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비님을 뵙습니다.”
얼굴이 똑 닮은 여자와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케이든에게 인사를 건넸다.
‘쌍둥이…….’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들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케이든이 급히 몸을 일으켰다.
“다들, 황태자비님을 뵙고 자기 이름을 알려 드리고 싶어 해요. 하지만 황태자님이 무서워서 눈치만 보는 중이죠. 그래서 저희가 먼저 나서 봤습니다. 전하께서 사람들에게 붙잡혀 있는 틈에요.”
케이든보다 살짝 키가 작은 여자가 속삭이듯 말을 붙여 왔다. 다정다감한 웃음과 함께였다.
티티와 네프. 황실의 유일한 쌍둥이 남매는 황제의 여동생이자 군정장관인 미렌네 메케리우스의 자식들이었다. 그러니까, 아사드의 사촌이었다.
눈앞의 쌍둥이가 누구인지는 알았다. 하지만 하루 대부분을 별궁에서만 보내는 데다 황실의 행사나 모임에 얼굴을 내보이지도 않는지라, 그들을 깊게 알지는 못했다.
그래도 아문에게 받은 가르침만은 확실히 기억했다.
아문은 케이든에게 그가 가까이 둬도 괜찮을 이들과 가까이하면 안 될 이들을 나눠 알려 줬었다. 다소 빡빡한 아문의 기준에 따르면, 지금 케이든의 앞에 있는 쌍둥이 남매는 그가 가까이하면 안 될 이들이었다. 그저 사람들과 어울리길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왜인지 아문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같았다. 이상할 정도였다.
다른 이들처럼 근육질의 몸을 과감히 드러낸 쌍둥이의 얼굴에만 시선을 주려고 노력하며, 케이든은 두 사람에게 마주 인사했다. 간단한 말 몇 마디만을 건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제가 제국어를 똑바로 한 게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와, 제국어 잘하시네요. 정말 잘해요.”
사람 좋게 웃어 보인 티티가 말했다. 과묵한 남동생 네프를 대신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잘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해 줬다.
“옷은 여전히…… 외국인처럼 입고 계시지만.”
길쭉한 손으로 케이든의 목깃을 매만지며 티티는 속삭였다.
사막의 전사들은 정말 민첩하구나. 눈을 속인 빠른 손놀림에 케이든은 감탄했다. 티티가 손을 뻗어 목깃을 만질 때까지, 저는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별다른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기척을 느끼지 못한 건, 별안간 나타난 손이 티티의 손을 쳐 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훈련은 끝났어.”
케이든에게서 제 사촌의 손을 떼어 낸 아사드가 말했다.
뾰족한 눈으로 쌍둥이 남매를 바라보던 아사드가 케이든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시종이 가져온 반투명한 숄을 걸친 아사드는 케이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사촌들과 말을 나눌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아, 반려자를 없는 사람 취급 한다던 황태자 전하는 어디에 계신 건지. 욕심 많은 전하를 모르는 바보들이 이상한 소문을 낸 거겠죠?”
“돌아가자.”
웃음기를 머금은 티티의 말을 무시한 아사드가 케이든에게 말했다.
케이든은 갑자기 나타난 아사드의 눈치를 살피느라 티티의 말을 귀에 담지 못했다. 긴장한 상태에서 제국어를 편히 듣는 게 어렵기도 했다.
다만, 아사드가 그의 사촌들을 반기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사드를 향한 쌍둥이의 시선이 매우 호의적인 것과는 달랐다. 적어도 쌍둥이 남매는 그들보다 어린 아사드를 많이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아사드는 돌아올 답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소비할 뜻이 없었다. 그는 멍하니 선 케이든의 손을 붙잡고는 저벅저벅 걸어 연무장을 나섰다. 시종에게 따라붙지 말라 명하는 목소리가 무겁지 않은 걸 보아 기분이 나쁜 상태는 아닌 듯했다.
말없이 걷던 아사드가 돌연 걸음을 멈출 때까지, 케이든은 그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 아사드가 멈춰 서자 케이든 역시 그대로 멈춰 섰다.
그리고 케이든은 뜬금없는 소리를 듣게 됐다.
“미안.”
당혹스러운 걸 넘어 두렵기까지 한 말이었다. 놀라 답을 할 수도 없었다.
“당신에 관해 묻는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바로 못 갔어.”
“괘, 괜찮습니다.”
아사드가 케이든을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이내 케이든을 붙잡고 있는 자신의 손을 보고는 덜컥 미간을 구겼다. 케이든은 어느새 헐거워진 아사드의 손아귀에서 눈치껏 제 손을 빼냈다.
“더워?”
등 뒤로 슬그머니 손을 숨기는 케이든에게 아사드는 물었다.
“아뇨, 아닙니다.”
“아니긴.”
삐뚤게 웃은 아사드가 한쪽 손을 케이든의 뺨에 대어 봤다. 연무장의 열기를 머금어 뜨거운 손등이 살갗을 쓸어내리자 화상을 입은 것처럼 쓰라린 느낌이 들었다. 케이든은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다른 알파에게 목깃을 붙잡혔을 땐 가만히 있더니. 반려의 손길은 피하는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그게 아니라…… 전하의 손이 너무 뜨거워서……. 죄송합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어이가 없어 바로 말을 줄였다.
