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하늘을 가로막고 선 손님은 놀란 케이든을 내려다봤다.
「케이든 님의 말벗이 되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고 온 아문입니다.」
그리고 말을 건넸다. 왕국어였다.
헬리오의 시종들은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따르지 않았다. 모시는 이가 도움을 원치 않는다면, 부름을 기다리며 복도 끝에 있는 시종방에서 대기를 했다.
그래도 호위 서넛 정도는 언제나 복도의 끝과 끝에, 또 문 너머에 남아 있었다. 방문자가 있을 시 정중히 문을 두드려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혹시 모를 특별한 방문객을 제압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런 호위들이 케이든에게 알리지 않는 건, 오직 황태자 아사드 메케리우스의 방문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아문이라고 소개한 이는 가벼운 노크도, 안내도 없이 침실에 발을 들였다. 어느새 케이든의 앞에 태양을 등지고 섰다. 마치 아사드처럼 말이다.
황태자님이 보낸 사람……. 긴장한 케이든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남자를, 아니, 남자애를 올려다봤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자리한 듯한 방문자를, 케이든은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 키며 체격이 저보다 작은 데다 얼굴에 앳된 느낌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만 빼면, 아문은 어딘가 아사드를 닮은 모습이었다. 사막 사람들 특유의 다갈색 피부와 잘 어울리는 백금색 머리카락이며 날카로운 아몬드형 눈이 특히나 그랬다. 언뜻 황실의 피가 흐르는 아이인가 싶을 정도였다.
「제국어와 왕국어 모두 모국어처럼 편히 쓸 수 있으니, 원하시는 쪽으로 말을 나눠 주세요.」
유려한 왕국어 발음을 뽐내며 아문은 말했다.
가볍게 웃어 보인 아문은 케이든의 앞에 대충 무릎을 꿇고 앉았다. 위를 향하던 케이든의 시선이 아문을 따라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갔다.
‘……나도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할까?’
케이든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수많은 인사말이 그의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일단은 먼저 고개를 끄덕여 아문에게 답 아닌 답을 건넸다.
그 작은 고갯짓이 어떤 신호라도 된 양, 아문은 케이든의 손을 잡아끌었다. 곧장 케이든의 손바닥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충성의 입맞춤입니다. 왕국에서 기사들이 하는 서약 비슷한…… 뭐, 그런 겁니다.」
별안간 말투가 가벼워진 아문에게, 케이든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여 줬다. 허공을 헤매던 손을 황급히 내리면서였다.
케이든은 소스라치게 놀란 속내를 감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어색했다.
이따금 얼굴을 보게 되는 시종들도 부담스러운데, 말벗이라니. 벌써 마음이 무거웠다. 친분이 없는 낯선 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오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걱정도 됐다.
그래도…… 아사드의 명을 받고 온 이였다. 그를 돌려보낼 순 없었다.
아사드가 제게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케이든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사드는 제게 이렇게 똑똑해 보이는 아이를 말벗으로 삼으라며 보내 줬다. 일부러 왕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만나게 해 준 건가 싶어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런 친절을 받아 본 적이 없어 낯선 기분이 느껴지는 것과는 별개의 감사였다.
케이든은 놀란 마음을 간신히 가라앉혔다. 시간을 내 저를 찾아와 준 아문을 적막 속에 앉혀만 둘 순 없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망설이던 케이든은 입을 열었다. 제국어가 아닌 왕국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잘,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해 더듬더듬 내뱉은 케이든의 말에 아문은 답이 없었다.
묘하게 냉랭한 아문의 침묵이 케이든은 당황스러웠다. 왕국어를 모국어처럼 쓸 수 있다고 했으니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닐 텐데……. 속을 모를 고요 속에서 케이든은 눈만 굴려야 했다.
망설이던 케이든은, 복잡한 머릿속에 툭 떠오른 물음 하나를 아문에게 건네 보기로 했다. 농장에 새로 들어온 신입에게 질문을 던지던 나이 든 일꾼들을 따라 해 보려는 거였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반쯤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모른 채 던진 말이기도 했다.
쌀쌀한 침묵이 찾아왔다.
케이든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헬리오에선 나이를 물어보는 게 예의에 어긋나는 걸까? 질문을 입 밖으로 낸 뒤에야 그런 생각이 떠올라 멋쩍어졌다.
너무 어색한 분위기에 숨이 막혀 뭐라도 입에 담아 봤을 뿐인데,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을 한 모양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말걸. 더욱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케이든은 자책했다.
다행히, 정적이 길어지지는 않았다.
아문은 자신이 언제 차가운 낯을 하고 있었냐는 듯 금세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두 눈만은 여전히 차갑게 보여 마음이 위축됐다.
