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30)화 (30/97)

아문은 황실의 이야기에, 사람들에게 익숙했다. 그들을 아주 차갑게 바라봤다. 자신이 모시는 아사드와 똑 닮은 데다 사이가 가깝기도 했다. 아문은…… 황실의 피가 흐르는 분들과 관련이 있는 걸까? 괜한 망상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괜스레 아문에게 더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진실이 무엇이건 아문이 외로운 아이임은 분명하니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사람을 빤히 보시면서.”

“……네가 있어서 든든하다는 생각.”

“뭐, 제가 미더운 인재이긴 합니다.”

케이든의 말을 곱씹어 보던 아문이 기분 좋다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그런 뻔뻔한 모습이 손톱만큼도 미워 보이질 않았다. 적어도 케이든의 눈에는 말이다.

“저도 다른 생각을 조금 해 봤습니다.”

“무슨 생각?”

“저와 케이든 님이 완전히 딱 맞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요. 아까, 가족이 없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다시 생각해 보니 영 틀린 말이에요.”

“아니야, 맞는 말인데…….”

“왜 가족이 없으십니까? 황태자님이 계시잖아요.”

예상치 못했던 지적을 들었다. 아사드는 저와 가족으로 평생 묶이기를 바라지 않을 것 같은데. 볼을 쿡쿡 찔러 대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케이든은 버릇처럼 제 뺨만 쓸었다.

“나한테…… 아문 너 같은 동생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껴 주고, 예뻐해 줬을 거야.”

“정작 제 말엔 답을 주질 않으시고. 다른 소릴 하십니다.”

“그러게.”

“뭐, 동생이 아니어도 예뻐해 주세요.”

투덜대는 아문의 얼굴이 언뜻 무감해 보여 제 말을 싫어하는 건지 좋아하는 건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정말 싫었다면 얼굴에 바로 표가 났을 터다. 이제, 케이든은 그걸 알았다.

그 사실이 어딘가 멋쩍으면서도 좋았다. 제 앞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문이 귀엽게만 느껴져서, 케이든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케이든은 손을 뻗어 아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짧은 백금색 머리카락이 케이든의 손가락 사이를 스쳤다.

아문은 그런 케이든을 말없이 바라봤다. 케이든이 조심히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손목에 걸린 팔찌가 모습을 드러내는 걸 두 눈에 담았다. 케이든의 약지에 똬리를 튼 반지를 보는 눈이 가늘어졌다.

“갑자기 만져서 미안해.”

아문의 빤한 시선을 느낀 케이든이 급히 손을 떼어 냈다.

“머리 정도야 마음대로 만지셔도 됩니다.”

“정말?”

“동생이 아니어도…… 예뻐해 주셔도 된다고 했으니까요.”

하. 말을 끝맺은 아문이 더는 참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스스로를 향한 비웃음이었다.

얼떨떨한 낯을 하고, 케이든은 아문을 따라 웃었다. 다가올 연회가 더는 걱정이 되지 않았다.

* * *

수도에 거처하는 모든 황족이 황제의 뜰로 모여들었다. 황궁 안에 기거하는 이들부터 궁을 지키는 벽 너머에 사는 이들까지,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황제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들이 오늘 연회에 참석한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자한 메케리우스. 헬리오의 황족들은 오랜만에 수도 황성을 찾은 사령관에게 얼굴을 비치기 위해 나섰다.

참으로 열렬한 환영의 물결이 이어졌다.

몸이 아픈 이는 그 옆에 치료 마법사와 의사를 대동하고, 일이 바쁜 이는 일거리를 품에 끌어안은 상태로 뜰에 발을 들였다. 황제와 그의 동생 앞에 얼굴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에 눈 밑이 캄캄해진 채로도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황제는 햇볕 가림막 아래에 마련된 상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뜰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하는 이들을 보는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삐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득달같이 연회에 참석해 웃고 떠드느라 한창인 인간들의 꼴이 얄미워 그랬다. 그 속셈과 욕망이 참으로 단순해 보였다.

