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34)화 (34/97)

아사드의 품에서, 케이든은 제 심장의 이상을 알아챘다. 제 기분을 알아 달라는 듯 요란스럽게 전신을 휘감는 떨림을 느꼈다. 쿵. 쿵. 심장의 목소리를 따라 퍼지는 기쁨과 뺨을 데우는 열기를 느꼈다.

그 떠들썩한 소리를 모른 척하며 케이든은 무용수들의 유려한 춤사위를 바라봤다.

마법이 깃든 돌의 냉기도, 악사들의 연주와 무용수들의 춤도 모두 좋았다. 그런데도 왜인지 자꾸만 마음이 어둑해졌다. 아무래도, 저는 사람이 많은 곳에 발을 디디면 안 될 유형의 인간인 모양이었다.

무엇이 제 기분을 가라앉게 하는지, 케이든은 알았다.

〈이 재미없는 연회에 모인 황족 중에, 당신이 3년짜리 신부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자한 메케리우스가 전해 준 비밀이 저를 툭, 툭 쳐 댔다.

언젠가 쫓겨나리라 짐작만 하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등 떠밀려 떠나는 편이 더 좋았을까? 꼭 죽을 날짜를 받은 사람처럼 속이 답답해지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헬리오에, 저를 챙겨 주는 사람들에게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황궁에 더 머물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기대하지 않아야 실망도 하지 않는 법이다. 불가능한 일은 바라면 안 됐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케이든이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은 남자를 슬쩍 훔쳐봤다. 하지만 그러다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다시 원래의 자리로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쑥스러웠다. 괜스레 제 약지의 반지나 만져 보게 됐다. 사나운 얼굴을 한 남자가 혼인식에서 끼워 준 반지가 아니라, 어두운 밤에 저를 찾아온 남자가 끼워 준 반지를.

왜인지…… 웃음이 나왔다.

‘아사드는 금세 나를 잊을 텐데. 나는 저 사람을 평생 잊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멋쩍어져서 그랬다.

케이든은 자신의 얼굴에 떠오른 자그마한 웃음을 숨기려 노력했다. 꼴사나운 표정일 테니 말이다.

잊지 못할 존재는 아사드만이 아니었다. 이 헬리오의 풍경과 사람들은, 그들이 안겨 준 좋은 기억은 평생 제 옆을 떠나지 않을 거다. 제게 남은 삶에서 다신 만나지 못할 평화와 친절, 상냥함과 다정함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죽음을 목전에 둔 가장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워하겠지.

케이든은 침묵했다.

그리고 끝내 한 가지 사실을 덤덤히 깨닫게 됐다. 떠나야 할 날을 받자 드러난 마음을 바라봤다.

‘나는…… 저 남자를 좋아하고 있구나.’

케이든은 그가 은연중에 느껴 왔던 감정을, 그도 모르는 새에 발화한 낯선 감정을 천천히 매만져 봤다.

웃음이 나왔다. 제가 품은 마음이 참 초라하고 우습게 느껴져서 그랬다.

아사드는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뭘 안다고, 사랑에 빠진 걸까. 그의 외모에 반하기라도 했나. 아니면, 아사드의 의미 없는 다정함에 마음을 주었나? 그건 그것대로 우스운 일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디가 어디서부터 잘못돼서 이렇게 된 건지 감도 오질 않았다.

하지만 이미 새어 나온 마음을 억지로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케이든은 자신의 마음을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바라는 게 없으니 받아들이기가 쉬운 걸지도 몰랐다.

제가 아사드에게 품고 만 마음은, 아무도 찾지 않는 골방에 잘못 피어난 꽃과 같은 거였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햇살도 들지 않고 물도 없는 곳에서 알아서 시들어 버릴 거다.

케이든은 제 마음의 끝을 알았다. 그렇기에 당혹감을 느끼지도 요란을 떨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보답받기를 바라지 않았다. 헬리오에 머물 수 있는 날이 더 길어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케이든은 그저, 자신이 아사드에게 불순한 마음을 품은 걸 들키지 않기만 바랐다.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제 존재를 알아 달라는 듯 크게 뛰던 심장 소리와 간지러움이, 열기가 잠잠히 가라앉았다.

“볼 거면 당당하게 봐. 왜 갑자기 도망을 가. 아니면, 할 말이라도 있나?”

자신의 눈을 피한 채 말이 없는 케이든에게 아사드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서늘해진 케이든의 몸과 아사드의 몸이 더 가까워지려야 더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됐다. 그제야 다시 자신을 봐 주는 케이든에게 아사드는 짓궂게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차마 완전히 눈을 마주하지는 못하고, 케이든은 아사드의 어깨 부근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왜 본 거야? 너무 잘생겨서? 아름다워서?”

하나 그 뻔뻔한 물음을 받아 들고는 다시 아사드를 보게 됐다.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였다.

