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49)화 (49/97)

짧은 침묵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무어라 답을 줘야 할지 모를 상황을 앞에 두고 케이든은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왜 안색이 나빠지지? 가출한 것처럼 여겨질까 봐 걱정돼서 그래?”

“…….”

“그럴 필요 없어. 해야 할 일 다 끝내 놓고, 편지까지 써 두고 왔으니까. 필요한 말만 잘 골라서 적어 놨다고.”

줄여 말하면, 짧은 편지 한 장만 달랑 남겨 두고 몰래 나왔다는 소리였다.

정작 일을 친 아사드는 지극히 태평해 보였다. 그런 아사드에게 제가 무슨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이야기를 잘 마치고, 편지까지 남겨 두고 왔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문이 막힌 케이든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러나 발치에 걱정이 쌓이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케이든의 낯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그게 뭐든 걱정하지 마. 언어 문제도 그래. 내가 왕국어를 못하는 게 걱정된다면, 당장 접어. 잘 배워 뒀으니까.”

“왕국어를요?”

“그래. 당신이 제국어를 배우듯 나도 왕국어를 배운 거지.”

아사드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출발을 알리고 싶었는지 짐마차가 크게 덜컹댔다. 마차 안팎이 거칠게 흔들렸다. 하지만 진동을 느낀 건 한순간이었을 뿐이었다. 이내 이전과 같은 평온을 되찾았다. 짐마차에 걸려 있던 마법 덕분이었다.

마차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고요한 정적이 이어졌다. 하지만 소리 없이도 시끄러운 게 있었다. 케이든의 얼굴에 고정된 아사드의 빤한 시선이었다.

“이제 우리는, 상단에서 함께 일하는 선후배 사이가 되어야 하는 건가?”

“……아문과는 그렇게 서로를 대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쭈뼛대던 케이든이 순순히 답을 내줬다.

“당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내가 후배 노릇을 해야겠군.”

“아뇨, 선배 하셔도 됩니다.”

저를 윗사람으로 대하는 아사드라니. 상상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선배나 후배 따위의 역할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사드가 짐마차 안으로 들어서게 되면서는 아예 의미가 사라졌다. 아문이 아닌 아사드와 함께 숙소 밖을 나설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왜 그렇게 얼빠진 얼굴을 하는지 모르겠네. 어색하게 굴지 마. 그리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 누가 나를 당신과 함께 일하는 동료라고 생각하겠어.”

다리를 꼰 아사드가 케이든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안 그래요, 선배?”

그림처럼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 위로 새침한 웃음이 떠올랐다.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그저 아사드를 따라 날연히 웃기만 했다.

‘내가…… 아문이 아니라 아사드와 함께 왕국에 가는구나.’

그 사실이 점점 실감이 나 그랬다.

폭탄 같은 걱정만 한가득 끌어안게 된 여행의 시작이었다.

* * *

헬리오의 황제가 비호하는 북부 왕국 엘바의 수도 루아나는 겨울이 길고 해가 짧은 차가운 도시였다. 해가 긴 아크와는 정반대였다.

이른 노을의 색감 역시 다른 건 마찬가지였다. 그게 무엇이건 대개 눈이 시릴 정도로 색이 강렬한 아크와는 달리, 루아나의 노을은 물을 섞은 듯 조금 흐릿한 주홍색과 분홍색이었다. 바로 지금의 하늘처럼 말이다.

케이든과 아사드는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에 운 좋게 루아나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예정보다 이른 도착이었다.

마차는 수도 외곽에 자리한 고색창연한 고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정체를 감춘 헬리오 사람들이 머물 숙소였다.

엘바에 갈 수 있게 됐다는 케이든의 편지에 답하며, 엠마는 결혼식이 열릴 저택에서 머무르라고 다시 한번 말을 전했었다.

하나 케이든은 그런 엠마의 호의를 거절해야만 했다. 이미 숙소를 구해 뒀다고 편지를 썼다. 때마침 엘바에 일이 생긴 상단 사람들과 함께 처리해야 할 게 있다는 핑계를 대면서였다. 호위들의 보호 아래에서 밤을 보내야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케이든의 시종 노릇을 독점한다는 약속을 받아 갔던 아문이 예약한 숙소가, 바로 이 고저택이었다.

케이든은 무게감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저택에 쭈뼛대며 들어섰다. 1층엔 주점이, 2층엔 여관이 있는 숙소는 아니어도 이보단 무난한 숙소에 머무르게 될 거라 여겼었기에 조금은 당혹스러운 기분이 됐다.

정신이 없었다. 저택을 소개해 주는 관리인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이곳의 주인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한 숙소로 저택의 용도를 바꿨다는 이야기 정도만 간신히 알아들었다.

‘아문은…… 도대체 언제부터, 아사드와 자리를 바꾸기로 했던 걸까.’

이렇게 좋은 숙소를 미리 잡아 둔 걸 보면, 그 사실이 제게만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함께 온 호위들도 아사드와 동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저보다 먼저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아…….」

저택의 높은 층고를 슬쩍 올려다보던 케이든이 부산한 소리가 나는 옆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사드가 짐을 옮기고 있었다. 그는 꽤 무거워 보이는 짐가방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들었다. 케이든의 손에 들린 것을 빼앗아 들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한테 맡기기 싫은 짐이라.”

