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36)화 (36/97)

하지만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사드는 아문이 되어 케이든에게 제국어를 가르쳤다. 함께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헬리오를 모르는 신부에게 많은 이야길 들려줬다. 주눅 들어 있는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고, 그와 별 시답잖은 이야길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의 손을 잡았다. 자신의 진짜 목적을 잊은 듯 굴었다.

신뢰를 얻기는 했다. 제 신부는 자신의 남편인 저보다 아문을 편히 여겼으니까.

아문의 앞에선 입가에 웃음이 가시질 않는 상태면서. 흉악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지 모를 놈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면서. 정작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남편인 제 앞에선 어색하게 굴기만 했다. 낯이 허옇게 질려서 어설프게 웃었다.

심지어 아문은 케이든에게, ‘너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말까지 전해 듣게 됐다.

아사드는 케이든이 건넨 친밀한 말이 하나도 즐겁게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 말을 건넬 때의 자기 얼굴이 얼마나 쓸쓸해 보였는지, 케이든은 모를 거다.

당황해 내뱉은 가족이 없다는 거짓말에 자기도 그렇다며 웃던 걸 생각하면 또 속이 뒤집혔다. 왜 남편인 절 지척에 두고 가족이 없다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하나 케이든의 말을 비난할 자격이 아사드에게는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그야말로 케이든을 제 옆에서 떼어 내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으니까.

“바보 같은 신부.”

아사드는 케이든을 생각했다.

“황비가 되지 못할…… 불쌍한 신부.”

또 생각했다.

케이든은 황제에게 도움이 될 만한 황비감이 아니었다. 케이든에겐 그를 받쳐 줄 집안도, 재산도, 신임과 명예도 없었다. 물려받은 성씨조차 없는 남자는 스스로를 지킬 단단한 마음조차 가지지 못했다.

케이든은 빈털터리였다.

그에게 괜한 동정심을, 연민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예정대로 작별을 고하는 편이 맞았다.

하지만…… 이전에 세웠던 계획은 걷어차 무너트려야 했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약점을 쥐고 흔들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케이든에게 상처 주기 싫었다.

약간의 흠집도 내지 말아야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밝게 만들어서, 겁을 집어먹게 할 사람이 없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줘야 해.

아니.

꼭 황궁 밖으로 내보낼 필요가 있나? 왕국의 쓰레기는 내가 처리해 준다고 쳐도, 비슷한 놈한테 또 다른 괴롭힘을 당하면 어떻게 하는데?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계속 여기서 지내게 하면…….

“무슨, 별…… 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

자기 자신을 향해 아사드는 욕설을 토해 냈다. 벽 너머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배운 상스러운 말을 쏘아붙였다.

길을 잘못 든 게 분명했다. 아니, 길이 없는 사막 위를 헤매는 것만 같았다. 떠오르는 물음은 많은데 도통 시원한 답이 나오질 않았다. 태어난 이래 이런 혼란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한번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인 아사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이든을 만나러 가야 했다. 케이든이라면, 이 짜증 나는 잡념을 없애 줄 수 있을 터였다.

한숨과 함께 아사드는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을 나서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채 다섯 걸음을 더 걷기도 전에, 영문을 모를 어지러움을 느끼고 멈춰 섰다. 다시 물러서 소파 등을 쥐었다.

“……뭐야.”

아사드는 소파를 붙잡은 자신의 손을 봤다. 등받이를 으스러트릴 듯 힘이 들어간 손등 위로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숨 막힐 정도의 열기가 몸을 덮쳤다.

낯선 상황을 맞이한 아사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통제되지 않는 힘과 숨마저 뜨겁게 만드는 체열, 모래바람을 맞은 듯 따가운 살갗, 거칠어져 가는 심장 소리…….

고작 감기나 몸살 따위가 저를 찾아온 게 아니었다.

혼란한 당혹감 속에서, 아사드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를 느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적 없던 페로몬이 공기 속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희락기였다.

아사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전보다 거칠어진 욕설이었다.

“말도 안 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하지만 온몸의 감각은, 청명하다는 표현이 걸맞을 정도로 깨끗해졌다. 잘 벼려진 검처럼 예리해지기도 했다.

문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사드는 제 허리춤을 지키고 있던 단검에 손을 얹었다. 대리석 바닥에 발이 닿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반갑지 않은 방문자들의 수를 헤아려 봤다. 시종장 사반이 올 걸 알면서도 그런 짓을 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제 적처럼 느껴지는 걸 보니, 희락기를 맞은 게 확실한 모양이었다.

‘못해도 1년 뒤에나 와야 할 일이 왜 이렇게 빠르게…….’

너무 이르게 찾아온 희락기가 아사드는 당혹스러웠다. 상상도 하지 않았던 상황을 코앞에 두게 되자, 도리어 헛웃음이 났다.

“들어와.”

다급한 노크 소리에 화답하듯 아사드는 말을 중얼거렸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안으로 베타인 시종장과 호위들이 들어섰다. 동관의 호위를 통해 황태자에게서 희락기의 전조가 느껴진다는 보고를 전해 받은 시종장 사반 역시 함께였다.

“…….”

급작스러운 상황을 맞닥뜨린 시종장의 낯이 허옇게 떠 있었다.

