을 당장 제 옆에서 내쫓겠단 생각을 접게 됐으니 말이다. 그러니, 쓸모없는 유인책 겸 감시꾼을 빨리 치워 내야 했다.

제국어 선생 노릇 역시 의미가 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케이든의 제국어 실력은 어린애 수준을 벗어난 지 오래였다. 듣기뿐 아니라 말하기 역시 이전에 비하면 아주 좋아졌다. 이젠 아문이 아니라 제가, 틈틈이 공부를 봐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케이든은 그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지 않았다.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만 가르쳐 주면, 곧잘 배웠다.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그저 교육이란 걸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는 탓에 뭘 배운다는 일 자체를 어렵게 느낄 뿐이었다.

파스카. 그 쓸모없는 제국어 선생을 해고한 건 여러모로 잘한 일이었다. 혀를 자르지 못한 점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지만.

그리고 아문은…… 본체인 제 영향을 받아 베타인지 알파인지도 모를 잡종이 되어 버렸다. 큰 문제였다.

시종 하나가 리헤트의 입을 빌려 아문의 알파 발현에 관한 주의를 건넸을 때까지도, 아사드는 자신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 희락기 전조 증상이 아문의 모습에도 영향을 줄 거라곤 생각도 해 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대충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황태자비인 케이든이 알파 시종을 매일같이 만나는 건 옳지 않았다. 그가 시종 하나를 자신의 침실에 끌어들여 밀회를 즐기고 있다는 오욕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아사드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아사드는 아문의 행세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거울에 비치는 이 모습 역시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 버릴 생각이었다. 아문의 껍데기야, 가면 따위의 물건과 다름없으니 아주 잠깐의 고민도 하지 않고 파기할 수 있었다.

그 뒤엔 케이든에게 진실을 알릴 것이다.

거짓말이 거짓말인 걸 모르고 넘어가게 할 수도 있었다. 하나 모른 척 입을 씻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다면, 케이든의 남은 생엔 아문이라는 이름이 짙게 남을 테니까.

어느 날 갑자기 곁을 떠나 버린 말벗. 그것이 그리움이 담긴 애틋함이건, 의아함이건, 케이든은 꽤 오랫동안 그가 정을 주고 의지했던 시종 아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아사드는 케이든의 마음 한편에 아문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싫었다. 아문이라는 이름은, 케이든의 앞에서 불태워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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