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 위에 선 제국 헬리오의 후계자는, 그가 성인이 됨과 동시에 황실 사람들과 대신들 그리고 제국민이 보는 앞에서 귀중한 반려 신탁을 전해 받아야 했다.
헬리오 사람들은 신이 속삭여 주는 운명을, 신탁을 귀중히 여겼다. 하나 나라의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타라 신의 속삭임을 접할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나라에 큰 축복이 내릴 때와 망조가 깃들 때나 그녀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미래의 황제 옆에 서게 될 반려에 관한 신탁만은 예외였다.
두 얼굴을 가진 사막의 신은 중매쟁이 노릇이 즐거웠는지, 꽤 오랜 시간 황실 후계자의 짝을 찾아 주는 일에 힘을 썼다. 혹여나 바라는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자신이 선택한 이의 인적 사항을 제사장에게 속속들이 알려 주는 친절을 베풀 정도였다.
그러나 신의 반려 신탁마저 먼 옛날의 일이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현재 헬리오를 통치하고 있는 황제 헤세트부터 그 위로 세 명의 황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에게 반려 신탁을 받지 못했다. 장장 200년간의 부재였다.
특별한 피가 흐르는 헬리오의 지배자에겐 절대신 타라가 엮어 준 운명의 짝이 존재한다.
그 달콤하고 기분 좋은 이야기는 헬리오의 여러 상징 중 하나이자 낭만이었고 즐거움과 기쁨이었다. 떠오를 태양의, 차기 황제의 혼인을 축복하기 위해 수도 아크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게 당연했다. 태양의 후계자가 운명의 상대에게 입을 맞춘 시간을 기점으로, 일주일간 활기찬 축제가 이어지는 것 역시 놓칠 수 없었고 말이다.
황실은 신의 침묵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타라 신의 부재는 비밀에 부쳐졌고 신이 떠난 자리 위엔 가짜 신탁이 놓이기 시작했다.
제사장의 뒤에 몸을 숨긴 채 황실은 헬리오 안팎의 권력가들과 손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득이 되는 혼인 장사를, 사랑 없는 정략혼을 신의 축복으로 포장하기로 했다.
헬리오의 후계자들은 거짓된 신탁을 소중히 받아 들고, 모여든 사람들 앞에서 몇 번이고 멋진 연극을 선보였다. 광장에 모인 제국민들을 내려다보며 만들어진 운명의 상대에게 입을 맞췄다. 약 200년간 이어진 거짓말이었다.
아사드에게도 미래를 약속해 둔 혼인 상대가 있었다. 헤카. 아사드가 알파로 발현한 17살에 정해진 짝이었다.
헬리오의 재상 중 하나인 쿠람의 차남 헤카는 사막의 꽃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름다운 오메가였다. 나라의 충신들을 부모로 둔 그는 아사드의 아버지인 황비가 보증하는 이이기도 했다. 황실의 모두가 이견 없이 헤카를 아사드의 암묵적 약혼자로 정했다.
아사드는 자신의 반려가 될 이에게 크게 바라는 게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든 혼인의 개념은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합이 아니라 유능한 인재와의 결합이었으니까.
선황제는, 아사드의 할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손자를 직접 가르쳤다. 선황제에게 받았던 거대한 가르침은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여전히 아사드의 안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마음 깊숙이 새겨 둔 덕분이었다.
〈아사드, 고작 페로몬 따위가 너를 휘두르게 두면 안 된다.〉
〈사랑 같은 유치한 감정을 경계하고 멀리하거라. 그것이 너의 눈을 가리고 전능한 황제의 빛을 앗아 갈 테니.〉
사랑에 대한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헤카는 꽤 훌륭한 황비감이었다. 머리를 잘 굴리는 데다 눈치가 빨랐고 가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일 줄 알았다. 반려자와 사랑을 나눌 생각 역시 없어 보였다. 더불어 아름답기까지 했으니, 향후 제국의 황비가 될 사람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하필, 하필 저를 앞에 두고, 신은 오랜 침묵을 깼다.
〈새로운 태양의 짝은, 북부의 추위 속에서 자신의 태양이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제사장과 아사드뿐 아니라 이 세상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길 바란다는 듯, 신은 헬리오 전역에 황태자의 운명을 알렸다.
거짓된 신의 목소리를 신전 너머로 흘려보내려던 마법사는 진짜 신의 목소리를 마주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렸다. 지루하다는 낯을 하고 있던 황제는 이맛살을 찌푸렸고, 준비된 대사를 읊을 요량이었던 제사장은 무릎을 꿇어 버렸다. 감격의 눈물과 함께였다.
〈신께서 운명을 속삭이셨습니다! 황태자 전하께 진실한 운명이 찾아왔습니다!〉
그 벅찬 외침을 시작으로, 제사장은 모두에게 더 깊은 신의 속삭임을 전했다.
아사드는 그가 들고 있던 금 접시에 채워진 물 위에 비친 낯선 남자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게 제 신부와의, 케이든과의 첫 만남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사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에게 욕을 내뱉는 거였다. 200년 넘게 헬리오를 모른 척하고 살더니, 제가 결혼할 때가 되자 갑자기 튀어나와 별 같잖은 오메가를 제 짝이라고 붙여 줬다. 아사드는 제국에 도움이 될 선택을 하지 않은 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황실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일단은, 신의 뜻부터 따라야 하지 않겠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 과정에서 아사드의 의견은 가볍게 묵살되었다.
