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59)화 (59/97)

“계속, 아까처럼 내 선배 노릇 해 주면 안 되나?”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예상치 못한 물음을 건네받게 된 케이든의 입이 느릿하게 다물렸다.

“날 당신 후배처럼 대해 달라고. 엘바를 떠난 뒤에도…… 그러니까, 헬리오에서도…… 뭐, 그래도 좋아.”

“…….”

“당신이 쓰는 경어, 아문이랑 똑같아. 너무 딱딱해. 제국어를 쓸 때만 그런 줄 알았는데, 왕국어를 할 때도 똑같아. 그런데 선배인 척을 할 땐 안 그랬잖아.”

흘깃 케이든의 낯을 살핀 아사드가 느릿느릿 말을 이어 갔다.

“나를 편하게 대해 달라는 얘기야. 지금 당장 그러라는 건 아니고, 천천히. 차근차근……. 그러자고. 뭐, 일단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덜 불편하게 대해 봐.”

말을 마친 아사드가 멋쩍다는 듯 헛기침을 했다.

케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알았어.’라고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요청에 당혹감을 느꼈다. 그래도 아사드가 원하는 일이었다. 어색하더라도 노력을 해 봐야겠구나 싶었다. 정말 노력만 하다가 남은 시간을 다 쓰게 되더라도 말이다.

아사드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케이든은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빵은, 여전히 괴로울 정도로 그 맛이 달았다. 하지만 이런 걸 아사드가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혀가 아릴 정도의 달콤함도 꽤 괜찮게 느껴졌다.

* * *

엷은 분홍빛에 가까운 붉은 하늘에 조금씩 남청빛이 섞이기 시작했다. 엠마의 결혼을 축복한다고 생각했던 따스한 날씨가 본래의 차가운 모습으로 낯을 바꿨다.

그제야, 케이든은 마차가 줄지어 서 있는 공터 앞에 도착했다. 아사드와 함께였다.

저택에서 마차 보관소까진 걸어서 고작 5분이었다. 그 가까운 거리를 30분이나 걸려 당도하게 됐다. 답답한 마차에 올라타기 전에 바깥 공기를 충분히 마셔 둬야 한다며, 다른 길로 케이든을 끌고 간 아사드 덕분이었다.

예정보다 도착이 늦어진 저와 아사드를 기다렸을, 그리고 느릿하게 뒤따랐을 호위들에게 케이든은 미안함을 느꼈다. 엠마의 결혼식에 일행이 아닌 척 참석했던 호위 역시 이미 숙소에 도착해 있을 듯했다. 아사드가 그에게 먼저 돌아가라 명을 내려 뒀으니 말이다.

익숙한 마차가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단번에 마차를 찾아가지는 못했다. 공터 옆에 난 좁은 골목에서 별안간 튀어나온 남자와 부딪치고 만 작은 사고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세게 부딪치기 전에 몸을 틀 수 있어 다행이었다. 고개를 숙인 남자를 향해, 케이든은 먼저 사과를 건넸다. 반쯤은 버릇처럼 건넨 말이었다.

그런 케이든과 남자 사이에 아사드가 끼어들었다. 짜증 섞인 낯을 한 아사드는 검은색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이 아주 따가웠다.

“당신이 뭐가 죄송해. 저 새끼가 눈깔 더럽게 뜨고 걷다가 다짜고짜 부딪친…….”

어느 순간, 아사드의 목소리가 흐릿해졌다. 그답지 않게 말을 끝맺지 못했다.

케이든은 별안간 말이 없어진 아사드의 시선을 좇았다. 아사드는 자신과 부딪친 남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 맞춰 왔네.」

남자는 말했다. 깊게 눌러쓴 후드가 만든 그늘 밑으로 보이는 입매가 웃는지 우는지 모를 미묘한 모양으로 비틀렸다.

손을 든 남자는, 그가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 모자를 거칠게 벗겨 냈다. 그의 얼굴이 붉은빛 아래에 훤히 드러났다.

남자는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처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초록색 눈동자를 더 돋보이게 해야 할 흰자는 핏줄이 터져 벌겋게 변해 있었고, 결 좋은 금빛 머리카락은 후드를 벗는 과정에서 멋대로 헝클어져 버렸다. 제대로 잠그지 않은 셔츠의 모양새는 만취한 주정뱅이들의 것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숨을 몰아쉬던 남자는 아사드의 뒤에 반쯤 가려진 케이든을 보며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웃었다. 그의 낯만큼이나 혼란한 웃음소리가 입 사이로 터져 나왔다.

“…….”

저 남자가 누군지, 케이든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케이든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설고 허술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를 보는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겁을 집어먹게 됐다.

도련님. 눈을 깜빡이는 것도,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케이든은 알렉스를 바라봤다.

「케이든!」

알렉스는 케이든을 불렀다.

고작 이름이 불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고작 이름이 불리게 된 것만으로, 케이든의 세상은 거꾸로 뒤집히고 말았다. 엠마의 결혼식에서 마주했던 행복과 기쁨이, 혀끝을 맴돌던 달콤한 맛이, 별안간 등장한 새까만 두려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너무 가까웠다.

케이든은 뒷걸음질 쳤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아크의 성벽 너머에 섰던 시장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커다란 공포가 그를 덮쳤다.

