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63)화 (63/97)

잔뜩 취한 알렉스는 위태롭게 휘청이며 길을 걸었다. 늦은 오후부터 지금까지의, 지난 몇 시간 동안의 기억이 조각난 상태로 그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중이었다. 골목을 지나려 하던 행인에게 발견돼 작은 진료소로 옮겨졌을 무렵의 기억은 제외하고서였다. 그때, 알렉스는 기절해 있었으니까.

진료소에서 깨어난 알렉스는 치료가 끝나기 무섭게 치안대의 사무소로 곧장 향했었다. 진술을 마치고 나와선 내도록 술을 마셨다. 시간을 버티기 위함이었다. 하수인들이 케이든의 행적을 보고하는 데에는 반나절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남은 반나절을 알렉스는 맨 정신으로 보낼 수 없었다. 아니, 맨 정신으로 견딜 수 없었다. 케이든에게 받은 치욕 때문이었다.

어지러울 정도의 치욕감이 끝도 아니었다. 케이든에게 달라붙어 있던 어린 알파에게 받은 모독이, 날카로운 날붙이가 되어 알렉스의 자존심을 푹푹 찔러 댔다.

숨처럼 뜨거운 욕지거리를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알렉스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치료 마법사가 몇 시간을 매달렸음에도, 헬리오 남자에게 얻어맞은 얼굴은 여전히 아프기만 했다.

‘이딴 허름한 외곽 동네에 제대로 된 치료 마법사가 있을 리 없지.’

고통을 뱉듯, 알렉스는 몇 번이고 욕설을 내뱉어야 했다.

잠시 마법사를 향했던 짜증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알렉스의 분노가 금세 다른 이를 향해 갔기 때문이었다. 제 고통의 근원에게로 말이다.

「케이든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에 달려들다니…….」

치졸하고 역겨운 헬리오 놈. 이제 막 나이 스물이 넘었을까 싶은 어린 알파는 무식하기 그지없었다. 제국에서 온 놈답게 말이다.

고작 뺨 한 대를 올려붙였다고 눈이 돌아가 제게 달려든 꼴을 보면, 그 알파가 케이든과 붙어먹은 것 역시 분명했다. 케이든에게 징그럽게 엉겨 있던 알파의 페로몬이 그 자식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토악질이 나왔다.

케이든은 새 주인에게만 몸을 판 게 아니었다. 자기보다 어린 놈까지 홀려서 그 새끼한테 몸을 대 주고, 자신의 호위 노릇을 시킨 게 틀림없었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케이든이 더 더러워지기 전에, 빨리 제 옆으로 데려와야 했다. 때가 타면 탈수록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힘들어지지 않겠는가.

저를 후려친 알파가 내일이면 감옥에 갇히리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치안대가 무능력한 건 알지만, 그렇게 눈에 띄는 헬리오 남자 하나 찾아내질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설령 치안대 놈들이 일을 망쳐도 상관없었다. 제가 풀어 둔 이들이 케이든과 그 미친놈을 한 번에 찾아낼 테니 말이다. 당장 내일 아침이면 그 얼굴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케이든과 다시 진지한 대화를 나눠 봐야지. 속으로 말을 중얼거리며 알렉스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었다.

오늘 마주했던 케이든의 낯이 어지러운 머릿속에 자꾸만 떠올랐다. 이가 갈릴 정도로 화가 치솟았다가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기분이 가라앉게 됐다.

어울리지도 않게 말끔한 꼴을 하고 웃던 케이든은, 정말 이상했다. 누구나 호감을 품고 말을 걸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보기 좋았다. 흙 묻은 얼굴로 저한테 몸이나 팔던 주제에 고아해 보였다.

재수 없는 어린애와 케이든이 살갑게 붙어 있는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는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비쳤을지도 몰랐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끔찍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역시. 케이든은 세상에 내보이면 안 될 존재였다.

천한 벌레 주제에, 케이든은 사람을 꼬드길 줄 알았다. 지독한 능력이었다. 제 몸종 일을 하던 14살, 15살 때도 그랬다. 겉으론 정숙한 척을 하며 은근하게 제 친구들을 유혹하지 않았는가. 세리나, 하엘, 칼슨. 모두 케이든에게 넘어갔다. 몇 번이고 진득한 시선을 보내고 귀찮게 말을 걸면서, 어떻게 해서든 케이든과 가까워지려 들었다.

「그렇게…… 그렇게 살면 안 되지.」

혼자 중얼거리는 입 안에선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술 냄새와 섞여 더 역겹게 느껴졌다.

알렉스는 분개했다. 제가 없는 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을 친 걸 알았을 때 느꼈던 분노가, 케이든이 빚을 탕감받고 농장을 떠나게 됐다는 걸 알았을 때 느꼈던 분노가, 다시 한번 그를 찾았다.