별궁 동관에 틀어박힌 아사드의 앞으로 그의 반려에 관한 정보가 바쳐졌다.
케이든이라는 남자는 얼핏 봤던 우울한 얼굴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우중충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읽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와 들어온 이야기의 반절, 그중에서도 또 반절 정도만 확인하고 종이를 내던질 정도였다. 자세한 내용까지 적히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태양의 반려가 될 자가 저 먼 북부의 왕국 사람인 것도 모자라 가족도, 재산도, 작위도 없는…… 저보다 나이만 많은 평범함 그 아래의 오메가라니. 아사드는 암담함을 느꼈다.
하나 황태자는 황제의 관을 이어받을 후계자일 뿐, 나라의 최고 권력자는 아니었다.
〈이 김에 참는 법을 배워 보렴.〉
언제나처럼 무감한 얼굴로 황제는 아사드에게 말했다.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흉내를 내며 어깨를 두드려 주기까지 했다. 여기서 더 쓸데없는 말을 보태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그렇게 성인이 된 아사드는 자신의 운명을, 반려자를 맞이하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제국의 황태자비가 당혹스러울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남자라는 사실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이었다. 신탁 속의 남자를 보내온 엘바 왕국 또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얌전히 입을 닫았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어머니마저 자신의 아들이 그런 남자와 부부가 된 건 창피했나 보지 싶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황제는 비밀을 만드는 것 이상의 일은 하지 않았다.
아사드는 머리를 싸맨 그보다도 먼저 어머니가 나서서 황실에 벌어진 기이한 일을 수습할 거라 여겼다. 그러나 황제는 침묵했다. 아니, 황태자비에게 아주 조그마한 관심조차 보이질 않았다. 그에게 손을 대지도, 수를 쓰지도 않은 거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결론을 낸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저 남자와 평생을 함께할 수 있을까?
아사드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진심으로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른 의미로는 두렵기까지 했다. 아직 오지 않은 제 첫 희락기마저 염려됐다. 누군가와 색사를 나눠 본 적이 없으니 그게 어떤 느낌일진 모르겠지만, 그 상대가 저 남자라면…… 분명 좋은 느낌은 아니리라. 생각할수록 마음만 암담해졌다.
“오늘도 말이 없네.”
푹신한 쿠션에 몸을 기댄 아사드가 마주 앉은 케이든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였다. 보통은 답을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내 신부는 말수가 적은 걸까,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그런 소리를 듣고도 케이든은 그저 입을 다문 채 바보같이 눈만 깜빡였다. 조금 곤란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 진짜 짜증 나.
자신이 사막의 꽃 대신 북부에서 온 잡초 정도로밖에 보이질 않는 남자와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여실히 느껴져 아사드는 괴로웠다.
저 남자가 제 가슴팍에나 머리가 닿을 정도로 자그맣기라도 했으면 괜찮게 느껴졌을까? 아니, 그건 그것대로 짜증 났겠지. 아사드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쩐 일로 답을 듣게 됐다. 입을 연 케이든의 목소리는 그의 창백한 낯처럼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필요는 없고.”
죄송하다는 소리를 들을 생각으로 말을 건 것은 아니었다. 멋쩍어진 아사드가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사막의 말이, 아직…… 아직 어렵습니다.”
느릿하게 이어진 케이든의 말이 아사드를 한 번 더 당황하게 했다.
아차 싶었다.
저 남자가 사막의 말을, 제국어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왕국어와 제국어 모두에 능숙한 왕국 귀족들을 기준으로 판단해 버린 거다. 케이든이 제국어에 능숙하지 못하단 사실을 알려 준 이 역시 없었다. 아니, 진작 알려 줬지만 제가 듣지 않은 것에 가까웠으리라.
아사드는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고 싶어졌다. 하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무표정을 유지했다.
저 남자가 간단한 교육 몇 가지를 받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애들처럼 말을 배우고 있을 줄은 몰랐다.
속으로 혀를 찬 아사드가 케이든에게 해야 할 말을 골라 봤다. 내 배려가 부족했다고, 남자에게 친숙한 언어로 말해 줘야 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말이 도통 입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왠지, 자신이 왕국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저 남자와 제가 가까워질 일은 없었다.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으려면 말이 통하지 않는 편이 나을 테지. 어쩌면, 저 남자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처럼 보이기 싫은 걸지도 몰랐다. 졸렬하게도 말이다.
찜찜한 후회를 느끼며, 아사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쪽을 택했다. 그의 목이며 팔에 걸린 화려한 장신구가 유리로 막지 않은 창문 너머에서 들어온 빛을 받아 반짝였다.
“내일.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제국어로, 아사드는 케이든에게 제 뜻을 전했다.
얼빠진 얼굴을 한 남자에게서 등을 돌린 아사드는 곧장 서관 1층의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아사드 역시 자신이 삐뚤어진 어린애처럼 심술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사실 반쯤은 어린애가 맞기도 했다. 그가 제국의 황태자라는 사실을 차치하면 말이다.
달칵. 성화가 새겨진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응접실 안을 울렸다.
“…….”
떠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케이든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