“내 손이 뜨겁다고?”
아사드는 케이든의 말을 비웃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봤다.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두 눈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내 손이 아니라 당신 얼굴이 뜨거운 거겠지. 열이 오른 게 맞았어.”
작게 한숨을 쉰 아사드가 주위를 둘러봤다.
케이든의 손을 잡아끈 아사드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얀 정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없는 정자 아래를 지나는 수로의 물이, 빛을 받아 분주히 반짝였다.
연무장을 벗어나기 무섭게 다시 그늘에 앉혀졌다. 케이든은 제 옆에 거리를 두고 앉은 아사드의 눈치를 부지런히 살펴야 했다.
잠시 정면을 보던 아사드가 이내 완전히 몸을 돌려 케이든과 눈을 맞췄다.
뜨거운 날씨 탓에 헛된 걸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아사드는 무언가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보였다. 정자가 내어 준 그늘 밑에서도 선명함을 잃지 않는 황금색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곧, 아사드의 낯빛이 변했다.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가볍게 웃은 아사드가 케이든을 향해 손을 펴 보였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곧고 예쁜 손을, 그러면서도 단단한 손을 멍청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의아하다는 낯을 하고서였다.
“헬리오의 황족은 큰 마력을 타고나. 태어나면서부터 마법사가 될 운명을 부여받는 거야. 내 경우엔 마검사 정도가 되려나.”
그러고 보면 아문에게서도 그런 말을 전해 들었었다. 선택받은 사막의 마법사들은 마법진을 그리거나 명창을 할 필요가 없이 즉각적으로 마력을 발산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황족들은 그보다 더 대단한 능력을 지닌 모양이었다.
아사드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조금도 예상이 가질 않았다. 하나 케이든은 일단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제국어를 쓰는 아사드의 말을 해석하느라 반응이 조금 느렸다.
“하지만 전투에 필요한 마법 외에도…… 이런저런 잔재주를 부릴 줄 알지.”
케이든의 시선이 아사드를 따라 조금 더 아래로 옮겨 갔다. 눈길이 닿은 건, 다시 아사드의 손바닥 위였다.
직전까지만 해도 텅 비었던 아사드의 손바닥 위에 어느새 하얀빛이 생겨나 있었다. 고귀한 이의 손 위를 외톨이처럼 홀로 돌아다니던 빛이, 별안간 물거품처럼 불어났다. 빙글빙글 회오리치듯 돌며 위를 향해 올라갔다. 순식간에 뭉쳐진 빛이 이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구름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빛은 하얀 눈이 됐다.
그 안에 차가운 기운을 품은 새하얀 결정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해가 쏟아 내는 빛이 아니라 하얀 기를 띤 서늘한 빛이, 아사드의 백금색 머리카락에 매달려 반짝였다.
차가운 반짝임은 케이든의 까만 머리카락 위에도 내려앉았다. 오른뺨 아래에 남은 오랜 흉터 위에도, 상처가 많은 손등 위에도 몸을 누였다.
‘예쁘다.’
사막에 내리는 눈을, 두 사람의 위에서만 내리는 하얀빛을 케이든은 멍하니 바라봤다. 눈이 내리는 정자 안과 태양이 작열하고 있는 바깥이 꼭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시원하지?”
흰 대리석 기둥에 몸을 기댄 아사드가 물었다.
케이든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아사드의 친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맞잡은 두 손만 꿈지럭댔다. 케이든은 타인의 호의가 어려웠다. 자신이 아사드의 뜻을 곡해하는 걸지도 모르니 대뜸 감사를 전하기도 어려웠다.
“……네.”
답이 너무 짧은가 싶어 케이든은 민망해졌다.
“정말?”
아사드의 낯을 살피던 케이든이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아사드의 얼굴에서 묘한 서운함이 느껴져 그랬다.
아사드의 친절에 저는 모를 복잡한 뜻은 얽혀 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더위를 식혀 주기 위해 마법을 사용한 거다.
케이든은 아사드의 의도에 대해 의미 없는 고민을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지금 자신이 느끼는 진심을 전하기로 했다. 비꼬는 걸 알아채지 못하고 바보같이 구는 것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잠깐 창피하면 될 일이니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이든은 다시 입을 열었다.
말은 느릿하게 이어졌다. 아문에게서 제국어를 배운 탓에, 익숙한 왕국어를 할 때보다 그 어투가 딱딱했다.
“사막에 내리는 눈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너무 귀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사드는 제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해 줬다. 반짝반짝 예쁘게 빛이 나는 마법을 가까이서 본 것도, 누군가 돈을 받지도 않고 절 위해 마법을 써 준 것도, 다 처음이었다. 여전히 꺼림칙할 제게도 너그러움을 보이는 아사드에게 케이든은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꼈다.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당신에게 고마움만을 느낀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처럼 보일까 걱정이 되긴 했다. 쓸데없이 말이 많다며 아사드가 한숨을 쉴지도 몰랐다.
그래도 멍청히 고개만 끄덕이다 넘어가고 싶진 않았다. 이런 친절에 고마움을 느낄 일이, 제 인생에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일어나겠는가? 케이든은 자신에게 찾아온 귀중한 순간을 아끼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