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53)화 (5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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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실을 나선 두 사람은 아사드의 뜻에 따라 근처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사를 끝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땐, 하늘에서 색이 사라진 완전한 밤이었다.

아사드는 옷방에 짐을 정리해 두겠다는 관리인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케이든의 새 옷이 든 상자를 순순히 관리인에게 넘겨줬다. 본인이 의상실에 입고 갔던 옷을 담은 상자 역시 그대로 넘겼다.

순식간에 손이 자유로워진 아사드는 계단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케이든 앞에 불쑥 제 손을 내밀었다.

“잡으세요, 선배.”

“……나 혼자 올라갈 수 있어.”

그렇게 답하는 케이든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정말 함께 일하는 동료라도 된 것처럼 구는 아사드와 눈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방긋방긋 웃는 그가 꼭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이상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말 그대로, 없던 후배가 생긴 것만 같았다.

“내가 혼자 올라가지 못하는 걸로 하죠.”

“…….”

“선배가 날 붙잡아 줘야 계단을 오를 수 있는 거지.”

더 기다릴 생각은 없다는 듯 아사드는 케이든의 손을 낚아챘다. 눈 색도, 말투도 본래의 아사드와는 다르지만…… 손의 온도만은 여전했다. 그는 헬리오의 한낮처럼 뜨거웠다.

케이든은 평소보다 느린 아사드의 걸음을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진득하게 깔린 푸른 어둠 사이로 마법석의 불빛이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오고 가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하지만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

제가 몸을 누일 침실을 앞에 두고 케이든은 멈춰 섰다. 저택의 고용인들과 관리인이 뒤따라오지 않은 걸 확인한 후, 아사드에게 짧은 감사와 밤 인사를 건넸다. 이전처럼 경어를 쓰게 되자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 아사드는 케이든을 위해 문을 열어 줬다. 케이든은 그런 아사드의 친절에 다시금 고마움을 느꼈다. 하나 그가 느낀 편안함과 감사함 모두, 금세 금이 가 버렸다. 당연하다는 듯 저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선 아사드 때문이었다.

“북부는 해가 너무 짧단 말이지.”

침실의 불을 켜며 아사드는 말했다. 마법석이 내뿜은 하얀빛이 순식간에 침실을 환히 밝혔다.

“케이든, 아까 물어보지 못한 게 있는데…….”

문을 닫은 아사드가 케이든과 거리를 좁혔다. 의상실에서처럼 슬쩍 두 팔을 벌리며 물음 하나를 건넸다.

“어때? 신사 같아?”

“네?”

“옆에 끼고 있어도 쪽팔리지 않을 것 같냐고 물은 거야.”

“충분히 신사 같으십니다. 황태자님을 창피하다고 여길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전하가 옆에 두기 과분한 파트너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몰라도…….”

쪽팔리다니. 그 말도 안 되는 표현을 부정하며 케이든은 황급히 답을 내놨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북부 복식이 정말 잘 어울리세요. 더 좋은 옷을 사 드리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돕니다.”

진심이었다. 케이든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정도밖에 해 주질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제가 돈이 많았어도 제국의 황태자인 아사드가 만족할 만한 제대로 된 선물은 주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당신이 아니라 내가 사는 게 맞는데.”

한결 침착해진 케이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사드는 중얼거렸다. 표정 한구석이 어딘가 뚱해진 채였다.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그랬다.

“선배가…… 상단에 새로 들어온 후배에게 사 주는 거였잖아요.”

민망하기 그지없는 선배 소리를 케이든은 간신히 입에 담았다. 말재주도 없는 주제에 어색한 제국어로 뭐라고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단, 이런 식으로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아사드가 제 답변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한결 밝아져 있었다.

“선후배 놀이에 제법 익숙해졌나 봐? 더 연습할 필요도 없겠어.”

아사드가 케이든과의 거리를 한 번 더 좁혔다. 곧장 말이 이어졌다.

“흠. 하나뿐인 선배에게 이런 선물을 받아 놓고, 모른 척 입 닦을 순 없는데. 후배는 선배에게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지?”

아사드는 물었다. 속 모를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듯했다.

“후배는, 보답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됩니다.”

후배를 가져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보통은 그러지 않을까 싶었다. 저보다 어린 친구에게 보답이니 뭐니 하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불편할 게 분명했다.

“아니. 얻어먹기만 하면 안 되지.”

“얻어먹기만 해도 되는데요…….”

너무 가까워진 거리감이 부담스러워, 케이든은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안 돼. 무슨 일이든 시켜. 부려 먹어.”

벌어졌던 반걸음만큼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다시 좁혀졌다. 금세 서로의 숨이 얽힐 거리였다.

너무 가깝다.

케이든은 괜히 시선을 이리저리로 돌렸다. 아사드의 목울대를 봤다가 그의 어깨 위로 눈길을 돌리기도, 반짝이는 두 눈을 훔쳐보다가는 턱 아래로 시선을 내리기도 했다.

