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께선 옷을, 말 그대로 갖춰 입고만 나왔다. 받은 옷을 순서만 지켜 대충 걸친 수준이었다. 재단사님의 손길은 조금도 느껴지질 않았다. 따라 들어가긴 했지만, 그저 옷만 건넨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잔소리는 함께였겠지만.
웃기게도, 남자의 모습이 꼴불견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의 잘난 얼굴과 몸뚱이 덕분이었다.
아문은 술이나 퍼마시고 바닥을 뒹굴다 늦은 아침을 맞은 한량이 아니라, 철학적 고뇌에 빠져 밤새 괴로움을 앓은 청년처럼 보였다. 옷을 저따위로 입었는데도 말이다.
대단하긴 했다. 평소 타인의 외모에 큰 관심이 없는 라이나마저 헬리오 남자를 보고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저런 사람에게 옷을 맞춰 주면 참 보람차겠다 싶었다.
재단사 밀로아 역시 환의를 마친 손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사람만을 위해 준비된 맞춤옷이 아니기에 일부러 넉넉한 기장으로 만들어 뒀었다. 짧은 걸 늘리는 것보단 긴 걸 줄이는 쪽이 편하니까.
의상실에서 일한 지난 1년간, 라이나는 위아래의 단을 줄이는 수선 없이 바로 옷을 포장해 손님에게 넘기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저도 재단사님도 할 일이 없을 듯했다. 옷이, 저 헬리오 남자에게 너무 잘 맞았으니 말이다. 저 팔뚝이며 가슴팍을 제일 먼저 감당해야 하는 셔츠는 조금…… 터질 것 같았지만.
「잘 어울리시네. 밝은 데서 보니 더 그래.」
남자에게 다가간 밀로아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거울도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모습이 자신만만했다.
「고칠 것도 없어 보이고.」
「시간 쓸 일 없어 좋네요.」
밀로아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남자는 가볍게 호응했다.
밀로아는 눈앞의 어린놈이 자신의 일행에게로 곧장 걸음을 옮길 거라고 여겼다. 하나 밀로아의 예상과 달리, 남자는 그의 선배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옷을 끌어안은 남자를 향해 보기 좋은 웃음을 남긴 뒤였다.
헬리오 남자는 밀로아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그는 웃고 있었다. 하나 제 선배를 볼 때와는 달리 조금은 가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전보다 목소리를 낮춘 남자가 밀로아에게 물음 하나를 건넸다.
「빚이 있습니까?」
자신이 뭘 들은 건가, 밀로아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되묻기도 전에 몇 가지 물음이 더 날아왔다.
「치정 관계는?」
「…….」
「단순한 원한은요?」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네 싶었다.
「빚 없어. 부인도 애인도 병 걸려 죽은 지 오래야. 내 조수가 나한테 가졌을 사소한 억울함 정도를 빼면, 누구에게 원한 산 일도 없지.」
「그러셨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그딴 걸 물은 의도가 뭔가?」
미간을 찌푸린 밀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늘 없이 환해만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과 달리, 헬리오 남자에게선 묘하게 어두운 느낌이 났다. 그 낯만이 차가운 듯한 그의 선배와는 정반대였다. 밀로아는 제 눈앞의 어린놈이 괜히 저런 물음을 건넨 것 같지 않아 찜찜했다.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의상실에 돈 써 줄 손님은 최대한 좋게 보려고 하는 편이야. 왜 그랬는지 말만 해 주면 괜찮아.」
「의상실 주위를 돌고 있는 벌레가…… 신경에 거슬려서요.」
「벌레?」
뜻밖의 이야기를 받아든 밀로아가 되물었다.
「그 벌레가 저와 선배에게 붙은 것인지, 이 의상실에 붙은 건지. 그게 궁금했어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몇 가지 여쭤보게 됐습니다.」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 남자는 가볍게 답했다.
벌레라. 떫은 얼굴을 한 밀로아가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봤다. 남자가 말하는 벌레가 진짜 벌레가 아니란 것 정도야 잘 알았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 봐도 의심이 가는 곳은 없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라이나 역시 빚이나 치정, 원한 관계가 전무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라이나를 당분간 혼자 두지 말아야겠군 싶었다. 날이 잘 갈아진 가위도 하나 선물해 주고. 라이나에게 스토커 새끼가 붙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도 물어봐야겠네. 그 벌레가 이 의상실에 붙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자네한테 붙었다고 생각하는지. 답해 봐.」
「아. 저한테 붙은 건 아니고, 제 선배에게 붙은 벌레예요.」
남자는 이전처럼 가볍게 대답했다. 다만, 이전과 달리 그 가벼움 한구석에 툭 불거져 나온 짜증을 미처 숨기지 못한 상태였다.
밀로아는 이 어린 남자의 선배라는 이를 향해 슬쩍 시선을 던져 봤다. 잘생긴 얼굴 위에 그늘이 내려앉아 있는 게 고생 꽤 했을 인상이다 싶었는데, 제 예상이 맞아떨어진 모양이었다.
「걱정되겠네.」
「아뇨. 그깟 벌레 정도야 보이는 족족 잡아들이면 됩니다. 일단 잡으면, 알아서 입을 벌려 주겠죠. 뭐, 벌레들의 요람에 불부터 지르는 게 먼저겠지만요.」
남자는 다시 한번 웃었다.
