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23)화 (23/97)

‘케이든 같은 남자와 내가 잘 어울린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속으로 혀를 찬 아문이 슬그머니 시종방을 나섰다. 자그마한 전투 아닌 전투가 끝을 맺은 뒤 퍼지게 된 즐겁고 떠들썩한 분위기를 허물어트리기 싫어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떴다.

두꺼운 문이 닫히자 거짓말처럼 고요가 찾아왔다. 아문은 복도 위에 깔린 적막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이는 아문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아문.”

리헤트의 부름에 놀란 척 걸음을 멈춘 아문이 그를 향해 부지런히 다가오는 그녀를 말없이 바라봤다.

“황태자비님께 가는 거지?”

“네.”

머지않아 리헤트는 아문의 지척에 서게 됐다. 그녀의 반듯한 시선이 자신보다 키가 큰 아문의 두 눈에 닿았다.

리헤트는 호감이 가는 앳된 외모를 가진 남자를, 순한 척 웃고 있지만 어딘가 냉소적으로 보이는 이의 낯을 살폈다.

“아문, 너 조심해.”

그러다 입을 열어 간결한 경고를 보내 왔다.

조심하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시작하려고 다짜고짜 저런 소리를 입에 담는 걸까. 시종방에서도 그렇고, 리헤트가 오늘따라 영 이상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조심해야 해요?”

“네 눈.”

“눈이요?”

“그래. 눈 간수 잘해.”

내 눈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도통 뜻 모를 소리를 하는 리헤트에게 아문은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가 끊김 없이 곧장 이어졌기에, 일단은 입을 다물었다.

“눈만이 아니야. 페로몬 간수도 잘해야지. 나야 베타라서 잘 모르지만, 셀라 언니가 너한테서 알파 페로몬이 느껴진대. 점점 더 짙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든다고 하더라.”

“페로몬?”

아사드는 당황스러웠다. 저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애초에, 아문이라는 인물의 형질은 베타였다. 제 능력은 마법사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단순한 변신 마법 따위와는 달랐다. 모습을 바꿀 때, 외관뿐 아니라 내부의 형질까지 섬세하게 조절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페로몬 간수를 잘하란 충고를 듣다니. 말이 안 됐다.

이건 비단 아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아사드의 문제이기도 했다. 발현 이래로 지금껏, 아사드는 페로몬과 관련한 실수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가족들도 그의 체향을 모를 정도였다.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질 않네요.”

“너는 황태자비님 뒤에 서야 하는 사람이잖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지.”

“저 베타인 거 아시잖아요. 다른 사람 페로몬을 제 걸로 착각한 거겠죠.”

“그 언니 개들보다 냄새를 더 잘 맡아. 남의 페로몬에 민감하기도 하고. 성인이 돼서도 형질 발현 안 했던 애들, 다 그 언니한테 경고받고 알파 되고 오메가 됐는데. 그건 모르지?”

리헤트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조금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비밀을 고백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 아문을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시간 날 때 의사를 찾아가 봐. 성인식을 치르기 전이니까, 다른 사람 페로몬에 영향을 받기 쉽잖아. 사랑, 아니, 심적 변화가…… 형질을 변하게 한다고도 하고.”

잠시 속으로 말을 고르던 리헤트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아문. 황태자비님께선, 황태자 전하의 하나뿐인 반려자셔. 그걸 명심해.”

“…….”

“남의 일에 너무 참견하는 것 같아서 길게 말하고 싶진 않아. 그래도 넌 똑똑하니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었을 거야.”

아니.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속으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사드는 제 뜻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렇게 해 봤자, 리헤트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잔소리나 몇 마디 더 듣게 될 테니 말이다.

“자, 여기까지. 난 다시 돌아갈게. 나중에 또 보자.”

아문의 팔뚝을 가볍게 툭, 툭 친 리헤트가 작별을 고했다.

미련 없이 돌아선 리헤트는 다시 시종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세 리헤트의 뒷모습에서 눈을 뗀 아사드는 제 손목에 코를 대어 봤다.

아문에게선 그 어떤 페로몬 향도 느껴지질 않았다.

본래의 몸으로도 페로몬을 내보이는 실수를 하지 않는데, 아예 베타로 만들어 둔 몸으로 그럴 리가 있나. 이상한 오해를 받았네 싶었다.

‘형질이 변한 아문이…… 황태자비에게 허튼짓이라도 할까 봐 걱정한 건가.’

형질이 발현한다고 해도, 첫 희락기가 금방 오는 게 아닌데 말이다.

하나 리헤트의 경고가 과했다고 여길 생각은 없었다.