「저 같은 시종에겐 높임말을 쓰시면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요.」
침묵을 깬 아문이 말을 더했다.
「엘바에 계실 때의 케이든 님과 지금의 케이든 님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
「태양의 반려는 태양과 동등한 존재입니다. 아랫사람을 굽어보는 마음을 갖는 것은 응당 갖춰야 할 미덕이지만, 그 굽힘이 우스워 보여선 안 됩니다. 케이든 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황태자 전하의 위신을 올릴 수도, 떨어트릴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만큼 조심하셔야 하고요.」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아니, 알았어.」
당황한 케이든이 아문에게 답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들어 놀라긴 했지만, 제 말투가 문제라는 걸 알게 돼 다행이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젠, 제가 케이든 님과 함께할 테니까요. 황실의 규칙 따위도 금세 익히게 되실 겁니다.」
「고마워…….」
케이든이 아문에게 전한 얼빠진 감사를 끝으로, 발코니 전체에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껄끄러운 고요가 번졌다. 주변의 공기까지 어색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문이 아사드와 묘하게 닮았기 때문일까? 꼭 아사드를 앞에 둔 것처럼 긴장이 됐다.
「그리고.」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아문은 입을 열었다. 곧장 말 한마디가 더해졌다.
「저는 18살입니다.」
케이든의 물음에 뒤늦은 답을 준 거였다.
아문은 이제 막 성인이 된 아사드보다도 1살이 더 어렸다. 아문이 참 고생스러운 일을 하게 됐구나 싶어 케이든은 민망했다. 자신이라면, 저보다 5살이 더 많은 남자의 말벗이 되는 일 같은 건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케이든은 속으로 숨을 크게 쉬어 봤다. 아문의 나이를 알게 되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문을 데리고 안으로 자리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찾았다. 해를 등진 아문의 등이 따가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아문이 입을 열었다.
「황궁의 공식적이고 암묵적인 규칙 따위를 알려 드리겠다곤 했지만, 그게 제가 해야 할 진짜 일은 아닙니다. 전 케이든 님의 말벗입니다. 이야기를, 즐거움과 고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시종이죠.」
「…….」
「그 이야기가 무엇이건 상관없습니다.」
자신이 언제 차갑게 굴었냐는 듯, 아문은 방긋 웃어 보였다. 어찌나 상냥한 얼굴로 웃어 주는지. 케이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불안의 무게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담화를 나누는 것 외에도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많으니 뭐든 요청하셔도 됩니다. 전, 다른 시종들과 다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되돌아왔다. 하나 전처럼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웃음기를 머금어 반짝이는 아문의 엷은 갈색 눈이 어쩐지 따스하게 느껴져서일지도 몰랐다. 그의 눈에 서렸던 차가운 기운이, 아주 잠시나마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오해했던 모양이었다.
아문은 화가 난 사람도, 제 앞에 억지로 끌려온 사람도 아니었다. 언어가 통하는 친절한 말벗을 마주한 채로 케이든은 입을 달싹였다. 사막에 온 이래 처음 느껴 보는 안도가 슬그머니 케이든을 찾아왔다.
〈담화를 나누는 것 외에도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많으니 뭐든 요청하셔도 됩니다.〉
요청. 오늘 처음 만난 이에게 무언갈 부탁할 일은 없었다. 처음 만난 게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다. 케이든은 남에게 부탁을 하는 것보단 부탁을 받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나는…….」
나는 괜찮아. 케이든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입 밖으로 엉뚱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혹시, 나한테…….」
「…….」
「제국어를 알려 줄 수 없을까?」
케이든 본인도 예상치 못했던 물음이자 부탁이었다.
제국어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을 이미 매일 만나고 있으면서, 처음 보는 어린 시종에게 제국어를 알려 줄 수 없냐고 묻다니. 다시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게 됐다.
「제국어를 배우고 계신 게 아니었습니까?」
「맞아. 내가, 이상한 얘기를 한 거야. 듣지 못한 걸로 해 줘.」
어색한 낯을 한 케이든은 말을 얼버무렸다.
아문의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이 지워졌다. 케이든의 표정을 살피던 아문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의아하다는 얼굴을 한 아문이 케이든에게 빤한 시선을 보냈다.
「파스카. 그 사람이 쓸모없이 굴던가요?」
아문은 케이든에게 물었다.
「아니야. 잘 가르쳐 주시지만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 쉽게 배우질 못해서…….」
「쓸모없이 굴고 있는 게 맞았군요.」
쓸모없다니. 생각지도 못한 과격한 말을 반복해 듣게 된 케이든은 당황했다. 선생님을 욕하고 싶어서, 아문에게 제국어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게 아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