사람을 잡아 족치겠다는 말을 산뜻하게도 한다. 이 낯선 손님이 어두운 일을 하는 것 역시 제 예상대로인가 싶었다. 어린 알파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오메가, 혹은 베타를 보호하는 건지, 질질 끌고 다니는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밀로아는 남자에게 대꾸하는 대신 긍정의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을 마지막으로, 밀로아와 남자 사이를 오갔던 짤막한 대화가 끝을 맺게 됐다.
곧장 몸을 돌린 남자는 그의 선배에게 향했다. 그는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는 다른 남자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어때요?”
그리고 두 팔을 벌려 가며 제 선배에게 자신의 정장 차림을 뽐냈다.
“……잘 어울려. 정말 예쁘다.”
두 사람은 제국어로 저들끼리 말을 나눴다. 제가 말을 알아듣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선배라는 남자는 그의 뻔뻔한 후배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가에 부드럽게 번져 있는 미소가 그를 두려움에 빠진 사람처럼 느껴지게 하진 않았다. 남자는, 기뻐 보였다.
“얼굴은 안 보고.”
“……볼게.”
“이거, 이제 보이죠?”
일행이 똑바로 눈을 맞추기 무섭게, 헬리오 남자가 자신의 셔츠 목깃 아래를 툭툭 쳤다. 그의 손에는 크라바트 천이 들려 있었다. 탈의실에서 밀로아가 전해 줬던 거였다. 결국 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목에 둘러 묶는 거란 건 알아요. 그런데 내가 이런 옷을 입어 본 적이 있어야지. 선배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그의 선배보다는 의상실의 직원인 라이나가 나서야 할 일이었다. 하나 라이나는 나설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제국어를 아예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다른 남자의 옷을 이미 상자에 넣어 뒀으면서, 눈치껏 일이 남은 척을 했다.
밀로아 또한 입을 다물고 눈을 흐리는 쪽을 택했다. 제가 나서는 순간, 저 어린 게 뭣 씹은 얼굴을 할 것이 뻔했다. 돈을 내 줄 손님의 심기를 굳이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나도 써 본 적 없는데……. 정말이야. 몇 번 없어.”
크라바트를 건네받은 남자는 누가 봐도 긴장한 낯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없어요.”
헬리오 남자를 바라보던 밀로아가 속으로 혀를 찼다. 너무 사기꾼처럼 보여서 그랬다.
우물쭈물하던 선배께선 결국 제 후배에게 조심히 다가갔다. 남자는 그보다 키가 큰 그의 후배의 목덜미에 손을 뻗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두 손 아래에서, 헤프게 벌어져 있던 목깃이 얌전히 모이고 그 위로 천이 둘렸다. 사락사락, 곧은 손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가 고요한 의상실에 울려 퍼졌다.
“다 됐어.”
심각한 표정으로 크라바트를 오래도록 만지작대던 남자가 일을 마칠 때가 되니 재빨라졌다. 그는 후다닥 헬리오 남자와 다시 거리를 벌렸다.
제 후배가 내린 임무를 완수한 남자는 멋쩍게 웃어 보였다. 슬쩍 다른 남자의 눈치를 보긴 했으나, 본인의 작업물에 만족스러움을 느끼는 기색이었다.
무심코 대단한 후배님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밀로아가 가분하게 소리 내 웃었다. 그 후배님께서 다소 과하게 귀여운 꼴을 하고 있어서 그랬다. 라이나 역시 입을 벌린 채 남자의 목깃에 둘린 크라바트를 바라봤다. 기겁해선 말이다.
화려한 인상을 가진 미남자를 저쪽의 선배께선 말 그대로, 어린애처럼 보는 모양이었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한 어린 신사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귀여운 리본 모양으로 크라바트의 매듭을 지어 놨으니 말이다.
물론, 남자의 얼굴 한편에 아직 앳된 기운이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 있긴 했다. 저 역시 그를 그의 선배보다 어리게 보지 않았는가. 그 큰 체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저 헬리오 남자는 키도 크고 덩치도 큰 성인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리본 매듭을 선물하는 선배란 사람도 참 대단하다 싶었다.
‘한 놈이 한 놈을 일방적으로 질질 끌고 다니는 경우는 아니었군. 그럼, 애인…… 사이인가?’
밀로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연인이 아니라면, 그건 그것대로 이상할 것 같았다.
목에 깜찍한 리본을 달게 된 남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볍게 살폈다. 정작 옷을 입고 나왔을 땐 그쪽엔 눈길도 안 줬으면서 말이다.
의외로, 남자는 제 선배인지 애인인지가 가진 기묘한 미감에 만족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즐겁다는 듯 싱글싱글 웃기까지 했다.
“내일도 도와줄 거죠? 결혼식 가기 전에.”
“응. 묶어 줄게.”
제 후배에게 또 다른 청을 받은 남자가 순순히 답했다. 귀여운 리본 매듭을 완성하면서 이상한 자신감이 붙은 듯했다. 의상실에 들어설 때만 해도 어둡기만 했던 얼굴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라이나는 밀로아에게 눈빛으로 무언의 말을 전해 왔다. 남의 결혼식에 저 꼴로 참석하는 게 맞느냐 묻는 것만 같았다. 그런 라이나에게, 밀로아는 대충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옷을 팔았으면 됐다. 애초에 저 헬리오 남자의 외견을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누가, 저 얼굴 아래로 보일 크라바트 매듭 따위에 눈길을 주겠는가. 남자의 화려한 미모며 뜨겁다 못해 따가운 분위기에 완전히 파묻히게 될 거다.
‘금실로 자수를 새긴 크라바트나 하나 더 얹어 줘야겠군.’
하하. 소리 내 웃은 밀로아가 늘어선 천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