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 할 얘기가 있으신가요?」
「뭐?」
「일하는 중이라 시간은 많이 못 내드립니다. 되도록 빨리 끝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일단 후배를…… 이 친구를 먼저 보내고 다시 대화해요.」
케이든은 말했다. 고작 말 몇 마디를 내뱉은 것뿐이었다. 고작 그뿐인데, 병을 앓는 사람처럼 식은땀이 났다.
알렉스는 굽혔던 몸을 똑바로 세우고 케이든을 마주 봤다. 목이 졸려 색이 변했던 얼굴 위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왜? 내가 쟤 앞에서, 네 옛날얘기라도 할까 봐?」
케이든의 심장이 쿵, 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뛰었다.
「그래서, 저 알파가 우리 얘길 못 들었으면 좋겠어? 들으면 어때. 저게 네 새 주인도 아닐 텐데.」
케이든은 알렉스에게 답하지 않았다. 뒤를 돈 케이든은 아사드의 손을 붙잡았다. 차마 그를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치지는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을 건넸다.
“아문. 먼저, 숙소에 가 있을래?”
“…….”
“나도 금방 갈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케이든은 말했다. 아사드에게 부탁을 건넨 거였다.
「……너. 누가 나한테서 등 돌리라고 했어.」
알렉스가 케이든의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붙잡았다.
끔찍했다. 제게 닿은 알렉스의 손도, 살갗을 찌르는 그의 페로몬도, 숨결도…… 다 역겹고 소름 끼쳤다.
하나 케이든은 치밀어 오르는 거부감을 억지로 삼켰다. 그는 아사드를 뒤로했다. 다시, 순순히 알렉스를 마주했다. 겨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지난번처럼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저 사람이, 아사드에게 해가 되게 둘 순 없으니까.
케이든은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지금 제 뒤에 선 아사드는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었다. 제가 일한다는 작은 상단의 후배일 뿐이었다. 선배의 사적인 일에 괜히 휘말리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케이든은 버텼다.
「도련님.」
「…….」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여긴 사람이 많아서 복잡하고, 시끄럽고…… 정신이 없어요. 골목 안쪽에서 말을 나누고 싶어요.」
어디든 좋았다. 아사드가 없는 곳이기만 하면 됐다.
케이든은 아사드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사드의 얼굴을 두 눈으로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랬다.
지금. 아사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농장의 일꾼들처럼 싸늘한 낯을 하고 저를 보고 있을까? 아니면, 저를 내쫓던 날의 백작 부부와 비슷한 얼굴을 했을까? 어느 쪽이 됐건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평소처럼 저를 봐 주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알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알렉스는 케이든의 제안을 비웃지 않았다. 괜한 말을 더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는 듯 케이든을 잡아끌고 자신이 지나왔던 골목을 향해 갔다.
알렉스에게 잡힌 팔이 아팠다. 그래도 케이든은 얌전히 알렉스를 따랐다. 저를 뒤따르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사드가 쫓아오지 않아서, 다행이다.
엉성한 미소를 띤 채로 케이든은 생각했다.
「…….」
그는 좁고 어두운 골목 안으로 밀어 넣어졌다. 탄식 같은 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케이든은 알렉스를 마주한 채 홀로 서게 됐다. 골목 입구를 가로막은 알렉스와 차마 눈을 마주하지도 못하고 욱신대는 팔뚝만 쓸었다. 아사드가 옆에 없다는 사실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 모두가 움츠러들었다.
‘제발 돌아가 달라고 부탁을 해 놓고.’
케이든은 자신의 모순을 비웃었다.
「너 저 새끼랑 잤어?」
케이든에게 가까이 다가간 알렉스는 물었다. 케이든이 멍청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길 기다렸다.
