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42)화 (42/97)

꿈을 꾸는 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그러면 안 됐다.

헛된 기대는 고통이 된다. 계획을 세워 봤자, 꿈 따위를 가져 봤자, 어차피 형태도 남지 않고 박살 나게 될 테니까.

“아…….”

쏟아지는 졸음 속을 헤매던 케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무거우면서도 달콤한 아사드의 페로몬 아래로 옅은 체향이 섞여 들고 있었다. 케이든 자신의 페로몬이었다.

케이든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왜 갑자기…….’

망가진 페로몬 샘이 이렇게 쉽게 고쳐질 수 있는 건가? 의아했다.

가지가지 하는구나. 신경 쓸 게 많아지는 기분에 입 안이 썼다. 예전처럼 페로몬을 지우는 탈취제를 써야겠구나 싶었다.

어차피, 히트사이클 같은 건 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와 봤자 열이나 조금 나고 끝이 나겠지. 하지만 쓸데없는 일로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비해야 했다.

눈더미처럼 불어난 걱정이 케이든을 흔들었다. 약들을 급하게 먹어서인지, 함께 먹어서인지 속이 아팠다. 쌓인 피로까지 더해져 더 힘든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잠이 들고 싶었다.

하나 케이든은 다시 몸을 눕히지 못했다. 짧고 가벼운 노크 소리와 동시에 벌컥 열어젖혀진 문 때문이었다.

다급히 열린 문은 마찬가지로 급히 닫혔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였다.

황태자비의 침실을 자신의 침실처럼 제멋대로 드나드는 사람은 이 황궁에 단 두 사람뿐이었다. 하나는 황태자인 아사드였고, 남은 하나는 황태자의 수족이자 황태자비의 말벗인 아문이었다.

오늘의 방문객은 아문이었다. 아사드는, 아문의 모습을 한 그는 기운 빠진 낯으로 침대에 앉아 있는 제 신부를 쏘아봤다.

‘도망자. 희락기가 끝나고, 어쩔 수 없는 깊은 잠을 자는 동안 내 품을 빠져나간 도망자.’

새까만 머리카락에 물기가 어린 걸 보니 침실에 도착한 지 오래 지나진 않은 듯했다.

아사드는 기분이 매우 저조한 상태였다. 이틀 내도록 한 몸처럼 붙어 있던 케이든이 잠시 눈을 감은 사이에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말도 없이 자취를 감추는 일에도 아주 특출난 재주가 있는 인간이었다.

희락기 내내, 케이든은 제게 안겨 줄곧 기쁨으로 울었었다. 그런데 왜. 희락기가 끝나자마자 정이 뚝 떨어졌다는 듯 저를 침대 위에 홀로 남겨 두고 떠났단 말인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앞으론, 아사드 메케리우스와 한 주의 절반 정도는 침실을 함께 쓰는 게 어떨까?’ 그런 생각은 하질 않고 도망쳐 버렸다.

거기다…… 지금 이 침실에선, 케이든의 향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주의를 기울여야 느낄 수 있는 미약한 페로몬 향이, 케이든의 주위를 맴도는 질척한 알파 페로몬에 짓눌려 있었다. 그 주인만큼이나 기운 없고 애처로운 모습을 하고서였다.

지난 이틀간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케이든의 페로몬 향을 아사드는 아문의 모습을 한 뒤에야 마주하게 됐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싶었다.

남편에게는 자기 페로몬을 꼭꼭 숨기고, 홀로 침실로 돌아온 뒤에야 마음껏 향을 풀어놓다니. 도대체 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베타인 아문이 케이든의 페로몬을 느끼고 있는 것 역시 문제였다. 리헤트가 아문에게 전했던 경고처럼, 정말 알파가 되기라도 했나 싶었다. 이제 막 첫 희락기를 지난 제 진짜 형질에 동조된 걸 수도 있었다. 하나 어느 쪽이든 황당한 일인 건 마찬가지였다.

“혹시 냄새가 나니? 미안해. 네가 올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냄새를 빼 놨을 텐데.”

“…….”

“아……. 아문은 베타라고 했지. 내가 잠깐 착각했네.”

왜인지 그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간 아문을 살피던 케이든이 말했다. 무언갈 깨달았다는 듯 지어 보인 작은 미소와 함께였다.

아문은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화가 난 상태로 오긴 했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웃는 모습만 보여 주려 했는데, 도통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다행이다.”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하던 케이든의 얼굴이 점점 본래의 색을 찾아 가고 있었다. 이전보다 짙어진 미소 위로 숨길 수 없는 안도감이 스며들었다.

침실의 침입자가 알파가 아니라는 데 느끼는 안도가 아니라, 그저 아문이 자신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서 온 안도 같았다.

“침실 안에, 케이든 님의 향기가 맴돌고 있는 건가요?”

“응. 이런 일은 거의 없는데…… 황태자님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봐.”

모른 척 던진 물음에 케이든은 어물어물하며 답을 줬다. 멋쩍다는 듯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귀가 붉어진 걸 보니 쑥스러움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저리 부끄러움이 많아서야. 첫 희락기를 맞이한 황태자가 황태자비와 요란하게 몸을 섞었다는 이야기가 진작 여기 별궁을 넘어 황궁 전체에 퍼졌을 거다. 저 남자가 그 사실을 알면, 창피하다며 침실 밖으로 나서질 않을 정도겠지. 시종들 입단속을 잘해 둬야겠네 싶었다.

“어떤 향기인지 궁금합니다. 베타인 저는 평생 알 수 없을 테니까요.”

