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64)화 (64/97)

「위험한 걸 들고 있네.」

혀를 찬 남자가 알렉스의 손에 들린 날붙이를 가져갔다. 눈 깜빡할 사이에 칼을 빼앗긴 알렉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남자는 오른쪽 장갑을 벗어 다른 손에 칼과 함께 쥐었다. 알렉스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알렉스는 남자의 맨손에 뺨을 맞았다. 이 역시 눈 깜빡할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얼얼한 고통이 느껴진 후에야, 알렉스는 자신이 저 남자에게 맞았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알렉스의 몸이 휘청였다. 넘어가려는 몸뚱이를 남자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바닥을 뒹굴었을 게 분명했다.

무식한 힘이었다.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있던 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이게 무슨…….」

알렉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대를 더 얻어맞아 그랬다.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나질 않았다.

파열음이 이어졌다.

현실감이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다. 어두운 무대 위에 올라 기묘한 이인극을 진행하게 된 배우라도 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달아나야 한다. 흔들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알렉스는 그런 생각을 했다.

하나 목 위에 칼날이 닿자 다시 몸이 굳었다. 자상은 치료 마법으로도 완전히 지우지 못한다. 제 귀한 몸에, 상처가 나게 둘 수 없었다. 알렉스는 긴장해 눈을 굴렸다.

「쉿.」

「…….」

「나는 말 많은 인간이 싫어. 말 많은 쓰레기는 더 싫고.」

저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속삭였다. 그저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공포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알렉스는 남자에게 멱살을 붙잡혔다. 얼핏 무심해 보이는 남자의 두 눈 속에 차가운 분노가 서려 있었다. 알렉스는 평생 알지 못할 분노였다.

큰일 났다.

알렉스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욕이 나왔다.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싶었다. 알렉스는 목구멍을 열고 비명을 내지르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억센 힘에 목이 졸린 알렉스에게 허락된 건, 소리 없는 비명이 전부였다.

제 거울 같은 사내를 두 눈에 담으며, 알렉스는 정신을 잃었다. 자정을 넘긴 이른 새벽녘의 일이었다.

* * *

숙소의 관리인이 가져다 놓은 신문을 뒤적거리던 아사드가 그 안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작은 종이에 인쇄된 특보였다. 어린아이들이 가방에 잔뜩 담아 호외를 외치며 파는 것까지 사들여 끼워 둔 모양이었다.

아사드는 자세를 바꿔 삐딱하게 섰다. 종이 위에 새겨진 기사를 읽는 눈초리 역시 그 자세만큼이나 뾰족했다.

“손가락 열 개가, 한 마디씩 잘린 남자.”

자정 너머에 일어난 기묘한 사건이 아사드의 목소리를 타고 허공에 흩어졌다.

기자는 정체 모를 괴한에게 손가락을 잃게 된 불우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은 격정적인 어조로 써 내려갔다. 신이 난 건지 안타까워하는 건지 모를 감정이 엿보였다.

……피해자의 목숨엔 이상이 없으나,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에게 공격받은 것이란 망상을 늘어놓으며 정신 착란 증세를 보여…….

저런. 쥐고 있던 종이를 가볍게 구겨 신문 위에 던진 아사드가 혀를 찼다.

몸을 돌린 아사드는 2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하고 앓아누워 있는 제 신부를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이 고풍스러운 저택만큼이나 나이가 많을 목조 계단을 밟을 때마다 끼익, 끼익 나무가 우는 소리가 났다.

그 묵직하면서도 스산한 소음에 아사드는 귀를 기울였다. 어제 일어났던 개 같은 일을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딴청을 피우는 거였다. 아주 잠깐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알렉스 쿠퍼란 작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어졌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그런 마음을 품어선 안 됐다.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혀야 했다.

곧 마주할 케이든에게 제 분노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케이든은 눈치가 좋은 듯하면서 사실 눈치가 더럽게 없어서, 제가 그에게 화가 난 거라고 오해를 할지도 몰랐다.

‘벌써 죽일 수도 없지.’

아사드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두운 밤. 아사드는 그 쓰레기의, 알렉스 쿠퍼의 뒤를 밟았었다.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그자의 손을 붙들었다.

지난 새벽에 알렉스가 받았을 고통은 별것 아니었다. 일회적인 징벌일 뿐이었다. 케이든을 겁박하고 억세게 붙잡은 짓에 대한, 감히 뺨을 내려친 짓에 대한 벌을 준 것밖엔 안 됐다. 그 돼먹지 않은 도련님에겐 앞으로 청산해야 할 죄가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이 먼 북부에서 알렉스와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엠마의 결혼 소식을 들은 쓰레기가 수도 일대에 사람을 깔아 놨을 것으로 예측하긴 했다. 케이든 주위를 맴도는 벌레들을 보며 그걸 확신했고.

곧장 그 자식에게 보고가 들어갈 것도 알았다. 쓰레기에게 갈 한 놈만 남기고 벌레들을 죄다 처리해 뒀으니 말이다.

하나 백작령에 있어야 할 남자가 당장 수도까지 찾아오진 못할 거라고 여겼다. 저와 케이든이 북부를 떠난 뒤에나 나타나 초조함만 느끼겠거니 했는데……. 예상이 비껴갔다.

서먼 백작가는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들이 벌여 놓은 사업은 물론 그들 소유의 농장 또한 꼴이 엉망이 됐다. 그런데도, 그렇게 욕심으로 눈이 붉어져선 헐레벌떡 수도로 달려오다니. 추잡하기 그지없었다.

