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 그만하고, 너희 주인한테 가서 말이나 전할래?”
케이든의 입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얼마를 주고 쓰는진 모르겠는데, 내가 세 배를 더 주겠다고 해.”
아니, 세 배가 아니라 네 배를 더 쳐줄 수도 있지. 비꼬는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약 먹고 오메가 된 가짜를, 형질 바꿔 몸 팔던 싸구려를 왜 데리고 있지? 페로몬 조절도 못 하는 등신인 것도 알 테고. 그것만 문젠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대로 된 거 하나 없는 반푼이잖아.”
슬쩍 케이든에게 시선을 준 알렉스가 혀를 찼다. 하나 금세 뒤에 있는 남자에게로 다시 눈을 돌렸다.
“이런 하자품 말고 제대로 된 걸 얻으라고 해. 남의 거 함부로 뺏으려고 하지 말고.”
골목의 초입에 선 남자를, 차가운 낯을 한 아사드를 케이든은 멍하니 바라봤다. 알렉스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귓전에 내리꽂혔다.
왜 고개를 들지 못했을까. 왜, 고개를 들지 않아서, 아사드가 나를 보고 있던 것도 몰랐을까.
아사드가 모든 걸 듣고 있었다. 그가 왕국어에 능하지 않으니 괜찮다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을 거라고 모른 척을 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제국어가 많은 저와 아사드는 달랐다.
아사드는 왕국어를 제국어처럼 사용했다. 북부에 도착한 이래로 내내, 아사드가 너무나 능숙하게 왕국어를 구사하는 걸 보지 않았는가. 애초에 아사드가 왕국어를 모국어처럼 쓸 수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미움을 산 저만 몰랐던 거였다.
제 몸을 물어뜯기 시작하는 자괴감과 모멸감 사이에서 케이든은 웃었다.
케이든은 알렉스가, 저 남자가 미웠다. 제가 사람처럼 살게 두지 않는 남자의 목을 조르고 싶었다. 제가 숨겨 온 사실을 너무나 쉽게 떠벌린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미운 건…… 자기 자신이었다. 케이든은 스스로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당장 사라지고 싶었다.
「케이든. 쟤 표정 보여?」
「…….」
「아무래도 너, 쫓겨나겠다.」
다정한 목소리로 알렉스는 케이든에게 속삭였다.
「……쫓겨나도.」
「…….」
「길 위에서 잠을 자게 된다고 해도, 다시 도련님 밑으로 들어갈 일은 없어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케이든은 말을 중얼거렸다. 알렉스와 눈을 맞추며 웃어 보였다.
알렉스는 손을 들었다. 손바닥이 얼굴을 후려치는 소리가, 곧 골목 안을 울렸다.
케이든은 익숙한 아픔을 겪었다. 물속에 잠긴 듯 귀가 먹먹해졌다. 불에 닿은 듯 뺨이 아팠다. 눈을 떠도 감아도 눈앞이 뿌옇기만 했다. 세게 맞은 모양이었다.
「네 생각은 아무 의미 없어. 내가 말했잖아. 다시 만나면, 다리를 잘라서라도 내 앞에 둘 거라고. 멍청…….」
제 앞에서 느껴지던 열기가, 살갗에 가시처럼 박혀 오던 따가운 페로몬이 별안간 아래로 꺼졌다.
짧게 끊어진 욕지거리가,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둔탁한 파열음이, 무거운 것이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만들어 낸 진동이,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은 게 이명 사이로 섞여 들었다.
케이든은 눈을 떴다. 뿌연 시야가 다시 선명해질 때까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던 덩어리들의 색이 조금씩 선명해져 갔다.
아사드는 나자빠진 알렉스 위에 올라타 있었다.
쓰러진 남자의 얼굴에 다시 한번 주먹을 꽂아 넣은 아사드가 물러나 소매를 걷었다. 그의 목에 둘린 크라바트가 피 묻은 손아귀에 붙잡혀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리본 모양으로 지어진 매듭이 허물어졌다.
손에 쥔 크라바트 천을, 아사드는 신음하는 남자의 입에 쑤셔 박았다. 그대로 주먹을 올려 알렉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끔찍할 정도로 선명한 파열음이 또다시 골목 안에 울려 퍼졌다.
반격 한 번 하지 못하고 몸을 바르작대는 알렉스를 케이든은 가만히 바라봤다. 꿈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도통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붉어진 뺨과 터진 입술에서 퍼지는 아린 아픔마저 까맣게 잊게 됐다.
“…….”
낯이 새하얗게 질린 케이든은 떨리는 몸에 힘을 줬다. 그는 두 사람을 향해 갔다. 골목 너머, 아까 전만 해도 텅 비었던 마차 보관소 근처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이 소동 역시 금세 그들의 눈에 들어올 거다.
“아문.”