자한 메케리우스는 세상 모든 일에, 심지어 제 가족들에게마저 초연한 황제가 아픈 손가락처럼 여기는 막냇동생이었다.

자한이 수도에 머무는 짧은 시간은 황족이며 귀족들이, 관료들이 황제에게 호감을 살 몇 안 되는 기회였다. 잔뜩 쌓인 미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 고로, 오늘 역시 지난 연회에서처럼 자한을 향한 구애에 가까운 아첨이 이어질 예정이었다.

케이든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물론, 연회에 모인 이들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무인도를 구경하듯 케이든을 신기하게 바라보긴 했다. 하지만 아직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자한 사령관이나 저 위에 앉은 황제며 그 옆의 황비, 그리고 성격 나쁜 황태자와의 대면을 걱정하고 준비하는 게 먼저였다. 갑자기 모습을 내보인, 좋지 못한 소문 속의 황태자비에게 관심을 주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아사드가 케이든에게 붙는 묘한 관심이나 무례를 막아 내기도 했다. 그가 어떤 행동을 보인 건 아니었다. 단지, 눈치가 뭔지 아는 사람이라면 황태자비에게 말을 걸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할 형형한 눈을 하고 케이든의 옆에 서 있었을 뿐이다.

왜인지 황태자의 심사가 단단히 뒤틀려 보이는 게…… 건드리면 터질 것이 분명했다. ‘자기 반려가 창피하면 데리고 나오질 말지 왜 남들한테 성질을 부리냐.’ 누군가 몰래 꿍얼거릴 정도였다.

케이든 역시 아사드의 눈치를 봤다. 예민하게 날이 선 아사드의 분위기가 겁이 나기도 했지만, 그가 자신의 친척들에게 너무 뾰족하게 구는 듯해 걱정이 들었다.

저 때문에 날이 서서 그러는 건지, 원래도 친척들에게 차가운 건진 알 수 없었다.

“전하, 저희가 뭘 했다고 이리 냉랭하게 구시나요? 다른 날도 아니고 자한 님이 아크에 오신 기쁜 날에.”

지난번 연무장에서 마주했던 쌍둥이 티티와 네프도 아사드를 향해 훌쩍이는 척을 했었다. 왜 황태자비님께 말도 못 붙이게 하냐고 투덜대면서였다.

하지만 아사드는 쌍둥이들과 저의 대화를 막지 않았었다. 티티는 아사드의 무뚝뚝한 얼굴에 지레 겁을 먹고 우는소리를 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저 반려자와 함께 연회에 등장한 아사드를 놀린 것에 가까웠으리라.

그래도 아사드가 연회 내내 냉랭한 태도를 고수하진 않았다. 적어도 케이든에겐 그랬다.

물론, 케이든에게 굳이 말을 걸거나 살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사드는 그저 케이든에게 계속해 시선을 건넸다. 제 신부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기도, 자신이 그에게 선물한 장신구들을 매만져 보기도 했다.

케이든은 그런 아사드의 행동이 참 상냥하다고 생각했다. 황태자가 황태자비를 괴롭히고 있다며 사람들이 숙덕대는 것도 모르고서 말이다.

하지만 아사드에게 계속 챙김을 받다 보니…… 점점 불안한 심정이 됐다. 내 비루한 모습이 신경 쓰여 저러는 걸까? 그나마 단정하게라도 보이게 하려고 외관을 살펴 주는 거다. 그런 염려가 떠올라 케이든은 안절부절못하게 됐다.

연회에 참석한 이들 모두가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게만 보여 더욱 마음이 불편했다. 손님이 많은 연회장에 일을 도우러 갔다가 도련님께 쫓겨났을 때가 떠올랐다.

