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44)화 (44/97)

몸을 섞는 건, 사랑 없이도 가능한 일이다. 아사드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멀리로는 왕국 놈들이, 가까이로는 제 친척 놈들이 저지른 일탈을 보고 또 들어 왔으니까.

정략혼을 맺은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없을지언정 자식을 보기 위해선 몸을 겹쳐야 했다. 그러다 몸정 정도는 들 수도 있겠지. 그게 사랑과 우정 너머의 전우애를, 동맹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고 말이다.

하나 아사드와 케이든의 관계는 그 어느 경우에도 속하지 않았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짧은 일탈을 위해 만난 사람도 평생을 이어 갈 동맹을 맺기 위해 만난 사람도 아니었다.

아사드는 신탁 때문에 억지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된, 그러나 언젠가 저를 떠나게 될 남자와 희락기를 함께 보냈다. 결국 황비가 되지 못할 남자와 희락기를 보냈다. 하물며 첫 희락기였다.

케이든을 희락기에 마주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놓고…… 충동에 휩쓸려 버렸다. 하나 아사드는 케이든을 창부 취급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확실히 해 두려 했다.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희락기를 함께 보내 줘서 고맙다고, 첫 희락기를 무사히 지날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계속해 말해 줄 요량이었다. 남들이 케이든을 쉽게 보지 못하게, 케이든 본인도 오해할 일이 없게, 사방에 제 뜻을 내보일 생각이었다.

아사드는 케이든과 자신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싶었다. 일단 한번 선을 넘은 이상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순 없다는 걸 알아서였다.

반쯤 눈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아사드는 케이든을 바라봤다. 아사드의 빤한 눈발을 마주한 남자가 눈을 돌릴 기회를 놓치고는 어색하게 시선을 맞춰 줬다.

그리고 아사드는 이런 충동을 느꼈다.

저 남자와 입을 맞추고 싶다.

……미쳤군. 스스로의 욕망에 불쾌함을 느끼며 아사드는 휙 시선을 돌렸다.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형질 놀음에 휘둘리고 있는 건가 싶어 머리가 아팠다.

하나 형질과 페로몬 탓만 할 순 없었다.

지금, 아사드는 케이든의 페로몬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아사드 본인의 페로몬 역시 완전히 갈무리된 상태였다. 아직도 케이든에게 징그럽게 들러붙어 있는 희락기 때의 페로몬을 제외하면 말이다. 페로몬은 다시, 완전한 아사드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아사드, 내 손자. 너는 다정한 아이지.〉

〈그래서, 나는 걱정이 든다. 태양의 후계자가 사랑이 많아 걱정돼. 나는 네가 사랑이 많은 게 싫구나. 그 저주가 너를 고꾸라지게 할까 우려가 된다. 네 외삼촌 자한처럼, 고귀함을 잃을까 두렵구나.〉

어릴 적, 병상에 누운 할아버지를 몰래 찾아갔다가 들었던 말들이 아사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후로도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반복해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날의 가르침은 유독 강렬한 모습으로 아사드의 마음속에 새겨졌다.

〈황제는, 인간을 초월해야 한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아야 해. 특히나 사랑을 의심해야 하지. 그것은, 고결한 태양을 타락시키기 위한 눈속임이니까.〉

물기 없이 바싹 마른 노인은 벌게진 눈을 하고 부드럽게 속삭였었다.

〈훌륭한 황제가 되기 위해선 그 삿된 감정을 멀리해야 한단다. 사랑에 눈길을 주지 말아라. 그렇다면 추락할 일도 없을 테니.〉

사랑. 그 말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입 안에 굴리기엔 너무나 썼다. 되뇌어 보는 것만으로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헛된 감정이 제 안에 피어났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제가 케이든을 과할 정도로 신경 쓰고 있는 건 맞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케이든이 안다면 이 침실을 뛰쳐나갈지도 모를 이상한 욕망에 사로잡혀 흔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얼 바라며 무엇에 휘둘리는 것인지 알 수 없어 입 안이 메말랐다.

아사드의 생각이 더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서로의 시선을 슬금슬금 피하려던 아사드와 케이든의 두 눈이, 다시 거짓말처럼 마주쳐 버린 탓이었다.

속으로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아사드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에 질식하고 싶지 않았다. 시답잖은 말 한마디라도 내놔야 했다.

“당신이 내…… 처음을…….”

“…….”

“내 처음을 가져갔잖아. 그걸, 영광으로 생각해.”

최악의 헛소리였다.

아니, 그냥 최악도 아니었다. 케이든의 안색이 하얗다 못해 퍼렇게 변해 가는 걸 보아하니,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헛소리를 해 버린 모양이었다.

왜 그딴 말을 했을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아 내며 아사드는 이마를 짚었다.

〈왕국 오메가들은 경험 없는 알파를 선호하잖아.〉

그래. 일부러 제 앞에 서서, 왕국의 오메가들은 경험 없는 순진한 알파를 좋아한다며 속닥거리던 쌍둥이의 얘기가 머릿속에 남아 저딴 개소리를 지껄이게 된 게 분명했다. 깨끗한 알파의 처음을 가진 것이니, 기분이라도 좋아지라고 말이다.

그러나 제 신부의 선호와는 맞지 않은 모양이었다. 경험이 없는 건 풋내기 같아서 싫은 건가? 제게 선생 노릇을 하던 이이니 그럴 수도 있었다.

아니면, 너무 애처럼 느껴져서 부담스러워하는 걸지도 몰랐다. 한심한 생각들만 계속해 이어졌다.