케이든은 아사드를 불렀다. 아사드가 빌린 다른 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아문!”
자신의 부름을 받아 멈춰 선 아사드를 케이든은 황급히 붙잡았다. 그를 잡아끌어 일으켜 세웠다. 아사드가 순순히 케이든을 따라 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자기 자신의 피를 얼굴에 뒤집어쓴 알렉스는 기척이 없었다. 그대로 기절을 한 건지,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건진 확인할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케이든은 급히 자신의 크라바트를 풀었다. 꽉 쥔 흰 천으로 아사드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아사드의 손에 묻은 피 역시 빠르게 닦았다. 잘 지워지지 않아 속이 탔다.
‘전하께 해가 될 일이 생기면 안 돼. 아사드에게…… 해가 될 일이 생기면 안 돼.’
케이든은 아문이 제게 해 줬던 말들을 계속해 곱씹으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거기, 무슨 일 있습니까?」
누군가 소란한 골목을 향해 물음을 건네 왔다. 저물어 가는 붉은 해도 미처 밝히지 못한 좁은 길목, 어둠에 숨은 사람들을 눈에 담으려 들었다.
피가 묻은 크라바트를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은 케이든이 아사드의 손을 망설임 없이 붙잡았다. 그리고 더 짙은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번도 발을 들여 본 적 없던 골목이었다. 저와 아사드를 뒤따르는 사람이 없기만을 바라며, 케이든은 알지 못하는 좁은 길들을 헤쳐 갔다. 어두운 골목까지 흘러든 빛만을 따르며 들어야 할 길을 택했다.
골목이 새로운 출구를 뱉어 낸 건, 5분가량의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낯선 풍경을 앞에 두고 케이든은 뜀박질을 멈췄다. 그제야, 아사드의 손을 놓아줄 수 있었다.
케이든은 아사드를 붙잡았던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고통을 닮은 호흡이 한 번에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 제 폐를 쥐어짜는 것만 같았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전신을 옥죄던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힘이 빠진 케이든은 어쩔 수 없이 벽에 등을 기대야만 했다.
괜찮으십니까.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묻고 싶었다. 절 순순히 따라와 준 그의 얼굴을, 두 눈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어 그저 침묵했다.
케이든은 고개를 숙였다. 골목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이른 저녁을 맞은 세상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소란한 말소리가 키가 크고 작은 그림자들과 함께 스쳐 지나갔다.
고요에 잠긴 건, 오직 케이든과 아사드 두 사람이 선 좁고 낯선 골목길뿐이었다.
“…….”
말이 없는 케이든의 뺨 위에, 아사드의 손끝이 닿았다. 붉게 부어오른 살갗 위를 느릿하게 헤매는 손가락 끝이 아릿한 고통을 남겼다.
놀란 케이든은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하나 아사드의 손이 벌어진 입술의 상처 위에 닿았을 땐, 숨기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파?”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물었다. 고작 목소리만 들어선 그의 기분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다정하기만 했으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케이든은 슬며시 아사드의 눈치를 봤다. 아사드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은 없어 그의 입가만 슬쩍 훔쳐보고 다시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사드의 다물린 입매에선 무어라 특정할 수 없는 불쾌감이 느껴졌다. 케이든은 처음 마주한 모습이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수준이 낮은 남자를 반려로 맞이해 혼인식을 올렸을 때도, 아사드는 저런 얼굴을 하지 않았었다. 혼인식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아사드가 제게 내내 퉁명스럽게 굴던 때도, 저 정도의 불쾌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었다.
케이든은 도망치고 싶어졌다.
여전히, 아사드의 손끝은 케이든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상처가 없는 뺨 위를, 눈가를 쓸어 보던 손은 이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줬다. 그 목소리만큼이나 다정한 손길이었다. 화가 난 사람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다정했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내보이는 다정과 분노 사이에서 혼란을 느꼈다. 하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가만히 서서 아사드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어쩌면…… 오늘이 아사드를 보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겠다. 케이든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아사드는 저를 도와줬다. 저를 구해 줬다. 한참을 맞아도 모자랐을 일이 고작 뺨 한 대를 맞는 것에서 끝이 났다.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해야 했다.
하지만 아사드가, 내 말을 듣고 싶어 할까? 케이든은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당신은 생각이 너무 많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케이든의 귓가에 닿았다. 아사드는 제국어가 아닌 왕국어로 케이든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또 하는 게 눈에 보이는데…… 왜, 그 속까지 들여다보기는 힘든 걸까.」
떨어져 나간 아사드의 손을 케이든의 눈이 반사적으로 따라갔다. 그 손이, 아사드의 얼굴 부근에서 멈출 때까지 말이다.
“당신이 해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나서지 않으려고 했어.”
자신을 봐 주는 케이든과 눈을 맞추며 아사드는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