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시선이 걱정되십니까?”
“……응.”
“이건 케이든 님을 위한 선물입니다. 남들을 위한 선물이 아니에요. 케이든 님께, 황궁의 사람들에게 과시할 요량으로 보내신 선물도 아니고요.”
“…….”
「마음 쓰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 케이든 님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거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 기분 뭣 같게 만드는 눈빛을 보내는 인간이 있다면, 전하께서 케이든 님을 대신해 그 인간의 뺨을 쳐 주실 겁니다. 모기처럼 왱왱대며 헛소리를 지껄이는 인간들도 마찬가집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저는 케이든에게 당신이 황태자의 반려라는 걸 보여 줘야 한다고, 너무 수수하게 하고 다니면 황태자가 곤란해진다는 소리를 했었다. 하지만 이젠, 남들의 눈을 신경 쓰지 말라며 열을 올린다.
한 입으로 두말을 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헬리오의 황태자가, 누군가의 기분을 맞춰 주겠답시고 휙휙 말을 바꿔 대고 있다니.
“……케이든 님은 충분히 아름다우십니다. 그걸 몰라보는 놈들은, 눈이 발에 붙었다고 생각하세요.”
리헤트가 했던 말을 빌려 온 아문이 제국어로 작게 중얼거렸다. 제 신부가 더욱 확실히 알아들을 왕국어로 말하자니 자존심이 상해 그런 거였다.
하나 솔직히 내뱉은 말이기도 했다. 제 신부가 여러모로 못나긴 했어도 그 얼굴만은 잘나지 않았는가. 리헤트와 다투던 남자 시종처럼 눈이 발바닥에 달린 것들이나 케이든이 잘생겼는지 모르겠다는 헛소리를 하겠지.
아문의 말을 들은 케이든은 입을 달싹이다가는 결국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손끝으로는 열린 상자 속에 든 반투명한 천만 만지작 댔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일단은 못 들은 척을 하는 몸짓이었다.
“천이,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다는 게 신기해.”
케이든은 다급히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저렇게 사람 말을 믿지 못해서야. 아사드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뭐…… 아문이 저 남자의 반려는 아니니 적당히 말을 걸러 듣는 모습이 나쁘진 않았다.
“황태자 전하가 가끔 입으시는 긴 숄도 이런 소재로 만들어지는 거겠지?”
“하이크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맞습니다.”
아문은 케이든의 말을 듣고 내심 놀랐다. 엘바의 왕족이며 귀족들의 잠옷을 만들 때 쓰는 천도 그 생김새만은 이와 엇비슷할 터다. 그런데도, 이걸 보고 저를 먼저 떠올리다니. 그게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어딘가 멋쩍었다.
“어릴 때, 요정 왕국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아름다운 요정들의 세상이 숨겨져 있다고 하더라.”
뜬금없이 요정 얘기를 꺼낸 케이든이 말을 이어 갔다.
“요정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게 궁금했었어. 내 나름대로 상상해 본 적도 많았던 것 같아. 나이를 먹으면서 완전히 잊었지만.”
“…….”
「그런데…… 이런 하늘하늘한 천을 몸에 두른 황태자님을 뵈니까, 갑자기 옛날에 들었던 요정 얘기가 생각나는 거야. 요정 왕국의 왕이, 황태자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더라.」
다시 고개를 든 케이든이 아문을 봤다.
「황태자 전하 등 뒤에 꽃가루가 묻은 요정 날개가 숨겨진 건 아닌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상을 한 적도 있어.」
“요정…….”
“내가 한 말, 전하껜 비밀로 해 줘. 약속해 줄 거지?”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케이든이 말을 속삭였다. 그 모습이 어딘가 장난스럽게 느껴졌다. 그와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헬리오의 전설 속에 나오는 요정들을, 그러니까 짐승의 머리를 달고 있는 괴물에 가까운 것들을 떠올려 보던 아문의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북부의 옛이야기 속에 나오는 예쁜 요정 세상이 늦게나마 생각나 그랬다.
온몸을 꽁꽁 가리고 다니는 케이든과 달리, 아사드는 상의를 챙겨 입지 않았다. 볕 아래에 자신의 육체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분에 따라 가끔 하이크를 걸치기도 했으나 그 횟수가 많지는 않았다.
다른 황족들 역시 아사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차림새로 궁 이곳저곳을 누볐다. 그들이 케이든처럼 살갗을 가리는 건, 사막의 모래 위에 설 때뿐이었다.
노출이 많은 헬리오의 복식은 전통과 편의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물론, 제 육체의 강건함을 세상에 내보이기 위함이라는 이유도 공존했다. 노인이 되어서도 몸을 단련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는 분위기가 헬리오 전역에 퍼져 있을 정도로 사막의 사람들은 강인한 외관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니, 근육이 잡힌 몸을 그대로 비치는 하이크를 보며 요정 세상을 떠올렸다는 케이든의 말이 이상하면서도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저 남자의 눈에는 제법 아름다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요정 중의 왕을 시켜 줬으니 불만은 들지 않았다.
