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7)화 (7/97)

「치워지는 선생이 저일 리가요.」

「아…….」

「쓸모없는 쪽이 안녕을 고해야죠. 케이든 님께서도 선생이 한 명인 편이 낫다고 생각하신다면, 황태자 전하께도 말씀을 전해 보겠습니다.」

「나는 좋아.」

케이든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곧장 대답을 꺼냈다. 황태자비라는 직위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지만, 아사드는 그가 내놓은 다급한 답변이 괜찮게 느껴졌다. 의외로 말이다.

「새로운 선생님이 마음에 드셨습니까?」

「응, 마음에 들어.」

우중충하던 낯빛이 아주 조금쯤은 밝아진 것도 같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아문. 너는 정말 좋은 선생님이야.」

「……그랬나요.」

「그럼. 내가 매일같이 답답하게 구는데도, 나한테 화 한 번 내질 않잖아. 잘은 모르지만…… 분명, 너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이 세상에 많지 않을 거야.」

그 괴상하고 낯간지러운 소리를 받아 들고 아문은 말을 잃었다.

내가 친절과 다정이라는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제국어와 왕국어 사이에서 혼동을 느끼나? 상식 밖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마음이 불편해졌다.

케이든은 웃고 있었다. 비를 잔뜩 맞아 고꾸라진 풀 따위가 떠오르는 기묘한 웃음이었다. 역시나. 저 남자는 웃는 방법을 모르는 게 확실했다.

짜증 나.

당혹스러울 정도의 갈증이 아문을 찾아왔다. 그는 아까 전 놓아뒀던 잔을 다시 집어 들고 황급히 마른 목을 축였다. 시원한 음료를 마시니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살짝 놀란 얼굴을 한 케이든이 입도 대지 않은 그의 잔을 아문의 앞으로 슬쩍 밀어 줬다. 그런 제 신부와 눈이 마주치자 아문은 속까지 다 창피해졌다.

「목이 많이 말랐나 봐.」

케이든은 웃음을 되찾았다. 저를 바닥에 붙어 다니는 땅꼬마 보듯 귀여워하는 게 분명한 얼굴을 했다.

소름이 끼쳤다. 귀엽다니. 아주 어릴 적에도 이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신부에게 만만하게 보이다니, 수치스러웠다. 두 뺨이 붉어질 정도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뭐, 아문을 귀엽다 느끼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니지.’

속으로 한숨을 쉰 아문은 케이든을 따라 억지로 웃어 보였다. 들끓던 마음의 온도를 간신히 가라앉혔다.

아문의 목적은 저 남자의 유일한 말벗이 되는 거였다. 무슨 이야기든 털어놓을 수 있는 친밀한, 나의 편. 벌써 이 정도로 친근함을 느끼게 됐으니 앞으로의 일도 잘 풀릴 듯했다.

아사드는 제 신부가 아문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거라 예상했었다. 케이든이 가진 배경이며 우울한 인상, 말을 하지 못하나 싶을 정도로 적은 말수나 외톨이를 자처하는 듯한 모습이…… 그를 사람을 좋아하지도, 믿지도 않는 부류로 보이게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케이든은 아문에게 너무 쉽게 마음을 줬다. 고작 제국어를 알려 달라는 부탁을 들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문에게 호감을 품었다. 그가 좋아 부탁을 들어준 게 아니라, 단지 모시는 주인의 명을 받들었을 뿐이란 생각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친절이니 다정이니 하는 헛소리까지.

아사드는 태어나서 그런 말을 처음 들어 봤다. 제가 10살짜리 애였다면, 자신의 일기장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었노라고 글을 썼을 거다. 그 정도로 황당했다.

조금만 더 잘해 주면 마음까지 주겠어.

지금 와 다시 생각해 보면, 저 남자가 타인의 친절이나 애정에 약한 게 당연했다. 부드러운 종이 위에 짧게 기록되어 있던 그의 인생 역경에 따르면 말이다.

남자는 평생 일만 하며 산 오메가였다. 고작 14살부터 일을 해 왔다고 했다. 머물던 고아원에서 부유한 백작가로 팔려 가 그 집 아들의 몸종 일부터 시작했다고 하니, 스스로 원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고작 2년이 지나 백작이 소유한 농장으로 일터를 옮기고 그곳에서 22살이 될 때까지 지냈다. 고아원의 원장이 그를 14년간 보호하고 키워 줬다는 명목하에 백작에게 받아먹은 몸값을 갚으면서였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별다른 이유도 없이 백작 부부에게 쫓겨났다. 그게 바로 작년의 일이었다. 헬리오에 오기 직전엔 수도 외곽에 있는 한 상단주의 저택에서 말을 돌보는 일을 했고 말이다.

그런 고단한 일상 속에서 타인의 다정을 느낄 새가 있었겠는가. 와중에 성격마저 저 모양이었다. 사람들한테 인기가 없었을 법했다. 그래도 얼굴만은 잘났으니, 별 이상한 벌레들만 더럽게 꼬였겠거니 싶었다.

