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름다운 신부 (3)화 (3/97)

긴장이 풀리자 몸에서도 힘이 빠졌다. 케이든은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반 시간 전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주스며 간식, 과일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농장에서 일하던 시절, 별장을 찾은 손님들을 접객하는 일에 자주 차출되었던 엠마는 때때로 도련님의 손님들을 욕하곤 했었다. 먹을 것 귀한 줄을 모르는 놈들이라며 높으신 분들의 낭비에 혀를 찼다. 왜 갑자기 화가 난 엠마의 얼굴을 떠올린 건지.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케이든은 붉은색 음료가 담긴 잔을 들어 입에 대어 봤다. 낯선 향과 맛이 나는 주스는, 바깥의 더위 따위는 알지 못한다는 듯 항상 선선한 온도를 유지하는 궁전의 내부만큼이나 시원했다. 제게 황궁에 대해 알려 준 선생님의 말씀처럼 정말 주방에 마법사가 상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망설이던 케이든은 채 주스 한 모금을 더 마시지 못하고 잔을 제자리에 내려놨다. 싱그러운 과일의 단내가 기분 좋게 느껴지면서도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이런 걸 마셔 본 적 없던 촌스러운 사람이라 그런 걸지도 몰랐다.

케이든은 하루에 한 번, 그의 배우자이자 황태자인 아사드 메케리우스와 의무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다. 황태자의 공간인 동관과 황태자비의 공간인 서관으로 나뉜 별궁의 크기가 작지 않았기에, 이렇게 약속을 잡아 일부러 만나지 않는 이상 쉽게 마주하기 힘든 탓이었다. 아사드가 먼저 케이든을 찾을 일 역시 절대 없었고 말이다.

‘……오늘도 화가 나 계셨지.’

케이든은 아사드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 봤다.

살면서 보아 온 모든 예쁜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남자가 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화를 냈었다. 혼인식을 준비할 때도, 신전에서 입을 맞출 때도 마찬가지였다. 격양된 목소리로 말을 쏘아붙이는 일은 금세 그만뒀지만 말이다. 몸이 굳게 할 정도로 흉흉한 얼굴을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케이든의 눈에는 여전히 아사드가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음을 알기에 애써 화를 참아 보려고 노력하는 것만 같았다.

저를 보는 아사드의 눈을 마주할 때면, 케이든은 마음이 선득해졌다. 그의 미움을 샀다는 게 온몸으로 느껴져서였다.

아사드에게 서운함을 느끼진 않았다. 불만을 토로할 생각도 없었다. 케이든은 자신을 반려자로 인정하지 않을 아사드를 이해했다. 그래서 그에게 서운함 대신 미안함을 가졌다.

자신은 배운 게 없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사드와 제 혼인이 말도 안 되게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가진 거 없고 멍청한, 못생긴 데다 반듯하지도 않은 사람은 고귀한 이의 반려자가 될 수 없지 않은가. 그 고귀한 이가 제국의 황태자라면 더더욱.

「나를 내버려 두고 있는 게 신기하지…….」

짤막한 왕국어가 케이든의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애초에 왜 저를 여기까지 데려왔을까. 도대체 신이 뭐라고. 헬리오 사람들이 들으면 불경하다 손가락질을 할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케이든은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봤다. 따가운 햇볕이 옆얼굴을 쿡쿡 찔러 와 반사적으로 시선을 준 거였다.

저 위 오후의 뜨거움을 머금어 반짝이는 둥그런 돔의 첨탑을, 줄을 맞춰 선 흰 대리석 기둥과 그 뒤를 따르는 긴 그림자를, 화려한 색을 가진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정원의 초입을, 낯선 이국의 풍경을, 케이든은 느릿하게 눈에 담았다.

혼인식을 올린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왕국에 파견된 대사들과 신관들을 따라 헬리오에 온 지는 벌써 보름이 훌쩍 지났다.

제멋대로 튀어나오려는 불안을 매만지며 케이든은 그가 왕국에서 만났던 신관을 그리고 국왕을 생각했다.

〈지난 200여 년간, 저희는 침묵하는 신을 대신해 훗날의 태양이 될 황태자와 황태녀의 반려자를 점지했습니다. 지금의 황태자 전하 역시 정해진 짝이 있으셨지요. 하지만 신께서, 아주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여셨습니다. 전하께 반려 신탁을 내려 주신 거예요. 그 신탁 속 진실한 사막의 달이…… 바로 당신입니다.〉

케이든을 독대했던 젊은 신관은 부드럽고 정중한 어투로 말했었다.

하지만 두 눈에 서린 의구심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신을 믿는 자가 품은 신을 향한 의심을 앞에 두고, 케이든은 죄인처럼 주눅 들어야 했다.

엘바를 떠나기 직전에 만나게 된 국왕 역시, 신관 못지않게 부드러운 어투로 케이든에게 말을 건네 왔었다.

〈사막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와 혼인을 약속했던 황태자를, 결국 자네가 얻게 됐군. 아무것도 아닌 자네가 사막의 꽃을 이긴 거야. 재밌는 일이지.〉

황태자에게 약혼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였다.

〈남은 인생은 부족함 없이 살게 될 걸세. 자네가 자네에게 주어질 시간을 버텨 준다면 말이야.〉

〈…….〉

〈이건 자네 인생이 걸린 거래지만, 이 왕국과 제국의 거래이기도 해. 그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 두게. 절대 잊지 않도록 해야 해.〉

국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케이든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저를 제국에 건네면서 얻게 될 이익이 있나 보다 할 뿐이었다.