도통 눈 둘 곳을 찾기 어려웠다. 이후에 이어질 일이 어느 정도 예상이 가서 긴장하게 된 탓이었다.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지면…… 입을 맞추곤 했으니까.

아사드와 입을 맞추는 일이 잦아졌다. 아사드의 희락기가 지나간 뒤로 불현듯 시작된 입맞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일단은, 공부라는 명목 아래에서였다.

두 사람은 침실에서, 응접실에서 입을 맞췄다.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발코니나 정원에서도 입술을 맞대곤 했다. 눈이 마주쳐서, 어쩌다 손이 스쳐서,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 이유도 다양했다.

〈당신이 내게 입 맞추는 법을 알려 줬잖아. 내 선생이 되어 주겠다며. 그렇다면 끝까지 책임져 줘야지. 가르침도 주고, 복습도 시켜 주고, 과제도 던져 줘야 할 것 아냐.〉

케이든은 아사드가 제게 입 맞추는 이유를 알았다. 그에게 전해 들었던 말 덕분이었다.

이것저것 묻고 답하다가 별안간 입을 맞추게 되는 일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아사드에겐 그저 수업이고 복습일 뿐이었다. 저는 그저, 아사드를 돕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갈 길이 머니 부족한 제자를 내치면 안 된다고, 아사드는 일전에 케이든에게 말했었다. 자신이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품으라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사드가 갈 길이 먼 사람은 아니었다. 부족하다는 말과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진짜 부족한 사람은 저였다. 더는 아사드에게 가르칠 게 없었으니까.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아사드는 금세 입맞춤에 능숙해졌다. 여전히 어설픈 구석이 있는 저와는 달랐다.

능력이 부족한 선생이 그 밑에 잘난 제자를 두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을 거다. 그러나 보통은, 결국 제자가 선생을 뒤로하고 독립을 하지 않는가. 새로운 지도자를 찾아 떠날 수도 있었다. 하나 아사드는 새로운 선생님을 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일까. 아사드와 입을 맞추는 순간마다 불쑥 찾아오는 의문을 케이든은 오래도록 곱씹어 봐야 했다.

그러다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됐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눈에서 때때로 정욕을 읽어 냈다. 그의 쨍한 금빛 눈동자 속에서 자글거리는 열기를 마주할 때면, 한 번도 발 들여 본 적 없는 사막 한가운데에 떨어진 듯한 아득한 기분을 느끼게 됐다.

가르쳐 달라는 말은 그저 핑계일지도 몰랐다. 타인과 입을 맞추는 일이 기분 좋아서, 자꾸만 몸을 붙여 오고 입을 맞대 오는 거라면……. 그런 거라면 어떨까.

떠날 날을 받아 둔 배우자와 희락기라는 특수한 이유도 없이 성적인 접촉을 나누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니 배움이란 다른 이유를 대는 거다.

희락기 이후로 아사드와 몸을 섞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모든 건 아사드가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거다. 케이든은 아사드를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원하는 건 다, 그게 뭐든 하게 해 주겠노라 마음을 먹었다.

방향을 잘못 잡은 아사드의 욕망이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혼인한 사람은 오직 자신의 배우자만을 바라봐야 하는 게 헬리오의 법도라면, 아사드가 저 아닌 누구와 그런 욕망을 나누겠는가.

아사드는 자신이 원하는 이를 위험에 빠트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사소한 욕구는 제게 푸는 게 맞았다. 일단은 그의 신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자에게 말이다.

〈몸을 섞는 일엔 애정이 필요하지 않아.〉

도련님은, 알렉스는 제게 누누이 말했었다. 고상하고 연약한 약혼자에게는 맘껏 욕망을 풀 수 없으니 너 같은 것과 배를 맞추는 거라고 그랬다.

〈너는 흠집이 가도 괜찮으니까.〉

그래. 나는 흠집이 나도 괜찮으니까. 얌전히 대용품 노릇이나 하면 됐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아껴 줬으면 좋겠다. 그런 간지러운 소망을 품을 생각은 없었다.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싶었다.

그렇구나. 케이든은 자신의 불행을 그 짧은 한 마디로 무던히 넘겨 왔다. 그렇구나. 그래, 나는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거구나. 그게 맞는구나.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보면 쏟아지던 눈물도, 심장께를 쑤시던 분노도 금세 메마르게 됐다.

하지만 아사드는 알렉스와 달랐다.

아사드는 저를 아프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희락기 땐, 잠시나마 사랑받는다는 착각까지 느꼈을 정도였다.

거기다 아사드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가. 그래서 괜찮았다. 모든 게 괜찮게만 느껴졌다.

아사드는 미래의 배우자를 위해 정절을 지켜 왔던 알파였다. 자신의 첫 경험을 가져갔으니 스승이 되어 줘야겠다던 그의 말처럼, 제가 책임을 져야 했다. 이 몸이라도 쓸모가 있다면 말이다.

“무슨 생각 해?”

손끝으로 케이든의 턱을 들어 올리며 아사드는 물었다. 미간이 찌푸려진 걸 보아, 어딘가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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