“아니. 내가 괜한 소리를…….”

“저는 처음이 아닙니다.”

아사드의 말이 케이든에게 가로막혔다.

맞물린 말이 또 다른 침묵을 불러왔다. 아사드는 어딘가 겁을 집어먹은 듯한 제 신부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처음이 아닌 거야, 이미 몸을 겹칠 때 다 알게 된 사실이지 않은가. 왜 갑자기 얼굴을 굳히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케이든은 참 어려운 사람이다. 아사드는 다시금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게 뭐.”

아사드의 솔직한 말이 케이든의 앞에 무심히 떨어졌다.

“그게, 뭐가 문젠데.”

말 그대로였다. 그게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저 남자가 저리 긴장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안 됐다.

케이든은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그늘진 얼굴이 아래를 향했다. 저와 눈을 맞춰 주질 않는 남자를 앞에 두고, 아사드는 초조해졌다. 사막의 암벽 위에 몸이 묶인 사람처럼 목이 탔다.

아사드의 손끝이 다시 테이블을 툭, 툭 치기 시작했다.

‘아문의 앞에선, 아문이 헛소리를 해도 잘만 웃었잖아.’

내 말에 문제가 있으면 알려 주면 좋을 텐데. 왜 지레 겁을 먹고…… 나를 봐 주지도 않아. 아문은 시종이고 나는 황태자라서? 아니면, 그 애는 자기보다 작고 어린데 나는 어리거나 말거나 덩치가 커서?

차마 입 밖으로 말을 내지는 못하고 아사드는 속으로 투덜댔다.

발끝부터 기어오르는 불안을 참지 못하고 아사드는 몸을 일으켰다. 그는 다짜고짜 테이블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케이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사드의 움직임을 따라 유리잔들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잔 안에 든 붉은색 음료가 테이블 위에, 흰 튜닉 위에 튀었다.

아사드는 그저 케이든만을 제 눈에 담았다. 그는 고개 숙인 케이든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케이든 역시 저를 보게 했다.

“당신이 뭘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

“이 고귀한 내가, 당신에게 나의 처음을 줬다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 뿌듯해해도 좋아.”

아사드는 케이든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둠 속에선 언뜻 까맣게 보이는 보라색 눈 속에, 오직 저만이 담기자 기분이 좋았다.

아사드는 케이든이 자신의 시선을 피해 도망치기라도 할까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제가 만들어 낸 그늘에 갇힌 남자를 보고 있자니, 이루 말할 수 없는 흡족함이 퍼졌다. 초조로 들끓던 마음의 온도가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끓기 시작했다.

‘이런 걸…… 소유욕이라고 하는 걸까?’

아사드라는 사람이 가진 마음이 아니라, 저를 기꺼이 허락해 준 오메가에게 느끼는 알파의 소유욕인 거다. 그런 거라면, 지금 제가 느끼는 몹쓸 충동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이런 소유욕 역시 삿된 욕망임은 매한가지지만, 사랑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감정을 품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나마 이해가 가능한 범주의 욕심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나는 욕심 많은 인간이지.’

아사드는 케이든의 뺨을 손끝으로 쓸어 봤다. 간지러운 접촉에 놀라 케이든은 눈을 감았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나와 함께 희락기를 보낸 이와 당신이…… 같은 사람이 맞나 의심이 돼.”

아이처럼 짓궂은 얼굴을 하고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속삭였다. 진심으로 건넨 말이었다. 이토록 순진한 남자가 저와 함께 두 번의 밤을 함께 보냈다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입을 맞추면, 케이든은 어떤 얼굴을 할까.’

저급한 생각이 자꾸만 아사드를 찾아왔다.

아사드의 손은 케이든의 뺨을 지나 귓불에 가 닿았다. 붉어진 귀를 찬찬히 쓰다듬고 문질러 보던 손은, 이내 케이든의 머리카락을 손끝에 꼬아 가며 장난질을 쳤다.

한때 푸석푸석하기만 했던 까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사이에 부드럽게 감겨 왔다. 음침하고 우울해만 보였던 검은색도, 이제는 그 한편에 사막의 밤하늘처럼 고요한 아름다움을 품게 됐다.

헬리오에서 부족함 없이 잘 지낸 덕분이지. 그런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왜…… 아무런 말이 없어?”

케이든을 향해 완전히 몸을 숙인 아사드가 물었다.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아사드를 올려다봤다. 입을 맞추기라도 할 것처럼 가까워진 남자에게 시선이 사로잡힌 채 머뭇댔다.

“내가, 희락기의 열에 못 이겨 이상한 꿈이라도 꾼 건가?”

“꿈이 아니었습니다.”

당황한 케이든이 얼떨결에 답을 내놨다.

딱딱한 어투. 제국어를 할 때, 케이든의 말투는 꼭 아문 같았다. 한결 어조가 부드러워지는 왕국어로 말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왜 왕국어를 하지 못하는 척을 해서는. 자신이 했던 선택을 후회하며 아사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지금은? 지금도 꿈이 아니야?”

“……네. 지금도, 꿈이 아닙니다.”

아사드는 제게 답을 주는 케이든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봤다. 말이 끝을 맺고 입술이 닫힐 때까지 기다렸다.

케이든의 다물린 입술 위에, 아사드는 짧게 입을 맞췄다.

이상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게 다인데, 과음을 한 사람처럼 세상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케이든 한 사람만을 뺀 모든 것이 흐릿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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