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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신부 (41)화 (41/97)

……이런 게, 바로 할아버지가 말하던 페로몬의 농간일까? 그렇다면 저는 이미 그 농간에 넘어간 상태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이렇게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 저는 제 신부와 희락기를 보내기를 머뭇댔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농간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뭣 같지 않구나 싶기도 했다.

제 머릿속을 채운 기이한 생각과 욕망을 한곳에 모아 다신 마주할 일이 없게 멀찍이 치워 둬야 했다. 그런데,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라면 짜증만 나야 할 상황이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은 대충 접어 버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남자에게만 모든 걸 집중하고 싶었다. 전보다 더 느긋하고 집요하게 그를 느끼고 싶었다. 지금처럼 아프지 않게 하고 싶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케이든의 오른쪽 뺨 아래에 번진 흉터 위에, 그보다 더 짙은 색으로 남은 목덜미의 화상 자국 위에 입을 맞추고, 장난을 치듯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그리고 아사드는 케이든의 체향을 느꼈다. 여전히 아무런 향도 내지 못하는 남자에게 제 페로몬을 잔뜩 묻혔다.

희락기가 끝날 즈음이면…… 케이든은 자신의 향에 푹 잠기게 될 거다.

진작 이렇게 해야 했다. 황태자비를 제 페로몬에 적셔 놨어야 했다. 황궁 안팎의 누구든, 이 남자가 제 것이라는 것을 알아챌 정도로 흥건하게 말이다. 그랬다면, 아무도 이 사람을 우습게 여기지 않았을 텐데. 그런 후회가 들었다.

제 신부의 뺨 위에 아사드는 다시금 입을 맞췄다. 혀끝으로 케이든의 눈물을 핥았다. 이상하게도, 그 눈물이 참 달게 느껴졌다.

여전히 빛이 없는 자정 근처의 새벽. 아사드 메케리우스는 어둠 속에서 미소 지었다. 다정하고 달콤한 체향 사이로 질척하고 어두운 향취가 섞여 들었다.

본격적인 희락기의 시작이었다.

* * *

황태자의 첫 희락기는 꼬박 이틀간 이어졌다.

그 이틀 내내, 케이든은 처음 발을 들여 본 아사드의 침실에서 잠시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아사드의 침실이 아니라 그의 품에서조차 벗어날 수가 없었다. 희락기의 열기에 잠식된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억센 구속구처럼 케이든을 옥죄면서도 가장 충직한 종처럼 그를 돌봤었다.

이제 아사드의 희락기는 완전히 끝이 났다. 뜨거운 열을 머금고 날뛰던 강렬한 페로몬은 배부른 사자처럼 부드럽고 여유로워졌다.

그리고 아사드는 잠들었다. 첫 희락기를 무사히 보낸 알파에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짧지만 깊은 잠에 빠진 거였다. 알파 형질이 완전해지는 과정 중 하나라고, 케이든은 시종장에게 미리 이야길 전해 들었었다. 별궁의 동관으로 가기 전에 말이다.

정신을 차린 아사드에게 최대한 제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케이든의 입장에선 다행인 일이었다.

희락기를 이겨 내고 기분 좋게 눈을 떴는데 그 옆에 제가 있다면…… 소름이 돋겠지.

최소한 즐겁진 않으리라. 원치 않는 상대인 것도 모자라, 추레하기까지 한 오메가와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가졌다는 현실이 와 닿을 테니 말이다.

〈입맞춤 같은 거, 나는 해 본 적 없어. 제대로 된 입맞춤은 뭔지…… 어떻게 하는 건지…… 알고 있다면 나에게도 알려 줘.〉

아사드는 제게 누군가와 입을 맞춰 본 적이 없다고 말했었다. 타인과 몸을 섞은 것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

처음. 그 특별한 단어의 뜻을 퇴색시킨 게 저였다.

열기가 걷히고 제정신을 차린 아사드는, 그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원망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언젠가는 듣게 되겠지만 당장은 듣고 싶지 않았다.

아사드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진 않았었다. 도리어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하나 희락기는 페로몬이 만들어 낸 마법과 같은 한때였다. 마법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다른 감정이 될 수 있었다. 도련님처럼, 너 같은 것과 몸을 섞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역겹다며 화를 내고 주먹을 들지도 모르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면 싶었다.

새도 울지 않는 새벽녘, 케이든은 자신을 끌어안은 아사드의 품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대충 가운을 주워 입고 조심히 침실을 나섰다.

케이든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움직였다. 고요한 복도를 숨죽여 걸었다. 아사드가 시종들을 멀리 물려 놓은 덕분에, 머물 곳이 있는 서관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이들에게 창피한 꼴을 보이진 않았다.

케이든이 침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시종들이 그를 찾아오긴 했었다. 낯이 익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케이든에게 약을 먹였다. 사후 피임약과 오메가의 희락기 억제제라는 친절한 설명이 함께였다.

