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18)화 (18/97)

“전하께서 케이든 님을 지켜 주실 겁니다.”

“…….”

“감히, 그 누구도,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이 역시 시종과 황태자비가 나누기엔 적절하지 못한 대화였다. 아문이 케이든의 손을 붙잡은 것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 또한 무슨 상관인가? 지금 이곳엔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와 그의 배우자, 둘밖에 없는데.

「……곧, 나름의 활기를 품은 자그마한 행사 하나가 열립니다. 궁 내부의 일은 아니고, 저 민가 너머의 일이지만요.」

대화의 주제를 바꾼 아문이 케이든을 놓아줬다. 굽혔던 몸마저 뒤로 무르자, 얼떨떨한 얼굴을 한 케이든이 슬그머니 테이블 아래로 손을 숨겼다.

「넉 달에 한 번, 서대륙 전역의 상인들이 아크로 몰려와 장사를 합니다. 그들이 세운 천막이며 가판이 외벽 전체를 에워쌀 정도죠. 두 번의 밤이 지나면 짐을 챙겨 아크를 떠나고요.」

“그, 그렇구나.”

「아크에서 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은 이 장날만 손꼽아 기다린다고 하더군요. 북부의 물건이며 음식을 파는 상인도 많이들 올 겁니다.」

제 말을 경청하는 케이든과 눈을 맞추며, 아문은 말을 이어 갔다.

「내일은…… 장이 서는 외벽 너머로 나가 볼까 합니다. 저와 케이든 님, 단둘이서요.」

아문의 입을 통해 아사드가 내놓은 제안은, 지극히 즉흥적이고 무책임한 것이었다. 정오의 야외 만찬에서 듣게 된 황태자비를 향한 험담이며 어머니와의 만남, 농장인지 쓰레기장인지 모를 마굴에서 온갖 구박을 당하며 산 듯한 남자의 얘기 따위가 아사드의 충동에 불을 질렀다.

적어도 케이든이 제 옆에 있는 동안엔, 아무도 그를 우습게 보지 못하도록 할 작정이었다.

그뿐인가. 하고 싶어 하는 건 그게 뭐가 됐든 하게 해 줄 거고, 경험할 수 있는 건 뭐든 경험하게 해 줄 거다. 케이든과 제가 함께할 시간이 얼마나 될까 싶었다. 고작 몇 년 정도나 남았겠지. 그 짧은 기간을, 굳이 나쁘게만 보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사드 메케리우스가, 신에게 선택받은 자신의 반려를 즐겁게 해 주고 싶다는데 쓸데없이 입을 대는 것들은 없을 거다. 설령 누군가 참견을 한다고 해도 입을 막아 버리면 됐다.

〈보기 싫어 감춰 둔 줄 알았던 짐이, 사실 황태자의 보물일지도 모른다는 헛소문이 퍼질 거야. 그런 이야기가 네게 도움이 될까?〉

어머니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황실 전체에 퍼지고 내려앉을 소문 따위야, 훗날 명을 달리한 황태자비를 아꼈던 황제의 일화 중 하나로 남으리라. 나쁠 일은 아니었다.

「내가 밖으로 나가도 되는 거야?」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진 아문에게 케이든은 조심히 물었다.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는 눈을 하고서였다. 걱정이 많은 사람다운 눈빛이었다.

「몰래 나가면 됩니다. 때마침 쓸데없는 모임이 있어 궁 전체가 번잡해질 예정이니, 그 틈에 나가면 적당하겠군요.」

「아문. 그러면 안 돼.」

「전하의 허락을 받지 않겠단 얘기는 아닙니다. 대신, 다른 이들에겐 비밀로 해야겠죠. 호위만 열 명가량을 등 뒤에 달고 다닐 게 아니라면요.」

「…….」

「안내자도 호위도, 저 하나면 충분합니다.」

아문의 자신만만한 낯을 마주한 케이든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치 한숨처럼 흘러나온 웃음이었다.

그런 케이든을 보는 아문의 왼쪽 눈썹이 위를 향했다. 또. 저를 보면서 귀엽다는 생각 따위를 하는 게 확실했다. 정말…… 짜증 나는 남자였다.

「제국어 수업의 일환이라고 생각하세요. 사람들과 부딪쳐 가며 말을 배우는 시간인 겁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귀에 잘 담아도 큰 도움이 되겠죠. 궁 내부에서 쓰는 말과 궁 바깥에서 쓰는 말이 또 다르니, 그 다름을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테고요.」

혹여 혼이라도 날까 봐 망설이는 케이든을 향해, 아문은 당근을 흔들어 봤다. 제국어 공부라는 양념을 잔뜩 묻힌 당근이었다.

「눈으로는 황궁 밖의 지리를 익힐 수 있겠군요. 여러모로 케이든 님께 득이 될 일입니다.」

잠깐 밖을 나갔다 오는 게 뭐라고. 케이든은 자신이 함께 시간을 보낼 이가 쓰레기 굴의 수장인 도련님이란 작자가 아니라, 그와 시끄러운 마찰 없이 잘 지내 보겠다고 마음먹은 아사드 메케리우스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전하께서 허락해 주실까?”

“네. 확신합니다.”

아문의 낯을 한 아사드가 답했다.

“밖을 나섰다가, 자리에 없는 걸 들키게 되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만약 들키더라도 괜찮고요.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허락하신 것을.”

걱정 없이 태평하게만 보이는 아문을 앞에 두고, 케이든의 소리 없는 고민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내 무언갈 결심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갈게.”

