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이라.
케이든이 내놓은 말을 되뇌어 보던 아문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속으론 헬리오를 떠나게 될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사드는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고 있었다.
겹겹이 쌓이는 시간은 많은 걸 바꿔 낸다. 아사드 메케리우스가 받은 반려 신탁 또한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흐릿해질 거다. 그때가 되면, 아사드는 케이든과 협상을 해 볼 생각이었다. 황태자비 자리와 여생의 평온함을 저울질하는 협상이 되리라.
그 협상이란 게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겠구나 싶었다. 케이든이 이미 저런 마음을 품고 있다면, 제 제안 역시 저항감 없이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원하는 걸 손에 쥐고 군말 없이 떠나 줄지도 몰랐다.
물론, 마음이 바뀔 가능성도 있었다. 안락하다 못해 호화로운 환경은 사람을 변하게 하는 법이었다. 지금은 아무런 욕심도 없는 척 굴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그러니 협상 전까지 케이든이 혹할 만할 이야깃거리를 잘 찾아내서, 그에 맞춰 좋은 제안을 해야 했다. 그게 안 되면 약점을 이용해야겠지.
모든 게 잘 풀린다면, 케이든은 죽음을 위장하며 황태자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금세 다시 태어나리라. 새로운 신분과 함께 말이다.
케이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안온한 삶을 살게 될 거다. 제 신부에겐 덥기만 할 헬리오를 떠나 북부에 있는 그의 고향에서 다시…….
아니, 그건 안 되지.
원래 있던 곳으로 굳이 돌아갈 필요가 있나? 가 봤자, 운 나쁘면 도련님인지 뭔지 하는 반인륜적인 미친 사람이나 마주칠 텐데.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제게 보고된 케이든의 이야기 중에 백작가의 장남 알렉스 쿠퍼에 관한 대목도 있었다. 농장의 일꾼들이 농장의 실질적 주인인 소백작과 제 신부의 관계가 너무나 친밀하다며 불만을 표하곤 했었다는 내용이었다.
‘친밀? 두 번만 더 친밀했다간 그 일대의 개들이 다 죽겠네.’
외딴곳에 자리한 농장의 폐쇄성 탓에 보고할 내용이 별로 없다더니, 아예 소설을 써 올린 모양이었다. 아사드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같은 땅 위에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쁠 인간이 있는 엘바가 아니라, 날씨 좋은 중서부에 새로운 거처를 구해 주는 편이 좋겠지. 더는 고된 노동을 할 필요 없게 재정적 지원도 아끼지 않을 거다.
아직 그 얼개가 느슨하긴 해도 최악은 아닌 계획이었다. 케이든의 마음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 계속해 아문의 모습으로 그를 감시해야겠지만 말이다.
「……내일은, 황태자님을 별궁 밖에서 뵙게 되실 겁니다.」
아문은 케이든의 앞에 툭, 말 한마디를 내놨다.
「밖에서?」
「네. 리헤트와 함께 들르셨던 연무장에 전하와 함께 가시는 거죠.」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진 케이든과 눈을 맞추며 아문은 말을 이어 갔다.
「전하께 따로 연무장 이야길 꺼낸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우연이 겹쳤을 뿐이에요.」
아문은 변명을 덧붙였다. 나는 고자질쟁이가 아니라고, 스스로를 변호해야 하는 상황이 우스웠다. 하지만 저 바보 같은 남자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실망은 시켜도 되겠지. 그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무뢰한으로 보이기 싫을 뿐이었다.
「‘훗날 황제와 황비의 검이 될 전사들과 함께하는 훈련이니, 황태자비가 한 번쯤은 얼굴을 비쳐 둬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자꾸 횡설수설 길어지려는 말을 간신히 끊어 낸 아문이 대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차피 케이든은 아사드의 말을 거절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혹여 거절을 당하기라도 할까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내가 얼굴을 비치는 게 맞는 걸까?」
「전하께선 그게 맞는다고 판단하셨습니다.」
아문은 답했다.
제 하나뿐인 신부가, 태양 아래에 몰래 숨어 배우자를 훔쳐봤다니. 안 될 일이었다.
개나 소나 다 찾아오는 연무장을 구경하는 게 뭐라고. 전사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게 뭐라고.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서야 앞으로 황태자비 노릇을 잘 해낼 수 있겠나 싶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겁을 내실 필요는 없습니다. 훈련을 내도록 보실 것도 아니고, 잠시 머무는 동안엔 그저 황태자 전하만 눈에 담으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무장의 활력을 어렵게 느끼는 듯했던 남자에게 아문은 말했다.
어차피 아사드 메케리우스밖에 보이질 않을 테지. 케이든, 저 남자가 이미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연무장 안에 모인 전사들은 하나같이 실력이 뭣 같고 생긴 것도 흉악해 꼴 보기 싫었지만, 황태자 전하는 괜찮았다고. 무섭지 않고 아름다웠다고. 그렇게 말했다.
아사드와 함께 연무장에 간다는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한 케이든은 개들을 한 번, 흙바닥을 한 번, 그리고 아문의 얼굴을 한 번 바라봤다.
“……너도 함께해?”
개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케이든은 아문에게 물었다.
“아뇨.”
“그, 그렇구나.”
남편과 함께 보내는 시간에 다른 남자를 끼워 넣으려는 케이든의 모습이 짜증 났다. 하지만 그만큼 아문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즐거웠다. 입가가 씰룩였다.