베타인 시종들은 케이든이 약을 다 마신 걸 확인한 후에야 되돌아갔다. 바로 다른 시종들을 보내 주겠다고 말했지만, 케이든은 혼자 있고 싶다며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설픈 웃음을 지은 채였다.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 내고 간신히 몸을 씻은 케이든은 침대 위에 쓰러지듯 몸을 누였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이 이불을 적시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너무 이상하게 누워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홀로 남은 케이든은 별궁의 시종장인 사반이 건넸던 말을 떠올려 봤다.

〈후계자이신 전하께 희락기가 온 이상, 그분이 나이 스물둘을 넘길 때까지 황태자비께선 매일 희락기 억제제와 피임약을 복용하셔야 합니다. 아이를 가질 준비가 되시면, 그때는 약을 끊으셔도 됩니다.〉

황태자비 혹은 황태녀비가 된 자는 그 형질에 관계없이 법도를 따라야 한다고 설명해 줬었다.

저와 아사드가 아이를 가질 준비를 할 일은 없었다. 애초에, 22살이 된 아사드를 마주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쫓겨날 때까진 계속 약을 챙겨 먹게 되겠구나 싶었다.

‘졸려.’

온몸이 아팠다. 허리 아래로는 제대로 된 감각이 느껴지질 않았다. 팔도 다리도, 모두 제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이틀 내내 쉬지 않고 몸을 썼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도 고통스럽기만 하진 않았다. 견딜 만했다. 그러니, 이렇게 태평하게 눈이나 끔뻑이고 있지 않겠는가. 의미 없는 생각이 함께하는 꽤 사치스러운 시간이었다.

케이든은 무심코 그가 지나온 옛 시간을 떠올려 봤다. 알렉스의 희락기에 불려 갔던 횟수를 세어 보다 말았다.

눈물을 보이거나 큰 소리를 내면, 알렉스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보이면, 그를 기쁘게 하지 못하면…… 일이 났었다. 요령이 없고 뭣 모르던 시절엔 알렉스를 기쁘게 할 때보다 화가 나게 할 때가 더 많았다. 정말, 아프고 힘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참다못해 도망을 치려고도 했었다. 짐도 없이 맨몸으로 산을 넘으려 들었었다. 금세 잡혔지만 말이다. 잡힌 후의 일은 신기하게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쓸데없는 기억을 알아서 지워 버린 모양이었다.

알렉스는 러트가 온 알파는,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는 모두 짐승이 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아사드는 도련님과 달랐다. 아사드는 단 한 번도, 제게 짐승처럼 구는 법이 없었다.

모든 게 낯설었던 지난 두 밤을 케이든은 곱씹어 봤다.

뜨거운 열기에 두 눈이 혼탁해진 채로도 아사드는 다정했었다. 어설픈 입맞춤도, 손길도, 속삭임도, 페로몬도 하나같이 달기만 했다. 노팅은…… 너무 아팠지만, 아사드가 저를 끌어안고 있을 땐 조금도 힘들지 않았었다.

아사드는 아무것도 아닌 저를 아주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진짜 황태자비라도 된 양 귀중히 여겨 줬다. 제가 많이 부족하게 굴었는데도 그랬다.

어두운 밤을 지나 동이 트고 하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침실을 환히 밝힌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아사드는 흉물스러울 제 흉터 위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춰 줬다.

사랑받는 기분은 이런 걸까. 그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조금은 경험하게 됐다. 남들의 비웃음을 살 생각이란 걸 알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한 오해나 착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

케이든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뇌리를 떠다니는 아사드의 얼굴 위로 자연스레 도련님의, 알렉스의 얼굴이 덧입혀졌다. 그의 목소리가 복잡한 머릿속을 울렸다.

〈그저 욕구만 풀 수 있으면, 너 같은 것과도 밤을 보낼 수 있는 게 알파야.〉

오래된 천처럼 색이 바랜 기억이 주위를 맴돌았다. 알렉스가 제게 했던 말들이 지금에 와선 어떤 충고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케이든은 아사드와 보냈던 지난 이틀이 꿈처럼 좋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조금도 빛을 잃지 않을 기억이 됐다. 아사드에겐 지난 이틀이 눈이 흐려졌던 때의 실수로만 남았다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리되어도 괜찮았다.

‘2년, 2년 반.’

케이든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되뇌었다.

동관과 서관 사이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시종장은 별안간 나타난 저를 반기며, 반려자가 있는 아사드가 희락기를 홀로 보내는 건 일어나선 안 될 일이라고 말했었다. 치료 마법사들도 손대기 힘든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를 약을 먹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남은 시간 동안은 제가 아사드의 희락기를 책임지게 되리라. 일곱 번, 어쩌면 여덟 번 정도…… 아사드와 함께 밤을 보내게 될까?

하지만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제 손목을 잡았을 때만 해도, 아사드는 저와 희락기를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였다. 희락기의 열기를 이겨 내지 못하고 할 수 없이 몸을 섞긴 했지만 말이다.

‘다음이 있을까?’

어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든은 애꿎은 이불만 만지작대야 했다.

생각이 너무 많아져 버렸다. 좋지 않은 일이었다.

케이든은 내일에 대해,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괜한 생각만 하고 또 하다 보면 말도 안 되는 헛바람이 들기 마련이었다. 괴상한 소망 따위를 품고 말 거다.

꿈을 꾸는 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저 같은 사람은 그러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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