저야, 그런 걱정이 말도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저는 남의 페로몬 따위에 휘둘리지 않는 알파이고, 케이든은 페로몬이 없는 것과 다름없는 오메가니까. 하지만 리헤트는 제가 아사드 메케리우스인 줄 모르니, 그런 이상한 걱정을 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문. 황태자비님께선, 황태자 전하의 하나뿐인 반려자셔. 그걸 명심해.〉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 아문의 모습으로 받은 이상한 경고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케이든에게 신경 써 줄 이를 잘 골랐다 싶었다. 제 신부에게 접근할지도 모를 알파 놈들의 헛짓거리를 잘 관찰해 주겠지. 보고 역시 빠르게 올릴 게 분명했다. 아무쪼록, 사막의 모래 밑에 누군가를 파묻을 일이 없길 바랐다.

생각을 마친 아문은 가야 할 목적지를 향해 기분 좋게 걸음을 옮겼다. 거의 뜀박질에 가까운 걸음이었다.

* * *

서관 2층 복도에 대기하고 있는 짐꾼들에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한 아문이 굳게 닫힌 문에 손을 올렸다.

안 하느니만 못한 노크를 한 아문은 케이든의 답을 듣기도 전에 다급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이젠 제법 온기가 느껴지는 황태자비의 공간에 들어선 침입자는, 누군가 자신을 따라 침실에 발을 들이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사람처럼 곧장 문을 걸어 잠갔다.

황태자비의 처소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히는 건 저 한 명이면 충분했다. 그게 아사드 메케리우스건 아문이건 간에 말이다.

오늘, 케이든의 방에서 아문이 마주한 광경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아사드가 케이든에게 보낸 선물들 때문이었다.

너른 침실 왼편에 난 응대 공간의 반절을 고운 비단이며 직물, 장신구와 예술품 따위가 차지했다. 케이든은, 바로 그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아니,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정말이지, 제 신부는 마음을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표정만 봐도 그가 어떤 심정인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케이든은 제게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가끔은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 간극이…… 아사드는 어려웠다.

얼마 전, 아사드는 아문의 모습으로 케이든과 함께 외벽 바깥에 선 시장을 방문했다가 곤혹스러운 일을 겪었다. 정말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그 짧은 사이에 케이든이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춘 거다. 케이든을 잘 지켜보고 있으라 돈을 쥐여 줬던 인간은, 어떤 남자 때문에 제 신부가 도망쳤다는 말과 함께 변명만 웅얼댔었다.

그날, 아사드는 지나가던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네가 내 신부를 위협했냐며 주먹을 들 뻔했다.

사실, 제 신부를 찾는 과정에서 몇몇은 정말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어쩌겠는가. 사람을 찾는 일에 협조를 안 해 주는데.

“케이든 님.”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걸로는 사막 제일의 자리를 차지할 대단한 재주를 가진 제 신부에게, 아사드는 말을 걸었다. 아문의 모습을 하고서였다.

“무슨 즐거운 일이 있으시기에, 제가 왔는데도 봐 주질 않으십니까.”

“……아문.”

케이든은 아문을 향해 몸을 틀었다. 걱정이 한가득 묻어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쌓인 물건을 등지고 선 남자의 모습이 아문은 만족스러웠다. 선물은 황태자비가 직접 확인할 것이니, 곧장 의상실과 전시실로 보내지 말고 침실 한편에 먼저 쌓아 두라 명해 뒀었다. 시종장이 제 말을 잘 지킨 듯했다.

“전하께서 이렇게 많이…… 뭘 보내 주셨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케이든이 아문에게 더듬더듬 생각을 전했다.

‘어쩌긴. 마음에 안 차는 건 치우고 마음에 드는 건 가지면 되지.’

온전히 자신의 소유인 물건들 앞에서 쩔쩔매는 케이든을 보며 아문은 속으로 혀를 찼다.

“바쁘신 황태자 전하께서 특별히, 시간을 내 직접 고르신 귀한 것들입니다. 오직 케이든 님을 위해서요.”

아문은 케이든에게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케이든의 앞에서 제국어를 할 땐, 꼭 궁내의 학자들처럼 정확한 발음을 하게 됐다.

황궁을 드나들 수 있는 허가증을 가진 상단의 상단주들을 불러 앉혀 두고, 그 앞에서 한참을 떠들어 나오게 된 결과물이란 배경까지 알려 주진 않았다. 그건 너무 속 보이는 소리가 아닌가.

그깟 선물이야 천 번, 만 번은 더 안겨 줄 수 있었다.

제국의 황태자가 되어선, 아문 같은 시종에게 밀릴 수도 없었다. 그건 황태자라는 직함을 떼어 내고 그 자리에 남편이라는 말만 남겨 둔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유치한 생각이었다.

케이든은 쌓인 물건들과 아문을 번갈아 봤다. 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정신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였다.

불안한 듯 가만히 있질 못하는 케이든의 손을 따라 오르내리는 옷소매 사이로, 아문이 그에게 채워 준 팔찌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얇은 줄 한가운데에 자그마한 푸른 보석이 매달려 있는 평범한 팔찌였다.

‘소중히 간직하겠다더니. 정말 빼질 않네.’

혼인 반지는 낄 생각도 없으면서. 아주 밉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출나게 아름답지도 않은 팔찌를 눈으로 따르며 아문은 헛기침을 했다. 목이 타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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