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붙잡아 둬도, 나를 홀로 두고 도망가는 일이 또 생길까?”
“……네?”
“뭐, 도망가도 돼. 금방 잡으러 가면 되니까.”
그 뜻을 모를 아사드의 오묘한 말에 케이든은 무어라 항변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하나 아사드는 케이든의 사정을 봐주지 못했다. 그는 말을 이어 가는 대신, 케이든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아무래도, 첫 희락기의 잔열이 쉽게 가라앉지 않을 모양이었다. 희락기를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쯤 되니 조금은 탓을 해야 할 듯싶었다. 이런 정신 나간 짓을 본인의 의지로 멈추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또 한 번 울렁이기 시작하는 풍경을 등진 채로 아사드는 오래도록 케이든과 입술을 맞댔다. 달빛도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오직 제 신부만이 선명했다.
2부
6. 엠마의 결혼
케이든은 반가운 편지 한 통을 받게 됐다. 그의 고향인 북부의 왕국 엘바에서 온 것이었다. 제사장 밑에서 일하는 젊은 신관이 별궁으로 찾아와 케이든에게 직접 그 편지를 전달해 줬다.
편지의 발신인은, 케이든이 서먼 백작의 농장에서 일하던 시절 그와 가까웠던 유일한 동료이자 하나뿐인 친구인 엠마였다.
케이든에게 있어 엠마와의 인연은 참 소중하고도 신기한 것이었다. 여러 일이 있었음에도 끊길 듯 끊어지지 않았다. 신관을 통해서나마 그녀와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만 해도 그랬다. 그런 걸 보면…… 마치 엠마만이 주위에 사람이 없는 제게 허락된 유일한 존재 같기도 했다.
물론, 꽤 긴 시간 엠마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때도 있었다. 빚을 다 갚은 엠마가 서먼 백작의 농장을 나간 이후였다.
케이든은 엠마에게 편지를 부칠 수도, 그녀가 보낸 편지를 받을 수도 없었다. 휴일을 받아 밖을 나서지도 못했고 말이다.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명목하에 별안간 모든 게 금지된 탓이었다.
하지만 아주 우연한 기회에, 케이든은 엠마와 재회하게 됐다.
하루아침에 농장에서 쫓겨난 케이든은 은화 한 닢도 없어 내도록 노숙을 해야 했었다. 마을에 있는 의뢰 게시판을 따라다니며 목수들 밑에서 힘쓰는 일을 하기도 하고, 수확기를 맞은 농장이나 과수원에 가 익숙한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케이든이 엠마를 만난 건,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구해 보고자 수도에 당도했을 때였다. 서쪽 광장의 의뢰 게시판 앞을 찾았던 케이든은 그곳에서 엠마와 마주쳤다. 거짓말 같은 만남이었다.
엠마는 케이든을 바로 알아봤다.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밝아진 웃음과 함께, 그녀는 케이든을 와락 끌어안았었다. ‘저택의 마구간지기를 구합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던 종이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 버렸었다. 구인 광고였다.
케이든의 하나뿐인 친절이고 친구였던 엠마는 그의 은인이 됐다.
부유한 상단주의 저택에서 메이드 일을 하던 엠마는, 케이든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소개해 줬다. 방이 부족한 고용인 숙소 꼭대기에 억지로 케이든이 머물 곳을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돈을 아낄 수 있게 거처를 마련해 준 거다. 오래도록 잊지 못할 감사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상단주의 저택에서 고작 반년의 시간밖에 지내질 못했다. 사막에서 날아든 반려 신탁 때문이었다.
케이든은 자신이 헬리오의 황태자와 신탁으로 얽히게 됐다는 사실을 엠마에게 밝힐 수 없었다.
〈엠마 너를 다시 만나기 전에, 한동안 일을 도와 드렸던 고마운 분이 일자리를 제안해 주셨어. 정말 조그만…… 상단의 일이야.〉
대신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건네야 했다. 그 고마운 헬리오 사람이 꾸리게 된 상단 일을 돕기 위해, 사막 위에 선 제국의 땅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황실 측으로부터 권유받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한 거였다.
〈농장에서, 아니, 북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어서 그래?〉
놀란 엠마는 케이든에게 물었었다.
케이든은 엠마에게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내내 어색한 얼굴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수도는 너무 멀고 또 너무 더울 거라며 저를 걱정해 주는 엠마에게 솔직한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없어 미안함을 느꼈다.
〈케이든, 몸담을 상단의 주소를 알려 줘. 내가 편지할게! 다시 연락이 끊길 순 없잖아.〉
심각한 얼굴을 한 엠마는 케이든에게 말했었다.
주소 얘기에 당황한 케이든에게 도움을 준 게, 상단의 직원 역할을 해 주겠노라 저택을 찾아왔던 황실의 신관이었다. 바로 오늘, 케이든에게 엠마의 편지를 전해 준 그 신관.
케이든의 동료가 될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엠마에게 그의 가족이 운영하는 조그만 상단의 사무소 주소를 알려 줬다. 케이든이 연락도 닿지 않는 곳으로 별안간 사라져 버렸다는 불안함을 심는 것보단, 연락이 닿는 곳으로 떠나게 됐다는 안도를 주는 편이 나아서 그랬다.