“마음이 바뀌셨군요.”

“아문 너랑 있으면,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어.”

케이든의 말에 아문은 당혹감을 느꼈다. 아니, 당혹감이라기엔 너무 가볍고 붕 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기분일까. 아문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저를 믿으십니까?」

황궁 밖으로 나가자고 사람을 현혹해 놓고 갑자기 이런 소리를 꺼내는 꼴이 웃긴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아문은 저도 모르게 케이든에게 묻고 말았다.

“당연히 믿지.”

“왜요?”

“그야 아문 너는…… 항상, 나를 좋은 곳에 데려가 줬으니까. 이번에도 정말 좋은 곳에 데려가 줄 걸 알아.”

미쳤군.

부드럽다 못해 간지러운 말을 들은 아문이 케이든에게서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감사합니다, 그 상투적인 맺음말을 전한 건 2분 정도가 더 지난 뒤였다.

장터가 아니라 이아로강 너머의 사막으로 가면 어쩌려고. 모래 언덕 위에 몰래 버려두고 오면 어쩌려고 저럴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소리를 아문은 괜히 속으로만 중얼거려 봤다.

케이든에겐 제국어 말고 상식을 먼저 가르쳤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사람을 너무 믿지 말라고 알려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문은 케이든을 힐끗 훔쳐봤다. 저를 귀여운 어린애 보듯 대하는 건 싫지만, 저 우울한 얼굴에 웃음이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는 건 나쁘지 않았다.

‘내일…… 손잡고 다녀야겠다.’

저 바보를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색이 짙은 사막의 노을을 등진, 제 하나뿐인 신부를 두 눈에 담으며 아사드는 생각했다.

* * *

삼엄한 경비 아래에서 침묵하던 외벽 너머가 떠들썩해졌다. 시끄러운 활기의 주역은 바로, 상인들이었다.

넉 달에 한 번. 교역로가 조건 없이 개방되는 날을 맞아 수도 아크로 서대륙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멀리 북쪽 끝자락에서부터 대륙 최남단의 항구 도시, 그리고 바다 건너 동대륙의 이국에서 온 상인들까지. 모두가 물건을 팔기 위해 또 새로운 거래처를 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아크를 찾았다.

상인들만 많은 것도 아니었다. 수도의 외벽 한 바퀴를 빙 두르고도 남은 상단의 천막과 가판대 사이로, 다양한 생김새와 옷차림을 가진 수많은 이들이 바쁘게 지나갔다. 얼음과 함께 차가운 음료를 파는 사람들 역시 상인들과 구경꾼들 사이를 빠르게 돌아다녔다.

아문에게 단단히 손이 붙들린 케이든 역시 혼란한 장터의 이곳저곳을 부지런히 돌아보고 있었다. 꼭 다른 세상에 발을 디디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들뜬 상태였다.

“아문, 저것 봐.”

붙잡힌 손을 살짝 흔들며 케이든은 속삭였다.

그가 자유로운 손을 들어 가리킨 것은 고서적을 다루는 어느 상단의 천막이었다. 덮개를 위로 걷어 둔 천막 아래 그늘에 책 대신 하얀 공작새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높은 단 위에 선 공작새는 그를 구경하러 온 어린애들을 도도한 얼굴로 내려다보는 중이었는데, 마법사 하나가 그런 공작의 옆을 지키며 주변의 온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새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새를 자랑하러 여기까지 왔나 봅니다.”

털이 반질반질한 공작새의 뒤로 밀려난 고서적들을 보던 아문이 웃었다.

“가지고 싶다면 말씀하세요.”

이 거대한 장터에 들어선 후로 제게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케이든에게 아문은 말했다. 더 가까이 몸을 붙이면서였다.

“책을?”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케이든이 아문을 보며 물었다.

“아뇨. 저 공작새요.”

케이든은 아문의 답변이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당연히 농담이겠지만, 그 표정이 너무 진중해서 그랬다.

“괜찮아.”

아무리 농담이라도, 저 정도로 사랑받고 사는 공작을 넘겨받고 싶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다시 걷자.”

저보다 키가 작은 아문과 편히 눈을 맞추며 케이든은 슬쩍 웃었다.

귀한 안내자를 붙든 손에는 가볍게 힘이 들어갔다. 아문의 손을 놓칠까 걱정돼 그런 거였다. 함께 궁 밖으로 나오는 과정이 제법 험난했던 데다, 그 과정에서 눈에 담았던 풍경 역시 낯설기 그지없었기에 이런 식으로 아문에게 의지를 하게 됐다. 아문이 없이는 궁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 더욱 그랬다.

정오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한 이른 시간에, 아문은 케이든을 찾아왔었다.

아문이 마련해 뒀던 옷으로 환의한 케이든은, 곧장 그의 손에 이끌려 정처 없이 걸어야 했다. 그러다 복도의 기둥이나 정원의 덤불 따위에 몸을 숨겼고, 가끔은 뜀박질을 했으며, 어쩌다 마주친 시종장에겐 빤한 거짓말을 내놨다.

너른 정원 구석에 외따로 있는 조각상을 건드리자 나온 어두운 공간으로 발을 들이며, 케이든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가 싶었었다. 등불의 어스름한 빛에 의지해 어지러운 나선 계단을 내려가면서는 자신이 꿈속에서 헤매고 있음을 확신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황궁 내벽 너머에 있는 민가에 도착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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