“좋은 냄새는 아니야. 그나마 전하의 향기에 가려져 있어서 다행이지. 황태자님의 페로몬 향은…… 정말 좋거든. 귀족들이 쓰는 향수 같은 것보다 훨씬. 아니,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아.”

쏟아지는 졸음을 내쫓으려는 듯 손으로 눈가를 쓸며 케이든은 말했다. 말을 담은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 있었다.

“케이든 님의 페로몬 향이 좋지 않을 리 없습니다.”

“아문 네가 베타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네.”

「진심으로 드린 말씀이에요.」

“내 페로몬은, 뭐라고 했더라. 비 맞은 흙더미 위의 썩은 풀? 그런 데서나 나는 냄새 같다고…… 대충 그 비슷한 말을 들었었어.”

아무래도 제 신부가 많이 지친 모양이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이해했다. 몸이 힘들 땐 저런 헛소리가 입 사이로 줄줄 새어 나오는 법이었다.

「썩은 건 그딴 말을 한 인간의 코겠죠.」

「예전엔…… 일할 때 탈취제를 뿌리기도 했어. 페로몬을 지우는 거.」

페로몬 향이 역겨우니까, 같이 일하는 사람들 힘들게 하지 말고 완전히 숨기고 다니라고 했거든. 케이든은 중얼거렸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을, 예전 일을, 잠결에 입에 담은 거였다.

단순한 잠투정만은 아니었다. 저와 희락기를 보낸 알파에게 제 서러움을 알아 달라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고 투정을 부리는 셈이었다. 케이든도 아사드도 알지 못하는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케이든의 엷은 체향 역시 이전보다 잘 느껴졌다.

주인을 닮아 차분하고 단정한 향기. 사막에선 접해 본 적 없는 낯선 것이기도 했다. 화려하지도 짙지도 않으니 누군가에겐 심심하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케이든의 페로몬을 더듬어 보고 있자니 푹신한 침대에 몸을 누인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꼭, 보이지 않는 손에게 쓰다듬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좋은 향을, 케이든의 페로몬을 지우려 든 게 누굴까. 일하는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말라는 미친 소리를 한 것으로 보아…… 도련님이란 작자겠지. 아사드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 인간은 인격이 파탄 난 것도 모자라, 후각까지 마비된 모양이군.’

끔찍한 일이었다.

알렉스 쿠퍼의 이름을 되뇌어 보고 있자니, 이전에 케이든과 몸을 섞었을 인간에 대한 분노도 다시금 찾아왔다.

그 자식 역시 알렉스란 놈과 비슷한 부류의 쓰레기였을 터다. 순진하고 착한 제 신부를 꾀어 교제를 시작하곤, 연인이 아닌 창부를 대하듯 자신의 욕구만 풀었을 것이 분명했다.

왜. 이 남자 주위엔 그런 인간밖에 없었던 걸까.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타까움과 짜증이 함께 끓었다.

「오메가인 시종이나 호위들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케이든 님의 페로몬 향이 이상하다는 소리는, 그 아무도 안 할 겁니다.」

알파들에겐 눈길도 주지 말라는 말을, 아사드는 간신히 삼켰다. 그것들이 당신 체향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는 속내를 꼭꼭 숨겼다. 배우자에게 집착하는 남편 같아 보이지 않겠는가. 케이든과 제 사이가 뭐라고.

“응, 그럴게.”

케이든은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럴게? 아사드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저 남자가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란 걸 알았으니까. 리헤트에게 그의 잘난 얼굴에 관해 묻지 않았듯이, 이대로 얼버무릴 게 확실했다. 시종들은 돈과 명예로 고용된 사람들이니, 무조건 좋은 말만 건네주리라 생각해 저러는 거겠지.

“그래도 탈취제는 다시 구해야 할 것 같아. 내가 황태자님처럼 페로몬을 잘 감출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

“2년도 더 넘게 페로몬 없이 살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니까 민망하네. 당황스럽기도 하고.”

의연한 척을 하는 케이든을 앞에 두고 아문은 입을 달싹였다.

‘그게 다 아사드 메케리우스 때문입니다. 지난 이틀간, 그자가 케이든 님의 안과 밖 모두에 페로몬을 처부어서 그렇게 된 거겠죠. 뭐…… 페로몬이 돌아왔다니, 어쨌든 잘된 일 아닙니까?’

솔직한 생각을 입 안에 숨겨 두자니 답답했다. 하나, 아문의 모습으로 케이든에게 되는대로 말을 내뱉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케이든의 말이 어딘가 즐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난 2년간 이런 적이 없었다니. 베타에 가깝던 남자의 페로몬을 끄집어낸 장본인이 다름 아닌 저라는 소리였다. 꾹 닫혀 있던 페로몬 샘을 연 거다. 케이든의 옛 연인은, 그에게 역겹게 들러붙어 있었을 알파는 하지 못한 일을 제가 해낸 게 아닌가.

아문은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케이든의 밑에 반쯤 무릎을 꿇어 앉았다. 살짝 고개를 기울여 수마와 싸우고 있는 케이든과 시선을 맞췄다. 미약하게 열이 오른 얼굴과 졸음이 묻은 두 눈을 찬찬히 바라봤다.

잠자리에 들고 싶으니 이만 나가 보라고 해도 될 텐데. 케이든은 자신을 찾아온 아문을 먼저 돌려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착해 빠졌긴. 저러니 내 희락기를 돕겠다며 나섰겠지.’

아문의 손이 케이든의 이마에 닿았다. 손등을 이마에 대어 본 거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