신관은 자신의 거짓말이 들킬 거란 걱정은 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가족들에게 미리 말을 해 두면 될 일이라며 케이든을 안심시켰다. 황태자비의 신변이야, 황실이 알아서 정리해 줄 테고 말이다.
엠마가 수상함을 느낀 데도 별수 없었다. 어차피, 금전과 시간이 어지간히 여유로운 게 아닌 이상 왕국과 제국의 수도를 쉽게 오고 갈 수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엠마가 보낸 편지가 신관에게 먼저 가게 된 거였다. 번거로울 일을 떠맡아 준 신관에게 케이든은 큰 고마움을 느꼈다. 이번이 벌써 엠마의 두 번째 편지라,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케이든은 그의 손에 들렸던 편지를 거울 아래 있는 서랍 안에 조심히 넣었다. 그냥 편지가 아니라, 말린 꽃을 모아 묶은 자그마한 꽃다발이 동봉된 편지였다.
엠마가 결혼을 한다.
케이든이 잠시나마 일했던 저택의 새로운 소유주가, 상단의 후계자에서 이제는 상단의 주인 자리에 오른 이가, 엠마의 배우자가 된다고 했다. 차가운 인상을 가진 키가 큰 여자였다.
“…….”
조심히 서랍을 닫고, 케이든은 뒤를 돌았다. 여전히 너무 넓게만 느껴지는 침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선뜻 시선이 닿질 않았다.
케이든은 어디로도 발을 내딛지 못한 채 망설였다. 그러다 결국, 다시 뒤를 돌아 발코니로 향해 갔다.
어느 날 불쑥 들어서게 된 새로운 차양 아래에 케이든은 몸을 숨겼다. 푹신하고 커다란 쿠션에 등을 기대자 불안이 가라앉았다.
케이든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저렇게까지 구름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할 수 있다는 게 여전히 신기했다.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을 풍경이었다.
하나 마음의 평화까지 오래가지는 않았다.
‘어떻게 해야 엠마의 결혼식에 갈 수 있을까…….’
고민과 걱정이 케이든을 닦달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우리가, 언젠가 괜찮은 배우자감을 얻게 된다면 말이야.〉
〈응.〉
〈너, 꼭 내 결혼식에 와야 해. 나도 네 결혼식에 꼭 갈 테니까. 어, 친구 없는 사람들끼리 친구 열 명 몫을 하면서 축하해 주자고. 약속해 줄 거지?〉
〈……약속할게.〉
제 인생에 결혼식 같은 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케이든은 엠마에게 약속했었다. 그녀가 바라는 답을 들려줬다. 중요한 건, 자신의 결혼식이 아니라 엠마의 결혼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진 탓에 엠마가 아닌 제가 먼저 결혼이란 걸 하게 되긴 했다. 그렇지만, 축복받을 결혼은 아니었다. 올바른 결합조차 되질 못했다. 엠마가 이야기하던 낭만과 사랑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지기도 했다. 당연히, 제 혼인식에 엠마를 초대할 수도 없었다.
하나 엠마의 경우는 달랐다. 그녀의 결혼은 축복받아야 할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케이든은 자신이 엠마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네가 시간이 날지 걱정이야. 그래도 운 좋게 시간을 쓸 수 있다면, 돈 걱정은 하지 마. 네 이동비는 우리가 다 책임질게. 숙소도 마찬가지야. 2층에 있는 가장 좋은 손님방을 내어 줄 테니 원하는 만큼 머물러!
편지의 말미에 엠마는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 썼었다.
하지만 가장 큰 난관은…… 시간도 돈도 아니었다. 이 황궁에서 나갈 수 있는가. 그게 문제였다.
친구의 결혼식을 보러 엘바에 가고 싶다는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질 않았다.
자신이 귀한 황태자비는 아니어도 당장은 필요한 황태자비라는 걸 케이든은 알았다. 제국의 황태자비가 본래의 역할을 숨긴 채 먼 북부의 땅에 발을 들이는 건…… 너무 품이 많이 들 일이었다.
제가 원하건 원치 않건 시종과 호위가 여럿 따라붙을 거다. 이동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포털을 여러 번 타게 될 테니, 돈도 많이 들 거다. 상단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여야 하기에 여러 사람과 말도 맞춰야 했다. 변장 아닌 변장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고작 나 한 사람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들여 줄까?’
부탁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말은 꺼내 봐야겠지만, 그 말마저 비웃음을 사기만 할까 봐 조금 겁이 났다. 제 부탁이, 한심하다는 눈빛만 받다가 허공으로 흩어지게 될 것 같아 걱정됐다.
“…….”
불참에 관한 제 편지를 받아 들고 실망할 엠마의 얼굴이 훤히 그려졌다.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바로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케이든이 몸을 돌렸다. 기척 없이 다가온 방문자가 케이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문.”
“네, 아문입니다.”
“일찍 왔네. 내가 노크 소리를 못 들었나 봐.”
제 옆에 털썩 앉는 아문을 따라 고개를 내리며 케이든은 웃었다.
발코니에 들이닥친 아문을 보고 예전처럼 놀라진 않게 됐다. 그의 방문이 너무나 익숙해진 덕분이었다. 예전처럼 아문이 무섭게 느껴지지 않아 그렇기도 했다. 처음 아문을 만났던 날에 비하면 아주 대단한 발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