사막 사람들의 차림새를 어색하고 어렵게 느끼는 줄 알았던 케이든이, 요정 날개를 핑계로 하이크 너머의 제 몸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줄이야. 음욕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이던 남자에게 조금쯤은 음흉한 구석이 있었네 싶었다.
‘뭐, 사람이라면 눈길을 보내는 게 당연한 몸이지.’
저 바보 같은 남자를 만날 땐 하이크를 입어 줘야겠네 싶었다.
당연히, 케이든의 말을 신경 쓰는 건 아니었다. 그저 주위에 아름다움을 나누는 행위인 셈이다. 선물을 준 보람을 느끼려면 반지도 제 손으로 끼워 줘야 할 테니, 당장 오늘 밤 케이든을 만나야겠다 싶었다.
올라간 입꼬리를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아문은 그의 앞에 보이는 천을 손끝으로 만져 봤다. 케이든을 따라서였다.
제게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천이었다. 하지만 하염없이 만지작거리다 보니, 케이든의 말처럼 부드러운 모양이기는 했다. 손끝에 닿는 천의 촉감이 유달리 좋게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정말, 선물이 싫지는 않으시죠?”
말의 갈기를 쓰다듬듯 천을 쓸어내리던 아문이 제 옆에 있는 남자에게로 힐끗 눈을 돌렸다. 케이든은 이미, 저를 보고 있었다.
자신의 말벗과 시선이 마주친 케이든은 다시 한번 작게 웃어 보였다.
“그럼. 당연하지.”
“……황태자 전하께도 직접 말씀해 주세요. 제가 대신 말을 전하는 것보단, 그 편이 나을 겁니다.”
흠흠. 여전히 천에 손이 붙들린 채로 아문은 괜히 목소리를 가다듬어 봤다.
“응, 꼭 그럴게. 마음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릴 거야.”
그렇게 말하는 케이든의 얼굴이 너무 비장했다.
그래, 차라리 비장한 게 나았다. 케이든이 선물을 앞에 두고 울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문의 선물을 더 좋아하는 기색이기는 하지만, 서운하진 않았다.
케이든과 저는 진짜 부부도,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까. 고작 그런 일을 가지고 서운함을 느낄 관계가 아닌 거다.
지금, 케이든은 어두운 천막 안이 아니라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방 안에 있었다. 그는 서글픔에 목이 졸린 사람처럼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한낮의 햇살이 그의 새까만 머리칼 사이로 부드럽게 어른거렸다.
제 신부는 웃고 있었다.
‘그거면 됐지.’
그거면 된 거다. 아문의 모습으로, 아사드는 케이든을 따라 웃음 지었다.
* * *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던 케이든이 슬그머니 눈을 떴다. 조심히 제 왼손을 들어 올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텅 비어 있었던 약지를 바라봤다. 정확히는, 약지를 단단히 끌어안은 반지를 쏘아봤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심각한 얼굴을 하고서였다.
케이든의 빈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고 떠난 이는, 아사드였다.
새들도 우는 걸 멈춘 이른 밤, 아사드는 불쑥 케이든의 침실에 들이닥쳤었다.
낮은 테이블 위에 정체 모를 작은 보석함 하나를 툭 내려놓은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가 들고 온 보석함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케이든은 아사드가 저를 찾아온 이유를, 그가 의무적으로 가져야 하는 만남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유도 없이 건너뛰기 뭣해 저를 찾아왔을 거라고, 아사드의 방문에 특별한 목적은 없을 거라고 여겼다. 누군가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아사드가 요즘 들어 거의 매일 저를 성실히 찾아오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아사드의 앞에서 케이든은 대개 청자의 역할을 했다. 아사드가 쓰는 제국어를 똑바로 알아듣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그랬다.
하지만 오늘은, 기다렸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아사드가 제게 보내 준 선물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최대한 말을 더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진심 어린 감사를 건넸다. 아사드는 별것 아니었다는 듯 씩 웃어 보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
입을 다문 케이든은 말이 없는 아사드의 눈길을 좇았다. 제 얼굴에서 옷의 목깃으로, 가슴팍으로, 테이블 위에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는 두 손으로 떨어지는 시선을 느꼈었다.
아사드는 케이든의 왼쪽 손목을 감싼 평범한 팔찌를 빤히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케이든의 텅 빈 손가락으로 미련 없이 눈을 옮겼다. 그리고 더는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저는 모를 문제가 있는 걸까.
눈치를 보던 케이든은 뒤로 손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결국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아사드가 케이든의 손을 붙든 게 먼저였으니까.
〈왜 반지를 안 끼고 다녀?〉
〈……반지요?〉
〈혼인 반지.〉
여상한 낯으로 아사드는 답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