「그게 무슨…….」
「대 줬냐고.」
알렉스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케이든은 쭈뼛대며 뒤로 물러났다. 알렉스의 웃음은, 적어도 그에겐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그랬겠지? 그래서 저 어린 게 시건방지게 구는 거잖아, 응? 자기랑은 상관도 없는 여자의 결혼식까지 졸졸 따라가고. 사막 놈이 같잖게 신사인 척을 하면서, 내 앞에서…….」
「아니에요. 아닙니다.」
케이든은 식겁해 말을 반복했다. 그도 모르게 알렉스의 말을 끊었다.
「헬리오 사람들은 무식해. 저런 천한 것들은 더 문제야. 건방지게 귀족에게 덤비고, 자기가 잘못한 줄도 모르지. 그런데 저건, 그냥 무식한 정도가 아니잖아. 미친놈이지. 안 그래?」
「……아문은 똑똑해요. 저랑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정말 똑똑해요.」
「……뭐?」
알렉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고개를 숙인 케이든은 힐끔힐끔 눈을 들어 알렉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저 애는, 가깝지도 않은 저까지 많이 신경 써 주는 좋은 동료예요. 하지만 저랑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그냥, 같은 일을 하는 선후배입니다. 거기다, 저 친구한텐 그림처럼 예쁜 애인이 있어요. 그, 그런 오해는 말도 안 됩니다.」
「…….」
「정말 착하고 성격이 좋은 친구입니다. 남들 대하듯 저한테도 잘해 주는 것뿐이고요. 결혼식도, 일 때문에 함께 수도까지 왔다가 시간이 떠서…… 재미 삼아 온 겁니다…….」
케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횡설수설하며 아사드와 그 사이에 선을 그었다.
침묵이 골목 안을 내달렸다.
「그래. 저런 알파가 너같이 못생긴 거한테 치댈 리 없지. 잘 아네. 주제 파악하면서 살고 있었어.」
케이든의 얼굴에 떠오른 자괴감을 살피며 알렉스는 웃었다. 잔뜩 굳었던 입매가 만족감을 머금어 부드럽게 풀어졌다.
「케이든. 네가 헛바람이 들어서 괜한 꿈을 꾸면 어쩌나, 걱정했어. 꿈에서 깨면 상처받을 거 아냐.」
「…….」
「내가, 널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알렉스의 손이 케이든의 목덜미에 닿았다. 하얀 셔츠의 깃을 지분대던 손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크라바트 천을 틀어쥐었다.
목이 졸리는 기분과 함께 케이든은 알렉스에게 끌어당겨졌다. 케이든은 버티지 않았다. 순순히 남자와 거리를 좁혀 줬다.
「아버지가 너를 내다 버린 뒤에, 너한테 사람을 몇이나 붙였는지 몰라. 널 찾느라 돈을 얼마나 썼는지…….」
알렉스의 목소리가 골목 안을 울렸다. 그의 말은 막힘없이 이어졌다.
「나는 말이야, 케이든. 네가 어디에 있고 뭘 하고 있는지, 그걸 다 알아야 했어. 너의 모든 걸 알아야 했어. 언젠간 널 다시 내 옆에 둬야 하는데, 그때까지 네가 나 몰래 걸레처럼 몸 굴리고 다니면 어떡해. 내 것이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그래서 감시한 거라고.」
「…….」
「그런데 이상하지? 너한테 붙여 둔 놈들이 갑자기 사라진 거야. 흔적도 안 남기고 한순간에 증발해 버렸어. 그러다…… 하, 몇 달 만에 듣게 된 얘기가, 네가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상단에 취직해서 사막으로 일을 하러 갔다고……. 어찌나 당혹스럽던지.」
헛웃음을 내뱉은 알렉스가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래. 속는 셈 치고 헬리오로 가 봤어. 사막의 모든 상단이 수도에 몰리는 날이라고 하니까. 갈 수밖에 없었어. 그리고…… 거기에 정말 네가 있었지.」
「…….」
「나는, 그렇게 많은 사람 틈에서 단번에 너를 발견했어. 너도 나를 단번에 알아봤지. 나는 너를, 너는 나를 봤잖아.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던 거야. 그게 너무 우습지 않아? 우리가 마법으로 주종 관계를 맺진 못했잖아. 그런데도 그랬어.」
크라바트를 붙잡고 있던 알렉스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그의 얼굴처럼 고운 손가락이 케이든의 뺨에 닿았다.