그들은 하나뿐인 자식이 천한 것과 붙어먹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 치욕적이라고 했다.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쏟아 냈다. 자기들이 치욕을 느끼는 게 저와 무슨 상관이라고, 짜증 나게 발을 굴렀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빨리 죽어 버렸으면. 침대 위에 멍청하게 누워 괜한 시간과 돈을 축내지 말고, 죽어 버렸으면. 그러면 참 좋겠다. 알렉스는 생각했다.

별안간 고꾸라져 망해 가고 있는 사업 따위야 알 바 없었다. 처분하면 그만이었다. 돈 같은 건, 영지에서 거둬들이는 세금과 농장의 수입으로 충분했다. 중요한 건 작위였다. 그 작위만 있으면…….

「누가 나를 방해하겠어.」

알렉스는 웃었다. 자정이 넘어 고요해진 길 위에, 알렉스의 웃음소리만이 길게 울려 퍼졌다.

「…….」

비틀대며 걷던 알렉스가 별안간 멈춰 섰다. 드문드문 놓인 가로등 아래에서였다.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

알렉스는 돌연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귓전에 닿아 오는 소리라고는, 마법석의 빛을 따라 모여든 벌레들이 가로등에 달라붙으며 내는 소음밖엔 없었다.

알렉스는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그가 꺼내 든 건 치료를 받아 깨어난 뒤에 급히 마련해 둔 잭나이프였다. 성인 남자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단검은, 그 길이는 짧아도 뭐든 가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날이 잘 들어 있었다.

‘겁먹은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알렉스는 자신의 과민 반응이 짜증 났다. 평소라면 이딴, 뭔가가 나를 따라오는 것 같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이게 다 오후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그 폭력적인 알파 때문에 괜한 의심을, 망상을 품게 됐다.

얼굴을 구긴 알렉스는 다시 길을 걸었다. 여전히, 한 손에 나이프를 쥔 채였다.

알렉스는 마차 보관소에 가려 했다. 그곳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아무 마차나 잡아타고 숙소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술을 마시다 보면, 멍청이들이 케이든의 소식을 물어 올 거야.’

이전보다 빠르게 걸으며 알렉스는 히죽 웃었다.

하나 생각이 더 이어지진 못했다. 알렉스는 다시, 걸음을 멈췄다. 채 열 걸음을 걷기도 전이었다.

「……뭐야.」

저 뒤에서, 낯선 소리가 났다. 무거우면서도 청명한 울림. 무언가가, 마치 노크를 하듯 가로등의 기둥을 치고 있었다. 누군가 들어 주길 바라는 듯 말이다.

알렉스는 급히 뒤를 돌았다. 그의 예상대로 가로등 아래에 사람이 서 있었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도 알아챌 만할 정도로 값비싼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알렉스의 시선을 느낀 남자의 손이 가로등 기둥에서 떨어져 나갔다. 자신의 목적은, 오직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뭐지? 수도 외곽에 있는 조용한 주택가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머리에 쓴 실크 햇이 얼굴에 그늘을 내린 탓에 이목구비가 뚜렷이 보이지 않아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어디 왕족이 연 파티에라도 다녀온 건가 싶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십니까.」

남자는 알렉스에게 말을 걸었다. 설핏 드러난 면면이 빛을 받아 더욱 창백해 보였다.

알렉스는 말문이 막혔다.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져서였다. 하지만 명확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어두운 밤, 가로등 아래에서 마주친 신사. 낯설지만 익숙한 목소리. 유령이라도 마주한 건가? 알렉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자는 가벼운 걸음걸이로 알렉스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지는 게 꺼림칙했지만, 알렉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향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저 남자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길을 벗어난다면 겁쟁이처럼 보일 것 같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하나 자그마한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알렉스는 제 손을 뒤로 숨겼다. 그리고 작게 웃어 보였다.

「뭡니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남자는 어느새 알렉스의 지척에 와 있었다.

「아……. 모자를 벗는 걸 잊었습니다.」

예의를 잊어 미안하다는 듯 탄식한 남자가 모자를 벗었다. 어둠에 가려졌던 남자의 얼굴이, 그제야 완전히 드러났다.

갈색빛이 도는 금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 세필 붓으로 그려 낸 듯 섬세한 이목구비. 너무나 익숙한 얼굴을 알렉스는 말없이 눈에 담았다.

「…….」

알렉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신경질적으로 스스로의 뺨을 쳤다.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술에 취해 헛것이 보이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제 앞의 남자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 선 남자의 머리카락이 금색으로 더욱 밝게 빛났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웃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

거울. 남자는 알렉스의 거울이었다.

알렉스는 그와 똑같이 생긴 남자를 앞에 두고 말을 잃었다. 쌍둥이 형제도 저와 저렇게까지 닮지는 못할 거다.

애들이나 재잘거릴 법한 유치한 이야기 속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 순간이 꿈인지 현실인지조차 구분이 가질 않았다.

끔찍했다.

「너…… 뭐야?」

알렉스는 물었다.

남자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번 더 거리를 붙여 왔다. 알렉스는 자신과 똑 닮은 남자가 가까워져 오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저, 얼떨떨하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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