그리고 제가 잘 들은 게 맞았음을 바로 깨달았다. 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남자의 얼굴에선 부끄러움이나 겸양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네.”

매사에 당당한 아사드에게 순순히 답을 내어 주며 케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도,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게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무심결에 싱거운 답을 내놓은 거였다.

아사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케이든을 노려볼 뿐이었다. 기분이 나빠 그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겁이 나지도 않았다.

“그럼…… 계속 봐.”

이번엔 아사드가 먼저 휙,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치근대는 것처럼 보였으면 어쩌지. 케이든은 뒤늦게 자신의 행동과 답변을 후회했다. 창피함이 케이든의 귀 끝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이미 내놓은 대답을 뒤로 무르거나 정정하지는 못했다. 당황해 말을 바꾸는 게 더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였다.

케이든은 그저, 더는 절 보지 않는 아사드를 눈에 담았다. 헬리오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아사드의 얼굴이 지금과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뾰로통하고 무심해 보이지만, 사실 조금쯤은 본래의 다정함이 묻어난 얼굴로 제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 줬으면.

허튼 생각이었다. 작별의 인사는커녕, 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헬리오를 떠나게 될 테니 말이다.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케이든은 제 머릿속을 떠다니던 생각을 바꿨다.

케이든은 그가 농장에서 쫓겨났을 때를 떠올려 봤다. 그는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수레에 실려 나갔었다. 백작의 명을 받아든 일꾼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뒤였다. 원래도 많지 않은 짐을 챙길 여력도 시간도 없었다.

그래도 이곳에선, 작별에 폭력이 따르진 않을 것 같았다. 저는 죽은 사람이 되어야 할 테니 제게 친절했던 이들에게 따로 인사를 할 시간은 없겠지만 말이다. 자한의 말이 맞는다면 돈도 받으리라. 적어도, 노숙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괜찮겠지.

케이든은 단 아래의 무대에 선 무용수들에게로 시선을 떨궜다.

무용수들의 손을 감싼 긴 천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위로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아사드의 모습이 무심히 겹쳐졌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렇게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되는 걸까.

정말 정신없고 어려운 일이구나 싶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 해.’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미지근한 혼란 속에서, 케이든은 잠시 눈을 감았다. 아사드가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는 것도, 어느새 그에게 더 단단히 안기게 됐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였다.

5. 희락기

아사드는 집무실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반쯤 눕다시피 한 채로 고개를 갸웃대는 그의 주변에 흰 종이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상태였다.

종이는 아사드의 손에도 한 장 들렸다. 연필로 그려진, 보다 몽타주에 가까운 허술한 초상화가 딸린 일종의 신상 명세서였다. 바닥이며 소파 위에 흩어진 것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안에 그려진 사람과 새겨진 이야기는 각기 달랐지만 말이다.

아사드는 그가 쥔 종이를 빤히 들여다봤다. 제국의 황태자가 부리는 수족들의 솜씨가 녹아 있는 간결하지만 확실한 자료였다. 그에게 당도하기까지 조금은 시간이 걸렸어도.

부드러운 종이 위에 인생이 전시된 이들은 모두 성인 남자였다. 외벽 너머에 큰 시장이 섰던 날, 케이든이 예술품 구역에서 마주했을지도 모를 인물들이었다.

〈어떤 남자를 보고 갑자기, 막, 뛰어가지 뭡니까. 꼭 도망치는 사람처럼요!〉

어느 남자를 봤다고, 예술품 구역에 있던 호위는 말했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을 도망치게 한 인간이 엘바에서 왔을 거라고 믿었다. 케이든이 안면도 없는 낯선 남자를 보고 다짜고짜 도망을 쳤을 리 없었다.

케이든은 누군가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서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시비를 걸어도, 징그럽게 치근덕대도, 묵묵히 자리를 지킬 사람이었다. 아문이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으니까. 그러겠노라 약속했으니까.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자리를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더군다나 제가 일을 맡겼던 상단의 호위는, 아니, 멍청이는 케이든을 쫓던 남자가 헬리오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덧붙여 설명해 줬었다. 얼굴이 희고 예쁘장했다며 말이다.

얌전한 케이든 한 사람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덜떨어진 남자의 증언을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놈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었다. 땀까지 뻘뻘 흘려 가며 제게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었다.

아사드는 전해 받은 자료 속에서 헬리오 사람들을 빼냈다. 그는 엘바에서 온 이들을 찾기 위해 헬리오의 중심가나 수도 아크에 오랜 시간 체류해 본 적이 없는 외지인만을 남겼다. 한 장씩, 한 장씩 바닥에 자료를 내버리며 남은 이들의 이름을, 면면을 계속해 살폈다.

그러다…… 아주 눈에 거슬리는 남자 하나를 마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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