「왜 사막으로 도망친 거야?」
「…….」
「왜. 그렇게 먼 곳으로 도망을 갔을까. 그걸 알고 싶어서 아크에 두고 온 놈들은 답을 안 주더라. 연락이 끊겼거든.」
「……도망친 게 아닙니다.」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난 건 도망이 맞아.」
케이든과 눈을 맞춘 채 알렉스는 속삭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곧 죽을 거야. 의사에게 직접 들었어. 사업이 잘못돼서 앓아누웠거든. 잘된 일이지?」
「…….」
「작위만 얻으면, 부모 비위 맞춰 줄 이유도 사라지지. 내키는 대로 널 완전히 가지면 돼. 부인이 될 사람도, 네 존재를 이해하고 품어 줄 인물로 골라 다시 맞을 거야. 네 미래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
「……싫어요.」
케이든의 목소리가 좁고 어두운 길목을 울렸다.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뭐?」
「싫습니다. 저는, 이, 이제 도련님 밑에서 일 안 해요. 아니, 못 합니다. 제 빚도 문제가 안 돼요. 백작님께서 다 없애 주셨어요. 제가 농장에서 나가던 날에요.」
케이든은 두려웠다. 숨을 쉬기 힘들어 자꾸만 말을 더듬게 됐다. 하지만 결국, 알렉스에게 제 뜻을 온전히 전하는 것에 성공했다.
「전…… 도련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케이든은 말했다. 등 뒤로 떨리는 손을 숨기긴 했지만, 지난번처럼 말도 안 되는 공포에 빠지진 않았다.
저와 아사드의 호위를 맡아 준 이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여기에 남아 있다면, 제가 알렉스에게 맞아 죽는 건 막아 줄 거다. 케이든은 그런 얄팍한 기대를 품게 됐다.
설령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다시 알렉스에게 붙잡혀 농장으로 돌아가느니 여기서 죽는 게 나았다.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제 인생에 단 한 번도 찾아와 준 적 없던 특별한 기쁨을 몇 번이고 맛본 날이었다. 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은 다 해 봤다.
그러니 괜찮았다.
「미쳤구나.」
「…….」
「새 주인이, 먹고살 만하게 해 줬나 봐?」
미간을 구긴 알렉스가 몸을 붙여 왔다. 얼굴이 붉어진 남자는 자신을 밀어내려는 케이든의 손을 억지로 붙들었다.
「나한테 힘 못 쓰는 건 여전하네. 내가 참 잘 가르쳐 뒀지?」
알렉스는 케이든의 귓가에 속삭였다.
구겨지고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케이든의 목덜미에 알렉스는 코를 박았다. 집요하게 체향을 느꼈다. 누군가 케이든에게 남겼을지 모를 흔적을 찾았다.
그러다 기분 나쁘다는 듯 케이든에게서 몸을 뗐다.
「……역겨워.」
「…….」
「알파 페로몬이나 묻히고 다니는 남창 새끼.」
케이든은 대꾸하지 않았다. 엉망이 되어 버린 옷매무새를 정리하기만 했다. 알렉스의 두 눈 대신 제 구두코를 내려다보며 두려움을 참아 냈다.
「하긴, 네가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어. 꾸역꾸역 사막까지 가서 몸이나 팔았겠지.」
웃어 보인 알렉스가 몸을 틀었다.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구경 그만하고, 너희 주인한테 가서 말이나 전할래?」
알렉스는 저 뒤를 향해,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는 남자를 향해 말을 던졌다. 하지만 이내, 실수했다는 듯 한 번 더 말을 건넸다. 제국어를 사용해서였다.
“구경 그만하고, 너희 주인한테 가서 말이나 전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