‘외관도 멀끔하고 성격도 다정한 알파를 고용해서…… 저 남자에게 접근하게 하는 건 어떨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부간의 신의를 모르는 방탕한 왕국 놈들과 달리, 사막의 사람들은 평생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살았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을 했다. 그건 제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황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족, 그중에서도 황제나 그 후계자의 외도는 아주 큰 문제가 됐다. 제국민들의 외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외도라는 죄목에 신성 모독이라는 죄목까지 더해지게 되니 말이다. 신의 대리인인 제사장 앞에서 서로에게 입을 맞추며 사랑을 맹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의 뜻을 받든 이상, 혼인한 두 사람은 부정을 저지르면 안 됐다. 배우자의 외도가 부부 사이의 문제가 되면 신도 그들의 이별을 막을 수 없었다.

케이든의 외도는 그와 저 사이에 놓인 반려 신탁을 쉽게 깨부숴 줄 것이다.

물론, 황태자의 반려자가 외도를 저지른다는 게 쪽팔릴 일이긴 했다. 하지만 일을 저지른 이가 저 남자라면 말이 달라진다. 배우자가 있음에도 대놓고 그 옆에 정부며 애인을 끼고 사는 행태를 나쁘게 여기지 않는 엘바에서 온 오메가가, 제 버릇 못 버리고 일을 쳤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왜 이제야 이 방법을 떠올렸을까.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학자처럼 아문의 머릿속이 깨끗해졌다.

「아문.」

상념에서 깨어난 아문이 저를 부르는 케이든을 봤다. 한순간에 눈이 마주쳤다.

「기분이 좋아 보여.」

속삭이듯 말을 걸어온 케이든의 음울한 낯이 묘하게 들떠 있었다.

아문의 시선이 어느새 자신의 앞에 잔뜩 모여든 음료며 간식 따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즐겁던 기분이 한순간에 박살 났다. 깨진 즐거움 위로 피어난 건, 당혹감이었다.

왜 자기는 먹지도 않고 시종을 먹이려 드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문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계획을 재점검해 봤다.

저런 남자가, 다정한 알파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 필요하면 가져가라며 장기까지 내주고도 남지 않을까 싶었다. 대신 죽으라고 하면 고민도 없이 목숨까지 내버릴지도 몰랐다.

그런데 그 알파란 놈이, 겉만 멀끔하고 그 속은 더럽게 곪아 있다면? 할 줄 아는 일이라곤 배우자에게 기생하는 것밖에 없는 인간을 보살피느라 저 남자는 또 평생 일만 하며 살게 될 터였다.

아문의 낯을 한 아사드는, 다소 극단적인 결론을 내놓게 됐다.

……그래. 다른 알파를 이용한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얘기였다.

케이든이 북부에서 오긴 했다. 하지만 그는 엘바에 깔리고 깔린 사악하고 방탕한 종자들과는 달라 보였다. 저 멍청하고 순진한 남자는, 자신에게 접근하는 알파를 놀이 상대로 여기지 않고 진심으로 대할 게 분명했다.

‘제국의 황태자가 되어선, 마음이 약한 사람을 우롱할 순 없지.’

그런 추잡한 짓은 해선 안 됐다. 아문은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렇게까지 공을 들여 남자를 쫓아낼 필요도 없었다. 원래 하려던 대로 그저 제 신부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으로 여기서 버티고 있는지나 알아내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최대한…… 평화롭게 결별 협상을 진행하는 거다. 그게 가능하다면 말이다.

「어떻게 하면 케이든 님께 더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케이든 님의 하나뿐인 말벗이자 제국어 선생이 될 테니까요.」

「…….」

「앞으로도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빨리 속내를 드러내 주시죠. 그런 속셈은 숨기고 아문은 말을 마쳤다.

「……고마워.」

아문의 입에 발린 소리를 들은 케이든이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옅은 흉터가 남은 오른쪽 뺨을 쓸어내리는 메마른 손이 그림자보다 까만 머리카락을 스쳤다.

케이든의 입가에 은은하게 떠올라 있는 괴상하고 바보 같은 웃음을 바라보며, 아문은 그를 따라 웃었다. 하나뿐인 말벗이자 선생인 제게 의지하게 될 남자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 * *

케이든에게 있어 방은, 그저 몸을 누일 수만 있으면 되는 공간이었다.

고아원에서 일곱 명의 아이들과 함께 썼던 방. 백작가의 하인들이 모여 쓰던 방. 농장을 내려다보던 별장 지하의 창고 방. 쥐가 출몰하던 허름한 여관의 방과 고용인 숙소의 꼭대기 층에 있던 작은 방.

이제껏 케이든이 지나온 방들은, 모두 밤의 어둠을 안전히 지나기 위한 피난처밖에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 사막의 방은 달랐다. 별장에 있던 도련님의 침실보다도 몇 배는 더 넓고 화려한 공간은 저처럼 비루한 일꾼의 피난처 따위가 아니었다. 해와 달이 모습을 보이고 사라지길 반복하는 내내, 단 한 순간도 기품을 잃지 않은 안락한 거처였다.

케이든은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이 품고 있는 안락함이 낯설었다. 침실 안의 풍경에 익숙해지는 게 별궁 전체의 풍경에 익숙해지는 것보다 더 어렵게 느껴졌다. 양옆에 욕실과 의상실이 딸린 침실 자체가 제가 모셔야 하는 주인처럼 느껴지는 통에 자꾸만 발코니 구석으로 도망을 가곤 했다.

결코 제 것이 될 수 없는 공간이란 걸 알기에 더 어렵게 느껴지는 걸지도 몰랐다. 남의 집에 들어앉은 도둑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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