“…….”

아사드는 케이든이 머무는 침실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아직 잠을 자고 있을 거다. 시끄럽게 문을 두드려 댈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곧장 문을 열지도 못했다. 문 앞에 가만히 선 채로, 아사드는 침묵했다. 망설임이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쓰레기와 케이든이 말을 나누는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던 건, 케이든이 자기 스스로 알렉스 쿠퍼에게 선을 긋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서였다. 케이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길 바랐다. 그가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길 바랐다. 그래서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저는 제 신부와 미친 남자 사이에 얽혀 있는 시간을 들여다보고 싶었을지도 몰랐다.

도통 손에 잡히지 않는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 그래서, 골목 안으로 완전히 발을 내딛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치미는 분노를 억지로 삼켜 내며 고집스럽게 버티고 서 있던 걸지도 몰랐다. 쥐새끼처럼 기척을 숨기고 그들을 바라봤던 걸지도 몰랐다.

지난밤 내내 아사드는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케이든을 향한 미안함으로 계속해 모습을 바꿔 갔다. 그러나 끝내 후회하지는 않았다.

아사드는 케이든의 상처를, 그 상처가 얼마나 곪아 있는지를 알게 됐다. 내도록 궁금해했던 이야기의 전말을 알게 된 아사드는 제 심장이 산 채로 끄집어내지는 듯한 기묘한 아픔을 느꼈다.

〈케이든. 내가 당신을 지켜 줄 거야. 감히, 그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그리고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말했다. 창백한 낯을 한 남자에게 단 한 점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심을 전했다. 신도 잘라 내지 못할 맹세를 했다.

세상에 들끓는 온갖 더러운 것들에게서 케이든을 지켜 주고 싶어졌다. 어두운 골목 안이 아니라 밝은 햇살 아래에서, 제 신부를 웃음 짓게 해 주고 싶었다. 그게 이따금 저를 향해 오는 더럽게 어색하고 짜증 나는 웃음일지라도 괜찮았다.

‘어제 같은 일을 다시 겪게 할 순 없어.’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숨을 내쉬며 아사드는 문고리를 잡았다. 하지만 차마, 그것을 돌리지 못했다.

‘언젠가 떠나보낼 사람에게…… 이런 마음을 갖는 게 맞는 일인가?’

금색 문고리를 붙든 채로 아사드는 자신의 모순을 곱씹었다. 이제는 황당함도 느끼지 못할 지경에 이른 모순이었다.

쉬운 길을 앞에 두고 뒤를 돌아보는 건 저와 맞지 않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됐다. 저 멀리에서 혼자 걷고 있는 남자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아니, 뛰어가 손을 붙잡아 주고 싶었다. 그런 이상한 갈망이 들었다.

“…….”

철컥. 아사드의 혼란한 번민을 찢으며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고리를 돌린 건 아사드의 손이 아니었다. 당황한 아사드가 문에서 반걸음 물러섰다.

문이 열린 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보인 이는, 당연하게도 케이든이었다.

“들어오지 않으시길래…….”

“…….”

“무슨 일이 있나 해서요.”

금세 입을 다문 케이든이 멋쩍다는 듯 웃어 보였다.

케이든은 이미 깨어 있었다. 그런 케이든을 마주하고, 아사드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아문의 모습으로 처음 케이든의 침실을 찾았던 때가 떠올라서 그랬다.

그때, 케이든은 발코니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자신의 침실에 침입자가 들어선지도 모르고선 말이다. 어딘가 얼이 빠진 채로 쭈그려 앉아 멀뚱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문인 절 보고는 화들짝 놀라서 바쁘게 눈을 굴렸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저게 뭐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분명한 낯으로.

그랬던 남자가…… 제가 침실 앞을 서성이고 있는 걸 알아채고 먼저 문까지 열 정도가 됐다. 그만큼 제게, 자신의 배우자에게 익숙해진 거다.

괜한 웃음이 나왔다. 모른 척 꾹 눌러 담기도 힘든 커다란 웃음이었다.

아사드는 황급히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뺨을 쓰는 척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문을 닫는 케이든을 바라봤다.

어제, 케이든은 숙소로 돌아와 곧장 치료를 받았다. 터진 입술에 남은 피딱지며 알렉스의 손끝이 살갗에 남기고 떠난 얇고 긴 상처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하나 얼굴에 든 멍만은 미처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황궁이나 왕궁 소속이 아닌 평범한 치료 마법사의 마법에 기대야 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옅게 남은 멍 자국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애가 탔다.

이틀 뒤면 말끔히 사라질 거라며 케이든은 멋쩍게 웃었었다. 하나 아사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케이든은 자기 상처며 아픔에 지나치게 관대한 사람이니까.

헬리오에 도착하면 치료 마법사들부터 불러낼 생각이었다. 의사도 하나 더 붙여서 케이든 앞에 대령해야지. 초조 속에서 아사드는 생각했다.

“왜 일어나 있어?”

“……잠이 안 와서요.”

“그래도 누워 있어. 환자잖아. 얼굴이 조금 다친 것뿐이지 환자는 아니다,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아사드는 케이든의 손을 붙들고 말했다.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으로 어색하게 입을 다무는 케이든을 보자니 기가 찼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비어 있는 침대로 안내했다. 푹신한 침대 가장자리에 그를 앉히고, 자신은 대충 바닥에 앉아 케이든을 올려다봤다.

하지만 곧장 눈높이가 맞게 됐다. 당황한 케이든이 스르륵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아사드의 앞에 그대로 쪼그려 앉은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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