아사드가 괜한 수고를 들일 일이 없게 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케이든은 아사드보다 먼저 스스로의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면 슬쩍 고개를 숙여 얼굴을 숨겼다. 역시 흉터를 가렸어야 했나. 조금 늦은 후회 또한 들었다.

흉터를 가리는 것은, 연회에 오기 직전까지도 고민했던 문제 중 하나였다. 하나 저를 돌봐 주는 시종들이 왜 흉터를 가려야 하냐며 너무 놀라는 바람에 제 의견을 피력하는 걸 그만뒀었다.

〈엘바의 멍청이들이, 그 흉터가 당신의 흠이라고 떠들어 대던가? 하지만 여긴 사막이야. 고작 이런 게, 당신의 흠이 될 순 없어.〉

아사드는 제게 그렇게 말해 줬지만……. 막상 호의적이지 못한 시선을 받게 되니 모든 게 신경 쓰였다. 긴 천으로 얼굴을 가렸던 혼인식 때가, 차라리 더 마음이 편했었다.

“더운 건가.”

아사드의 목소리가 생각에 잠긴 케이든을 두드렸다.

케이든은 놀라 옆을 봤다. 살짝 몸을 숙인 아사드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빤히 들여다본다는 말에 가까운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

“흠, 자리로 돌아가자고 말하려 했는데…….”

아사드의 손이 케이든의 이마에 닿았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그에게 말을 걸었을 때보다 더 놀라 버렸다. 하마터면 뒷걸음질을 칠 뻔했다.

제 이마를, 뺨을 더듬는 손이 뜨거웠다.

정작 열을 머금어 뜨거운 건 아사드의 손인데, 왜 제게만 덥냐고 묻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함께 있을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비슷한 물음을 건넸었다. 저는 조금도 덥지 않은데 말이다.

아사드가 만든 그늘 밑에서, 케이든은 자신을 만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해를 등지는 바람에 어두워진 아사드의 두 눈 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저쪽엔 뭣 같은 노인네들이 몰려 있으니까…… 여기에 잠깐 서 있어. 쓸데없이 말 거는 놈이 있으면 쓰레기 보듯 보고,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면서 무시해. 제국어를 왕국어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건 맞잖아.”

아사드의 태평한 말꼬리를 붙잡고 어떻게 그러냐고 답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결국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당연히, 아사드의 말대론 하지 못할 테지만.

아사드는 곧장 시종 하나를 불러왔다.

“내가 올 때까지. 황태자비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모시고 있어.”

갑자기 지목당한 시종에게 아사드는 신신당부했다. 괜스레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차가운 낯을 한 채였다.

케이든은 돌아선 아사드가 마법사들을 향해 가는 걸 지켜봤다. 멀찍이 서 있던 별궁의 시종장 사반이, 어느 틈엔가 아사드의 옆에 붙었다. 아사드의 얼굴에 탐탁잖은 기색이 엿보였음에도 뒤로 물러서질 않았다.

‘꼭…… 말 안 듣는 손자랑 걱정이 많은 할아버지 같네.’

반짝이는 하얀빛이 꽃처럼 피어난 등나무 아래에서, 케이든은 작아진 아사드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한 걸음 물러서 눈에 담게 된 연회의 풍경은 참으로 평온하고 화목해 보였다. 오가는 말소리 위에 얹어지는 악사들의 연주가 그 평화에 큰 몫을 했다.

케이든은 이내 사람들 틈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헤카였다.

헤카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사드의 어린 친척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케이든을 향해 반갑다는 듯 먼저 웃어 보였다.

헤카는 딱 한 번 만나 본 게 다인 사람이었다. 하나 낯선 이들만이 가득한 황제의 뜰에서 보니 괜스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케이든의 입가에도 저절로 미약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 순간, 케이든이 마주했던 평화로운 풍경이 별안간 일그러졌다.

케이든은 시야의 바깥에 서 있던 외부인에게 팔이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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