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마저 완전히 저물어 어두워진 밤이었다. 노크 소리를 듣고 리헤트가 온 건가 싶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던 케이든은,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온 사람을 보자 놀라 굳어 버렸다.
“…….”
한 마디 말도 없이 침실 안으로 들어선 아사드는 케이든의 앞에 다다라서야 걸음을 멈췄다.
아사드의 시선에 단단히 붙들린 상태로 굳어 있던 케이든이 정신을 차린 건, 아사드가 그의 손에 향유 병을 쥐여 줬을 때였다.
아사드는 먼저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아사드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케이든은 한참을 초조해했다.
아사드가 왜 여기에 온 걸까. 그 이유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감사합니다.”
불안을 닮은 당혹감 속에서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말했다. 케이든이 의심 없이 내놓을 수 있는 많지 않은 제국어 중 하나였다.
감사의 말을 전해 들은 아사드의 입꼬리가 위를 향했다. 마냥 예쁘다고 하기 어려운, 어딘가 삐딱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아사드의 뜻을 알 수가 없어 케이든은 그저 입을 다물고 눈치만 봐야 했다. 그러다, 이내 아사드의 시선이 닿는 곳을 알아챘다.
케이든은 향유 병을 잡지 않은 손을 들어 슬쩍 제 목에 댔다. 아사드의 눈에 거슬릴 흉터를 가린 거였다.
침대에 몸을 누이기 위해 케이든은 목깃이 없는 가운으로 환의한 상태였다. 오른뺨 한편에 엷게 남은 상처보다 그 색이 짙은, 목 아래의 화상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사드가 방문하는 줄 알았다면 이런 꼴로 있지 않았을 텐데.
오늘도 아사드의 화가 난 눈을 마주하게 되겠구나 싶어 걱정됐다. 저처럼 볼품없는 사람과 강제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됐다는 사실에 다시금 짜증이 치밀어 오를 게 분명했다.
아사드는 안절부절못하는 케이든을 그의 웃음만큼이나 삐딱한 자세를 하고 내려다봤다.
말없이 손을 뻗은 아사드가 케이든의 손목을 잡아챘다. 목을 가렸던 손이 한순간에 힘없이 끌려 나갔다. 오래된 흉터가, 다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냈다.
“엘바의 멍청이들이, 그 흉터가 당신의 흠이라고 떠들어 대던가?”
“…….”
“하지만 여긴 사막이야. 고작 이런 게, 당신의 흠이 될 순 없어.”
다소 퉁명스러운 어투로 아사드는 말했다.
“알아들었어?”
곧장 덧붙은 물음에 케이든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색한 제국어를 입에 담는 대신이었다.
“제국어를 가르친 게 영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네. 이제 어느 정도는 알아듣잖아.”
만족스럽다는 듯 웃는 아사드를 따라 케이든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흠이 아니라니. 그런 말을 들어 본 건 처음이었다. 케이든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만 달싹여야 했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아사드는 저를 비웃지도, 제 흉터를 보지 못한 척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안타깝다거나 아쉽다는 듯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다. 꼴 보기 싫다며, 제대로 가리지 않았다며 손을 올릴 기색도 없었다.
아사드는 무감했다. 그는 제 흉터에 그 어떤 사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런 아사드의 무감함이 케이든은 좋았다. 그래서 당황스러웠다.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 고마움인지 뭔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낯설어 도망치고 싶었다.
‘아사드는 눈빛만큼…… 체온도 뜨겁구나.’
절 붙잡은 손을 보며, 케이든은 이런 의미 없는 생각이나 하게 됐다. 회피였다.
쯧. 원래도 바보 같았지만 어느 순간 더 바보 같아져 버린 제 신부를 내려다보며, 아사드는 혀를 찼다.
그는 남은 손으로 케이든의 턱을 붙잡아 좌우로 돌려 가며 얼굴 이곳저곳을 살폈다. 사막의 남자들보다 긴 편인 까만 머리카락이 자꾸만 그의 손끝을 간질였다.
“온몸을 가리고 다니는 사람다워. 얼굴만 빨갛게 익었잖아.”
그렇게 말하는 아사드의 눈빛에 불쾌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케이든은 자신이 아사드에게 얼굴을 붙잡혔다는 사실마저 잊을 정도로 놀랐다.
설마, 제가 연무장에 갔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까? 하나 아문은 비밀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아문을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얼굴이 발갛게 익은 바보 같은 남자의 얘기를 꺼냈을 거다. 그 남자에게 향유를 보내야 한다는 말 정도만 더했겠지.
하지만 그게…… 향유 병을 든 아사드가 제 침실까지 올 이유는 되지 않을 텐데.
영문을 모를 친절을 보이는 아사드가 케이든은 의아했다. 또 조금은 신기했다.
“죄송합니다.”
케이든은 말했다. 하나 제 말이 아사드의 얼굴에 더한 짜증만 불러일으킨 것 같아 곧장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설프게 말을 이어 가느니 입을 닫는 편이 나으리라. 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 또한 좋은 선택이 아닐 듯했다.
갑작스럽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케이든은 별안간 말이 없어진 아사드의 눈치를 살폈다.
케이든의 얼굴을 붙잡았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건 아니었다. 아사드의 손끝이 긴장한 케이든의 목울대에 닿았다. 엄지손가락이 훑고 지나간 자리 위로 미묘한 간지러움이 퍼졌다.