주어질 시간이라는 말 또한 알 수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그사이 황태자가 제게 인간적인 정이라도 든다면, 절 바로 내치진 못할 거란 뜻에서 한 말은 아닐까 추측할 뿐이었다. 하나 화가 난 아사드의 얼굴을 보면…… 이곳에서 1년을 버티는 것도 힘들 듯싶었다.

저를 싫어하는 아사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법한 사람으로 보였다. 이곳의 신이 정해 줬다는 운명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쥐어뜯어 버릴 것처럼 기운이 넘쳐 보이기도 했다. 그저 아직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다.

삐딱한 얼굴을 하고 있던 아사드의 낯을 떠올리며, 케이든은 의미 없는 생각을 이어 갔다.

헬리오의 제사장은 케이든에게 태양의 사랑을 받을 신부라며 다정히 웃어 줬었다. 봄처럼 온화한 중년 여자의 얼굴 그 어디에서도, 케이든이 왕국에서 마주했던 의구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케이든. 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거야. 그런데 너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 새끼잖아.〉

〈너처럼 못생긴 걸 누가 좋아해 줄까.〉

추운 북부에서부터 이 더운 사막의 나라까지, 득달같이 저를 따라온 목소리를 케이든은 곱씹어 봤다. 마음께를 툭툭 치고 달아나는 조롱을 삼켰다.

태양의 사랑을 받을 신부는 내가 아니다.

헬리오에서 시작된 새로운 여정에 케이든은 기대를 품지 않았다.

케이든은 미래를 꿈꾸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정한 남작 부인에게 입양을 약속받은 날, 그는 화재 사고로 얼굴과 몸에 흉터를 얻었다. 약속은 없던 일이 됐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팔려 간 백작가에선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불행을 만났다. 그 불행에 무뎌졌을 땐 갑자기 내쫓겨 길바닥에 나앉았다. 우연히 마주한 옛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지만…… 또 이렇게 등을 떠밀려 낯선 세상으로 오게 됐다.

케이든은 별안간 시작된 이번 여정 역시 이 호화로운 생활을 비웃으려는 듯 정말 나쁜 모습으로, 아주 갑작스럽게 끝날 걸 알았다.

‘쫓겨날 땐 쫓겨나더라도, 일단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는 아사드의 황금색 두 눈에 서린 노기를 엷어지게 하고 싶었다. 제가 말을 제대로 알아듣고, 아사드가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주 조금쯤은 그의 화가 가라앉지 않을까? 케이든은 그런 희망적인 마음을 품었다.

하나 언어를 배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엘바에서도 나이 스물을 넘긴 뒤에야 간신히 글을 깨쳤다. 도련님의 성화가 무서워 억지로 배우지 않았다면 그마저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다.

거기다 타고나길 멍청하기까지 하니, 왕국어와 크게 다르진 않지만 더 복잡한 사막의 말을 배우는 일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제국어를 가르쳐 주는 선생님이 무섭기도 했다. 그가 한숨을 쉴 때마다 케이든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교편을 든 남자가 내보이는 절 향한 경멸이 진짜인지, 그저 제 망상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두려움을 갖게 된 건, 순전히 제 탓이었다. 그가 절 가르치는 일을 내키지 않아 한다고 여겨 계속 눈치만 보고 있으니 말이다.

케이든은 손에 칼을 쥔 사람보다 두 눈에 노기가 어린 사람이 더 두려웠다. 그리고 그것이 참 한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후르르. 후르르.

새가 우는 소리에 놀란 케이든이 다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막에만 산다는 새들의 이상한 울음소리가 도통 적응이 되질 않아 자꾸만 과민한 반응을 하게 됐다.

내내 조용하더니. 별궁 주인의 심기를 거스를 존재가 다시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알고 원래의 자리로 복귀한 건가 싶었다.

그러고 보면 새들만이 아니었다. 세상은 참았던 소리를 한 번에 쏟아 내려는 듯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케이든은 느린 걸음을 움직여 정원으로 통하는 아치 앞에 섰다. 수로를 타고 물이 흐르는 소리와 빛의 정원 안에 숨어 있을 커다란 분수대가 물을 뿜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정말, 이 별궁의 모든 게 아사드를 위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걸까. 아니, 그저, 제가 너무 긴장한 탓에 아무것도 듣지 못했을 뿐인지도 몰랐다.

소리는 사방에서 쉼 없이 터져 나왔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알 길 없는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까지 자그맣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딱 한 번 본, 아사드의 친척이라던 어린아이들의 음성이 아닐까 싶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제국의 언어로 부르는 노래임에도 노랫말이 쉬워 어느 정도는 귀에 박혔다.

“왕자님은 어디든 계셔. 네 옆의 친구가 왕자님일지도 몰라. 공주님은 어디든 계셔. 네 앞의 친구가 공주님일지도 몰라. 그러니 입을 조심해.”

왕자님과 공주님. 헬리오가 서대륙을 통일하기 전인 왕국 시절부터 불리던 옛 노래인 모양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누가 봐도 귀한 사람처럼 생겼는데. 옆에 있는 걸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

아치 기둥에 어깨를 기대며 케이든은 노랫말을 곱씹어 봤다. 아사드의 아름다운 얼굴이 한동안 그의 머릿속을 동동 떠다녔다.

* * *

며칠 뒤, 예상치 못한 손님 하나가 케이든을 찾아왔다. 정오를 지난 오후였다.

발코니 구석에 놓인 쿠션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던 케이든은, 별안간 기척도 없이 제 앞에 나타난 낯선 이를 보고 화들짝 놀라야 했다.

청명한 하늘을 가로막고 선 손님은 놀란 케이든을 내려다봤다.

「케이든 님의 말벗이 되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고 온 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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