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요! 알리나, 당신도 좋지?」
아사드의 물음을 냉큼 낚아챈 엠마가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다급히 물었다.
당황한 케이든은 그도 모르게 알리나의 눈치를 살폈다. 놀랍게도, 알리나는 웃고 있었다. 대신 입만 웃고 있었다.
「그럼. 나는 괜찮지.」
알리나는 엠마에게 말했다. 거짓말이 분명했다.
「정말?」
함박웃음을 지은 엠마가 자신의 배우자에게 팔짱을 꼈다.
「내가 너한테 거짓말한 적 있어?」
알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싸늘한 낯으로 저와 아사드를 바라볼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만 같았다.
그렇게, 케이든은 엠마 부부와 이상한 오찬 약속을 잡게 됐다. 갑작스럽게 등을 떠밀린 것 같은 상황도, 오찬에 따라나서겠다는 아사드도 모두 당황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알리나의 저택에 오래 머물진 못할 것이다.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 뒤에 헤어지게 되겠지. 예전, 엠마가 제게 장난스럽게 알려 줬던 부유한 사람들의 일과표에 따르면 말이다.
엠마를 또 본다고 생각하니 좋긴 했다. 앞으로 2년 뒤에나 다시 엠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테니까. 제 욕심 탓에 다른 사람들이 고생하는 건, 아사드가 곤란해지는 건, 이번 여정으로 족했다. 더는 미안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오늘의 주인공인 엠마는 가벼운 포옹과 함께 케이든과 미리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사람이 많은 곳에 머무는 걸 꺼리는 케이든이 피로연의 끝맺음과 상관없이 먼저 귀가하길 바라며 건넨 인사였다.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테니 빨리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쉬고 일을 하라며 그를 재촉했다.
케이든은 엠마의 권유를 따라 이르게 자리를 뜨기로 했다. 아사드가 신경 쓰여 그랬다.
하지만 그대로 대화를 끝마치진 않았다. 마지막으로, 케이든은 살짝 몸을 숙여 엠마에게 조심히 말을 건넸다. 누군가 너에게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것 같다고, 자신이 아사드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남자의 인상착의 역시 상세히 알렸다.
엠마는 다소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케이든이 말하는 남자가 알리나의 사촌인 듯하며, 그가 자신을 그런 식으로 볼 리 없다고 솔직한 말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리 알아 두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엠마는 그녀의 배우자와 함께 다른 손님들에게로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내일 만나자는 말을 몇 번이고 다시 입 밖에 낸 뒤였다. 뒤를 돌아보는 엠마의 두 눈엔 무거운 미련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다시 앞을 향해 갔다.
“…….”
엠마와 알리나가 서 있던 자리 위로 적막이 내려앉았다. 케이든은 멀어져 가는 엠마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사드는, 그런 케이든의 옆얼굴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북부 사람들은, 결혼식을 올린 뒤에 여행을 가나 봐요?”
아사드의 물음이 근처를 맴돌던 적막을 내쫓았다. 둘만 남았으니 다시 평소처럼 말해도 될 텐데. 후원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조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신혼여행?”
“네.”
“음,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많이들 갈 거야. 나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그러질 못하고.”
“자기 남편이 돈 많은 거 알죠? 자꾸 까먹나 본데.”
“응?”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는 케이든을 뒤로하고, 아사드는 말을 이어 갔다.
“뭐, 일생에 한 번뿐인 일이니 그 여행도 결혼식만큼 중요하긴 하겠네요.”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거야. 아마도.”
“선배도 여기 엘바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잖아요. 나랑 부부가 되고, 음, 여행 못 간 거 아쉬웠어요? 내심 서운했다거나.”
“아, 아니. 서운하다니. 그런 생각은 안 했어. 애초에 결혼 같은 걸 꿈꿔 본 적도 없고…….”
“그럼 됐어요.”
고개를 돌린 아사드의 옆모습이 어딘가 퉁명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언제 케이든에게서 눈을 뗐었냐는 듯 돌연 다시 눈을 맞춰 왔다.
“왜 꿈꿔 본 적이 없어요? 결혼.”
귀 위에 꽂힌 폭신한 흰 꽃송이를 만지작대며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물었다.
“그냥…… 나는 못 할 것 같았어.”
“결국 나랑 혼인식 치렀잖아요.”
“…….”
“그 신혼여행이란 거, 원하면 지금이라도 말해요.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괜찮아요. 내가 그런 부탁 하나 못 들어줄까.”
아사드가 내놓은 말에 케이든은 가벼운 당혹감을 느꼈다. 북부의 관례라는 신혼여행을 구실 삼아 잠시나마 황궁을 나서고자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금방 안녕을 고하게 될 남자와 왜 굳이 여행을 떠나겠는가.
“대답을 안 해 주시네. 뭐, 당장 답을 달란 건 아니었어요. 원할 때 말해요.”
“……응. 알았어.”
망설이던 케이든이 일단은 짧고 긍정적인 답을 줬다. 말은 알겠다고 했지만, 신혼여행을 다시 입에 담을 일은 없을 거다.
“아문. 오늘 고마웠어.”
표정을 갈무리한 케이든이 어설프게 말을 돌렸다.
“내가 선배 옆을 제대로 빛내 주긴 했죠.”
“엠마가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을 때, 오찬에 초대해 달라고 나서 준 것도 고마워.”
“그게 고마운 일인가?”