아문이 케이든과 함께한 지는 이제 막 두 달밖에 되질 않았다. 고작 60일 만에, 이렇게까지 아문을 의지하게 됐다. 놀라웠다. 저 남자에게 쓸 당근과 채찍이 뭔지 금세 알아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제가 함께하지 못해 아쉬우십니까?」
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아문의 물음에 케이든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것 같아.”
순진하긴. 아문은 속으로 자신의 신부를 비웃었다.
삐쭉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아 낸 아문이 별안간 몸을 굽혔다. 반쯤 쪼그려 앉다시피 한 그는 케이든의 옆에 들러붙어 있던 개를 붙잡았다. 개의 턱 밑을 괜히 벅벅 긁어 주다가는 얼마 안 되는 볼살을 쥐고 주물렀다. 마트의 개가 짜증 난다는 얼굴을 하고 저를 흘겨봤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이상한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힌 아문이 슬쩍 시선을 올렸다. 케이든은, 얄미운 개들과 저를 보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굉장히 사랑스러운 풍경을 마주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 얼굴빛이 온화했다.
제 신부의 창백한 낯이며 우울한 보라색 눈에서 생기가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정말, 바보 같다니까.’
휙 고개를 돌려 아문은 케이든의 눈을 피했다. 바람을 맞은 두 뺨이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 * *
특별한 손님이 함께했기 때문일까. 연무장 안을 달구던 열기가 평소보다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대련의 주체가 되는 황태자 아사드가 이른 끝을 알린 탓이기도 했다.
그늘에 마련된 자리에 두 손을 모으고 얌전히 앉아 있던 케이든은 다급히 눈으로 아사드를 좇았다. 마치 생명의 은인을 찾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간절한 시선이었다. 연무장에 발을 디딘 이래로 아사드에게서 눈이 떨어진 적이 없음에도 그랬다.
연무장에 들어선 순간에도 그랬지만, 훈련이 끝을 맺게 되자 거의 모든 전사들의 시선이 케이든에게 꽂혔다.
최소한의 옷, 아니, 천만을 두른 남자들과 여자들의 눈빛이 열을 머금은 그들의 몸처럼 뜨겁고 따가웠다. 다만, 그들의 눈에 담긴 열에는 익숙한 경멸이나 동정 따위의 감정이 아닌 짙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어린 시절, 고아원에 봉사를 오던 남작 부인께서 읽어 줬던 동화가 생각났다. 모험을 떠난 왕자의 역할을 대신하게 된 거리의 아이가 등장하는 길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케이든은 자신이 동화 속 거리의 아이가 된 기분을 느꼈다. 어울리지도 않게 남의 역할을, 신의 뜻에 휘말려 자리를 비운 진짜 황태자비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다 황태자비라는 말도 안 되는 자리에 앉게 됐지만, 제가 황비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훗날 황제와 황비의 검이 될 이들에게 저 같은 사람을, 가짜를 내보여도 되는 걸까 싶었다. 무거운 마음이 들어 도통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멍청하게 굳어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제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아사드의 위신을 올릴 수도 내릴 수도 있다고 아문이 말하지 않았는가. 위신을 올리진 못해도 떨어지게 해선 안 됐다. 케이든은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보였다.
아사드는 그의 주위를 둘러싼 또래의 전사들과 짧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몰려온 이들의 말에 대답해 주면서도 그 시선만은 틈틈이 케이든을 향했다.
지금도 그랬다. 아사드는 어색하게 웃는 케이든을 따라 가볍게 웃어 보였다. 무어라 소리 없는 말을 건네기도 했으나 정신이 없는 케이든은 제대로 알아채질 못했다.
그런 아사드를 보며 케이든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저를 밖에 내보이기 가장 창피할 사람은 아사드였다. 그런데 왜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싶어 의아함이 들었다.
망신을 당했으면 싶어서?
언젠가부터 제게 친절해진 아사드를 향한 이상한 믿음과 과거에 얻은 교훈들 사이에서, 케이든은 혼란을 느꼈다.
불필요한 걱정이 들었다. 이대로 넋을 놓고 있어도 괜찮은 걸까? 아니면,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는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아문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이라도 덜 바보 같아 보이는 방법을 알려 줬을 거야.’
전하의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우습게 보여선 안 된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뚱한 얼굴을 했음에도 목소리만은 상냥했겠지.
“…….”
이곳에서 시간을 보낸 것 자체는 싫지 않았다. 도리어 좋았다.
야외 연무장의 뜨거운 풍경은 계단 위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케이든은 저 위에서 연무장을 내려다볼 때는 몰랐던 건강한 치열함을, 날카로운 투지를, 무기를 쥔 이들의 만면에 퍼진 즐거움을 알게 됐다. 연무장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고 아문에게 말해 줘야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색이 바뀐 풍경 속에서도 한결같이 아름다운 사람 또한 있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결이 전과 다르긴 했다. 금빛으로 칠한 그림 속의 주인공처럼만 보이던 아름다운 황태자는, 초승달처럼 휜 곡도를 잡자 옛 설화 속에서 튀어나온 영웅처럼 변했다.
‘내가 막 성인이 됐을 땐…… 창고에 있는 보풀 풀린 마대랑 다를 게 없었는데.’
목을 축이는 아사드의 턱을 타고 흐르는 물을 보며, 케이든은 자신의 볼품없던 과거를 곱씹어 봤다. 볼품없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아니, 그 옛날보다 지금이 더 추레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잔뜩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케이든의 귓전을 때렸다.
“황태자비님을 뵙습니다.”
얼굴이 똑 닮은 여자와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케이든에게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