몸이 얼어붙은 채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제 손으로 목을 감싸고 눈을 감았다. 목이 졸릴 것 같아서 그랬다.

미간을 구긴 알렉스는 케이든을 향해 신경질적인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아사드의 손에 가로막혀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알렉스는 자신의 가슴팍을 짚은 남자를 봤다. 케이든과 함께 다닌다던 앳된 구석이 있는 어린 알파. 케이든같이 어설픈 것과는 말도 섞지 않을 것 같은 낯을 한 헬리오 남자였다.

「너 뭐야?」

욕지거리를 내뱉은 알렉스가 아사드의 어깨를 밀쳤다. 알렉스는 아사드를 비웃었다. 케이든 앞에서 멍청하게 웃을 땐 언제고, 품을 잡으려고 얼굴을 차갑게 굳힌 꼴이 우스워 그랬다. 제대로 굴러가는 건지도 모를 상단에서나 일할 사막 놈이 말이다.

케이든은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는 거리를 좁혀 온 알렉스에게 공포를 느꼈고, 자신에게 고통이 찾아올 것을 예감해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고통이 닥치지 않았다.

거친 음성만이 귓전에 닿는 게 더 두려워 케이든은 황급히 눈을 떴다. 그는 눈을 굴려 자신의 팔을, 옷의 앞섶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알렉스의 손은 닿아 있지 않았다.

케이든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알렉스의 화가 난 얼굴이 이전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케이든의 앞을 막아선 남자가 알렉스를 가리고 선 탓이었다.

제 앞에 있는 남자.

황태자님…… 아사드…….

아사드. 그 이름을 몇 번이고 입 안에서 굴려 보며 케이든은 눈을 깜빡였다. 저와 알렉스, 단 두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어그러진 세상이 차차 이전의 모습을 찾아 가고 있었다.

아사드가 내 앞에 있다.

케이든은 숨을 삼켰다. 섞일 수 없는 안도와 공포가 공존하는 숨이었다.

아사드에게 숨겨야 할 건 제가 해 온 일들이 아니라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둔 채로, 케이든은 제 모든 수치를 아는 남자를 마주했다.

머릿속이 새까맣게 물들어 갔다. 암담함과 치욕감, 자괴와 모멸, 두려움. 엉망진창으로 뒤엉켜 버린 감정 속에서 케이든은 숨을 쉬지 못했다.

하지만 케이든은 도망치지 않았다.

저는 여기 남아야 했다. 남아서, 아사드에게서 저 남자를 떼어 놔야 했다. 몸이 떨릴 정도의 두려움보다 몇 배는 더 몸집이 큰 목표가 케이든의 다리를 움직였다.

〈엘바에 계실 때의 케이든 님과 지금의 케이든 님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케이든 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황태자 전하의 위신을 올릴 수도 떨어트릴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만큼 조심하셔야 하고요.〉

아문에게 들었던 말들을, 케이든은 몇 번이고 반복해 떠올렸다. 곱씹었다.

케이든은 뒷걸음질 쳤던 만큼 다시 앞을 향해 갔다.

‘……아사드에게 피해가 갈 일을 만들 순 없어. 그러면 안 돼.’

오직, 그 생각만을 했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케이든이 알렉스를 아사드에게서 떨어트리는 것보다, 아사드가 알렉스의 멱살을 잡아 쥔 게 먼저였다.

“벌레 새끼들이 언제 보고를 끝마치려나 했더니…… 벌써 왔네.”

아사드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올라갔다.

뒤를 향해 살짝 몸을 튼 아사드가 자신의 옷자락을 붙든 케이든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하지만 케이든에게 말을 걸지도, 아는 척을 하지도 않고 그저 마차 보관소 쪽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다가오려는 호위들을 막은 거였다.

“너 뭐냐니까?”

알렉스의 형형한 분노가 자신을 가로막는 아사드에게 닿았다. 답을 주지 않는 그에게 제국어로 물었다.

하나 아사드는 알렉스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알렉스의 멱살을 틀어잡은 아사드의 손에 핏대가 불거졌다. 희기만 하던 알렉스의 낯빛이 순식간에 색을 바꿨다.

「케이든! 네가 답해. 이 새끼 뭐야. 둘이 무슨 사이야!」

케이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알렉스는 아사드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머리 위로 찬물이 끼얹어진 기분이었다. 그제야, 케이든은 완전히 정신을 차리게 됐다. 저 남자가 아사드에게 닿는 게 끔찍이 싫다는 마음이 그를 다시 움직이게 했다.

무서웠다. 하지만 케이든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사드와 알렉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알렉스의 멱살을 쥔 아사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사드는 못 이기는 척 케이든에게 붙잡혀 줬다. 알렉스가 끝끝내 밀어 내지 못했던 오른손에서 완전히 힘을 풀었다. 툭. 알렉스를 밀치면서였다.

막혔던 숨을 몰아쉬는 알렉스를 아사드는 무감하게 내려다봤다. 케이든은 그런 아사드의 표정을 조금도 읽지 못했다. 읽을 수 없었다.

「……제 후배예요. 가, 같이 일하는.」

케이든은 아사드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낯을 굳히고 알렉스에게 중얼중얼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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