나이 든 남자의 눈에 떠오른 당혹감을 마주하며 아사드는 다시 한번 상스러운 욕설을 입에 담아야만 했다. 백발이 성성한 시종장이 저렇게까지 놀란다는 건, 제게 닥친 문제의 규모가 크다는 뜻이었으니까.

황태자 아사드 메케리우스에게 찾아온 희락기의 징후를 알아챘던 이는, 페로몬을 완전히 숨기지 못하는 아문을 걱정했던 여자 시종 한 사람뿐이었다.

* * *

아사드는 군말 없이 시종장을 따라 침실로 되돌아갔다. 말도 안 되는 열기에 이성을 놓아 버리기 전에 되도록 빨리, 스스로를 가둬 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였다.

아사드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로 시종장의 잔소리를 들었다. 첫 희락기를 허투루 보내면 페로몬에 이상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걱정 섞인 경고가 주를 이루는 염려였다. 어찌나 과하게 걱정을 하는지, 나이 든 남자의 머리카락이 그새 더 하얗게 변한 듯 보였다.

‘페로몬에 이상이 생기는 것보다, 청력에 이상이 생기는 게 먼저겠네.’

감당할 수 없이 홧홧해진 이마에 손등을 대어 보면서도 아사드는 그런 생각을 했다.

시끄러운 건 시종장만도 아니었다. 치료 마법사며 의사들이 부산을 떠는 광경이 안 그래도 뜨거운 머리를 더 뜨겁게 했다.

“……황태자비님을 모셔 오겠습니다.”

시종장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아사드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 역시 이마 위에서 금세 떼어졌다.

“미쳤어?”

평소보다 사나운 얼굴을 한 아사드가 되물었다. 열기에 탁해졌던 금색 눈동자에 흉포한 빛이 돌았다.

“황태자비님께서도 이미 상황을 전해 받으셨을 겁니다. 분명 준비를 하고 계실…….”

“그럼, 이것들은 왜 불러온 건데?”

핏줄이 불거진 아사드의 손이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던 이들을 가리켰다. 아사드가 열기에 잡아먹혀 이성을 잃기라도 할까, 마법사 하나가 황급히 방 안의 온도를 낮췄다.

“약을 써서 페로몬을 틀어막건, 마법을 써서 진정시키건, 며칠을 재워 버리건, 다른 방법을 써. 황태자비는 안 돼.”

“헬리오의 태양이 되실 분의 신성한 희락기를 어찌 약 따위로 막겠습니까. 마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전하처럼 강건한 알파의 첫 희락기는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습니다. 예정보다 이른 희락기라면 더 그렇지요.”

시종장의 말을 들은 아사드가 신경질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1년에 서너 번씩. 나이 마흔이 넘어갈 때까지 계속 찾아올 희락기잖아. 딱 한 번으로 끝날 축복도 아니고 신탁도 아닌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고 신성해?”

“…….”

“좋아. 마법도 약도 안 된다면, 나 스스로 통제해 보지.”

“전하.”

“다 나가. 명령이야.”

고집이 센 황태자를 앞에 두고 시종장은 걱정 어린 얼굴을 했다. 하지만 곧장 아사드의 말을 받들어 자신을 제외한 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오직 두 사람만이 남게 된 넓은 침실 안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 고요마저 금세 아사드의 뜨거운 숨 아래에서 흐트러졌지만 말이다.

“황제와 그 후계자의 희락기는 막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건, 신의 선물을 거부한다는 말과 다를 게 없습니다. 하늘의 벌을 받을 일이죠.”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네. 내 희락기 문제로 왜 신의 눈치를 봐야 해?”

아사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시종장이 베타가 아니었다면, 아사드의 날이 선 페로몬에 헛구역질했을 게 분명할 정도로 페로몬 향이 짙어진 상태였다.

“혹시…… 희락기를 함께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원하는 오메가가 있으셔서 그러십니까?”

왜 그렇게 억지를 부리시냐,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시종장은 에둘러 아사드의 마음을 떠봤다.

시종장 사반은 자신이 모시는 이가 얼마나 강퍅한 사람인지를 잘 알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초조해졌다.

아사드가 이렇게 완고하게 구는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황태자비와 아주 친밀하진 못해도, 제법 잘 지내고 있지 않았는가. 정작 희락기를 맞아선 왜 그를 거부하는 건가 싶었다.

만약, 아사드가 정말 홀로 희락기를 보내게 된다면 ―황제께서 그렇게 두지 않겠지만― 곧 황궁에 새로운 소문이 퍼지겠구나 싶었다. 어린 황태자가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정조를 지켰다고 말이다.

“……뭐?”

아사드가 뒤늦은 답을 내놨다. 답이 아니라 탄식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분이 누군지 귀띔해 주시면, 데리고 오겠습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시종장은 속삭였다. 안 될 짓임은 알지만, 아사드 홀로 희락기를 보내는 것보단 부정한 짓을 저지르게 돕는 편이 낫다는 판단 아래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렇게 신을 찾더니. 신이 들으면 기절할 소리를 쉽게도 하네.”

아사드의 입가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흥분한 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대를 벗어나 바닥에 발을 디디기까지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 땀범벅이었다.

“사반. 나를 그런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마. 내가, 이 헬리오의 황태자가. 희락기가 왔답시고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놈처럼 보여? 내 반려를 구석에 처박아 두고?”

차가워진 아사드의 낯을 마주한 시종장은 자신이 내쫓길 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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