“하지만…….”

“내가 후배 노릇 하려고 따라온 걸 잊었어요?”

그리고 케이든은, 귓가에 닿은 아사드의 속삭임에 한 번 더 깜짝 놀랐다.

당황한 건 케이든뿐만이 아니었다. 저택 바깥을 살펴보느라 한발 늦게 안으로 발을 들인 호위들 역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남은 짐을 챙기던 저택의 관리인과 몇몇 사용인만이, 저 먼 헬리오에서 왔다는 상단 사람들을 의아하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관리인에게 침실을 안내받은 뒤에도 케이든의 곤혹은 이어졌다. 아사드는 자신의 방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도 않고 케이든의 침실에 먼저 발을 들였다. 그가 들고 있던 짐가방과 함께였다.

아사드는 뒤를 따라온 저택의 사용인들을 모두 물렸다. 그는 사용인들을 대신해 케이든의 짐을 풀기 시작했다. 아문에게도 맡기지 않았을 일을 하려 드는 아사드를 보며, 케이든은 굳어 버렸다.

“그러지 마세요. 제가 하면 될 일입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됐어.”

용기를 내 말을 늘어놔 봤지만 소용없었다.

잠시 몸을 숙였던 아사드는 곧, 부유한 북부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옷 한 벌을 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아뒀다. 아사드가 들고 온 짐가방에서 끄집어낸 거였다.

목깃부터 바짓단까지, 약간의 구김도 가지 않은 옷은 꾸미는 데에 무지렁이인 케이든도 그 가치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고급 정장이었다.

“이게…….”

“뭐냐고?”

“…….”

“당신 옷. 친구 혼인식 가야 하잖아.”

둘만 남자 아사드의 말투가 다시 이전처럼 변했다. 너무나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드는 다행스러움과는 별개로, 케이든은 다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됐다. 제 몸값보다 몇백 배는 더 비쌀 것 같은 저 옷이 문제였다.

당신 옷이라니…… 아문이 준비해 준 걸까?

하나 아문은 제게 적당한 옷을 준비하겠노라 말을 전해 줬었다. 어쩌다 저런, 적당함과는 거리가 먼 옷이 툭 튀어나오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눈치를 살폈다. 아사드는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만 제가 답을 하길, 어떤 반응을 보여 주길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 시선이 아주 빤한 걸 보면 말이다.

“옷이…… 정말 예쁩니다. 아름다운 파티의 초대장을 쥔 신사분들이 입는 옷처럼 멋있어요.”

우물쭈물하던 케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럼, 예쁘고 멋지지.”

“그런데…….”

그런데? 아사드의 눈썹 한쪽이 삐딱하게 올라가려는 게 보였다. 케이든은 그가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용기를 쥐어짜 내 말을 이어 갔다.

“엠마는…… 제가 작은 상단에서 일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잘 알고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옷을 입은 걸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느릿하게 흐르려던 케이든의 말이 점점 더 빨라지다가 황급히 마무리됐다. 숨이 차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케이든. 당신이 나와 배우자의 연을 맺은 지, 이제 7개월 정도가 됐던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은 정도가 아니지. 7개월이 확실해. 7개월이면, 많은 게 변할 시간이지. 당신이 일하던 쥐구멍만 한 상단이 나라는 새로운 인물을 들이고, 운 좋게 황실과 거래를 트게 됐을지도 모를 세월이야.”

“…….”

“쥐구멍을 벗어난 쥐가, 덩치 큰 고양이로 변했어. 잘된 일이지?”

억지였다.

말을 마친 아사드가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상의를 집어 들었다. 천의 구김을 최소한으로 줄이겠다는 듯 단단한 옷걸이 위에 셔츠며 조끼, 정장 재킷까지 차곡차곡 걸쳐 둔 상태였다.

아사드는 케이든의 몸 위에 옷을 대어 봤다. 너무 걱정 어린 얼굴을 한 게 흠이긴 하지만, 대충 눈으로만 확인하기에도 꽤 괜찮아 보였다.

“잘 어울려.”

“…….”

“하지만, 억지로 입힐 생각은 없어.”

살짝 고개 숙인 아사드가 케이든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그리고 이내, 물음 하나를 덧붙였다.

“원래 입으려던 건 뭐였어? 우리가 몸담은 상단이 여태 쥐구멍을 탈출하지 못했다는 전제하에 말이야.”

“저는…… 조금 더 평범한 것을 생각했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아문이었다면, 당신은 어떤 식으로 말했을까. 옷을 새로 사자고 했으려나?”

아사드의 말을 들은 케이든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 마음을 읽은 듯한 질문에 놀란 거였다. 아사드도 그렇고 아문도 그렇고, 제 속내를 너무 쉽게 알아챘다. 어색하고 쑥스러웠다.

“네.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자세히 듣고 싶어.”

“…….”

“어딜 가서 새 옷을 사려고 했어?”

아사드는 웃었다. 왜인지, 물음을 건네는 얼굴이 너무 즐거워 보였다.

케이든은, 그 영문을 모를 아사드의 즐거움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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