아사드의 손은 케이든의 목울대를 지나 그 위의 턱을, 뺨을, 얇은 귓불을 스쳤다간 이내 뒷머리로 자리를 옮겼다. 눈을 내리깐 남자의 뒷머리를 아프지 않게 붙잡은 아사드가 무심코 몸을 숙였다. 반쯤은 충동적으로, 드러난 제 신부의 목 위에 코를 대어 봤다.
“……오메가가 맞긴 한 건가.”
아사드의 중얼거림이 케이든의 귓전에 한숨처럼 퍼졌다. 케이든은 붙잡힌 포로라도 된 양 겁에 질려 얌전히 눈을 감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체향이 느껴지지 않아. 페로몬을 잘 숨기는 건지, 오메가가 아닌 건지. 도통 모르겠어.”
저를 찾아왔던 의사며 치료 마법사들에게, 케이든은 제 페로몬 샘이 반쯤 망가져 있다는 이야길 진작 전해 뒀었다. 하지만 아사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관심 없는 오메가의 페로몬 문제 따위는 알 필요가 없으니 듣지 않은 거겠지. 케이든은 아사드를 이해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허술한 제국어를 더듬거리며 변명을 전하기도 이상했다. 케이든은 그저 조심히 말을 돌리는 쪽을 택했다.
“전하께서도…… 그러십니다.”
체향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사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사드는 다른 알파들과 달리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페로몬을 내보이지 않았다. 처음 아사드를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눈에 거슬릴 제 앞에서조차 조금도 페로몬을 풀어놓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알파며 오메가를 괴롭게 만들 방법으론 페로몬을 쓰는 게 가장 좋을 텐데도 말이다.
아사드가 약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아주 강한 알파였다. 그건 그가 굳이 페로몬을 내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오메가나 알파만이 아니라 베타들 역시 그 정도는 눈치챌 수 있으리라. 그러니, 페로몬을 드러내지 않는 건 순전히 아사드의 선택이겠지.
“시도 때도 없이 페로몬을 내보이는 놈들이 꼴사나운 거야. 창피한 줄도 모르고.”
뒷머리를 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부드러운 천 위에 거친 모양새의 주름을 만들며 가운 밑의 몸을 더듬었다.
가까이 몸을 붙이고, 아사드는 케이든의 체향을 느끼려 했다. 페로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오메가의 존재가 혼란스럽다는 듯 목에 코를 박고, 손으로 케이든의 몸을 끌어당겼다.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가만히 몸을 맡겼다. 단단한 손이 허리를 붙들어 올 때도 소리를 참았다.
아사드의 기분을 언짢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저를 황태자비 자리에 앉혀 두고 있는 그가, 이렇게 친절히 향유를 가져다준 사람이 별안간 돌변해 뺨을 올려붙이진 않겠지만…… 그래도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알파가, 제게 화가 난 이가 뭘 하건 조금도 반응해선 안 됐다. 그건 케이든이 오랜 경험으로 깨우치게 된 나름의 생존법이었다.
하지만 틈 없이 완전히 맞붙었던 몸이 별안간 떨어져 나갔다.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졌다.
조심히 눈을 뜬 케이든이 제 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이런…… 미친.”
케이든을 쏘아보는 아사드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다. 의도치 않았던 접촉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허공을 맴돌던 손을 황급히 거둔 케이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른 척 구겨진 옷을 폈다. 눈치껏 시선은 아래로 내려 줬다.
“그건, 향유는…….”
“…….”
“향유는…… 당신이 알아서 발라.”
말을 마친 아사드가 휙 등을 돌리더니 급한 걸음걸이로 침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사드의 발소리만큼이나 요란했다.
고개를 든 케이든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선 채로 닫힌 문을 바라봤다. 힘이 세서 그런 건지, 어려서 그런 건지. 아사드도 아문도 저 무거운 문을 참 잘도 여닫는구나 싶었다.
손에 들린 향유 병으로 케이든은 시선을 떨궜다.
‘아사드는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구나.’
아사드는 저를 싫어했다. 가끔은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낼 때도 있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 이상의 분노는 내보이지 않았다. 요즘 들어선 제게 묘한 친절을 베풀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랬다. 말은 조금 거칠게 했지만, 이렇게 직접 향유도 가져다주지 않았는가. 별궁의 서관까지 찾아와서 말이다.
그리고…….
〈엘바의 멍청이들이, 그 흉터가 당신의 흠이라고 떠들어 대던가?〉
〈하지만 여긴 사막이야. 고작 이런 게, 당신의 흠이 될 순 없어.〉
이런 말을 해 줬다.
아사드는 본디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일 거다. 혼인을 약속했다던 아름다운 신부를 그대로 자신의 반려자로 맞이했다면,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사람처럼 굴지도 않았으리라. 그저 아주 다정하기만 했겠지.
케이든은 아사드에게 미안했다.
그 미안함은 케이든이 아사드에게 품은 두려움보다도 몇 배는 더 큰 감정이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이런 일을 초래한 원인이 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케이든은 미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케이든은 아사드가 안겨 주고 간 향유 병을 괜스레 손으로 쓸어 봤다. 체온이 높은 사람의 손에 들려 온 것이라 그럴까? 반들반들한 유리병이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