아사드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사실…… 나도 엠마를 한 번 더 보고 싶었어. 그래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거절하려고 했어. 그런데 아사드, 아니, 아문 네가 함께 가자고 해 줬잖아. 그 덕에 나도 엠마한테 답을 줄 수 있었던 거야.”
“…….”
“정말 고마워.”
무사히 말을 끝맺은 케이든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라일락 향기가 코를 찌르는 후원을 벗어나면, 저와 아사드는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될 거다. 아사드가 스스로를 후배라 지칭하고 있을 때, 그가 좋아하기에 더 어려운 황태자님이 아닐 때…… 감사를 전해 두고 싶었다.
“난 또 뭐라고. 그런 걸로 고마워할 필요 없어요. 진짜 고마운 일이 생겼을 땐 민망해서 어쩌려고 그래요?”
“지금보다 더 고마워하면 되지…….”
“앞으로 고마울 일 많이 만들어야겠네.”
“아냐.”
“아니긴. ……뭐, 그만 숙소로 돌아갈까요? 일단 쉬고, 이제 뭘 할지 생각하자고요. 그대로 자는 건 안 돼요. 나랑 놀아 줘야지.”
제가 아사드와 어떤 놀이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케이든은 아사드의 제안에 순순히 긍정했다. 일단은, 아사드의 전신을 훑어 대는 끈덕진 시선들 속에서 그를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아사드가 남들의 시선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엠마에게 음흉한 시선을 보냈다는 남자를 언짢아하던 것처럼, 남의 일에는 눈치가 빠르면서 자기 자신은 챙기질 못했다.
하지만 아사드의 눈치가 어떻든 상관없었다. 케이든은 할 수만 있다면 아사드에게 닿는 꺼림칙한 시선을 모조리 대신 받아 내 주고 싶었다. 하나 그런 능력이 없으니 자리를 뜨는 수밖에.
“자.”
아사드는 케이든을 향해 대뜸 손을 뻗었다. 평소처럼 기다려 주지 않고, 그는 순식간에 케이든의 손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케이든이 놀랄 새도 없었다.
“길 잃어버릴까 봐.”
“…….”
“나는 모르는 곳이잖아요. 마법사들의 저택처럼 길이 복잡하기까지 하고. 사람이 많아서 정신도 없어요.”
케이든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으며 아사드는 말했다.
길은 고작 두 갈래로 벌어져 있었다. 꽃을 전해 줬던 아이들보다 더 어린 애들도 이 후원에선 길을 잃지 않으리라. 하지만 케이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먼저 발을 옮겼다.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아사드를 이끌고서였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걸음이 빠른 아사드가 아닌 척 케이든과 속도를 맞췄다.
햇살을 머금은 바람 속에 꽃잎이 섞여 들고,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단내가 사방에 퍼졌다. 흰 눈을 닮은 꽃잎을 눈에 담는 아사드가 즐거워 보였다. 깍지를 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여기가…… 선배가 일하던 곳이라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아니, 궁금한 건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던 아사드가 느릿하게 말을 이어 갔다. 색이 다른 꽃잎들이 그의 머리카락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케이든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뭘 하며 살았는지 알고 싶은가 봐. 아마도요.”
“……나는, 저택의 말들을 돌봤어.”
머뭇대던 케이든이 짧은 답을 내놨다.
아사드라면 제가 이곳에서 하던 일이 뭔지 이미 파악했을 거다. 아사드가 아주 많은 보고를 전해 받는다고, 아문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제가 헬리오에 가기 직전에 했던 일 정도야 알기 싫어도 알게 됐을 거다. 억지로 들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뭘 하며 살았는지 알고 싶다는 말엔, 더 세밀한 내용을 원한다는 뜻이 담겨 있으리라. 저택의 말을 돌봤다는 싱거운 답을 원한 건 아니겠지 싶었다. 하지만 아사드가 원하는 답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을 짧게 얼버무리게 됐다.
어디 내보이기 창피하고 부끄러운 인간. 케이든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했다.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하지도 않았다.
하나 자신을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가치가 없다고 규정하면서도 그를 지금까지 먹고살게 해 준 일을, 해 온 노동을 부끄러워한 적은 없었다. 저라는 인간의 가치는 오직 일할 때만 반짝였으니까. 그리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것이 아주 찰나의 반짝임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도, 아사드의 앞에선 어쩐지 제가 해 왔던 일마저 저처럼 부끄럽고 숨겨야 할 것으로 느껴졌다. 마구간에서 일했다는 말 한마디를 내뱉는 데에만 속으로 몇 번을 머뭇댔는지 몰랐다.
케이든은 자신이 아사드의 발끝에도 가 닿지 못할 사람이란 걸 이미 잘 알았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부끄러움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사랑, 그 낯선 감정이 섞여 들면서 달라졌다.
케이든은 제 은인과도 같은 이 저택에서의 시간까지도 아사드에게 숨기려고 하고 있었다. 정말 숨기고 싶은 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그리고 케이든은 불안을 느꼈다. 제 과거에 호기심을 보이는 아사드에게, 불안을 느꼈다.
루아나에 자리한 저택에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를 다 알고 나면 더 이전의 시간까지 궁금해하게 될지도 몰랐다. 백작의 농장에선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더 자세한 이야길 알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그래선 안 돼.’
누가 봐도 어색해 보이기만 할 낯을 하고 케이든은 억지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