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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95화 (95/185)

95화.

기가 약한 동민이 서 팀장을 감당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의현은 그 타이밍에 거기서 꼭 빠져나와야 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렇게 눈에 띄는 여자랑 친한 척 굴어 봐야, 사람들에게 먹잇감 던져 주는 꼴밖에 안 됐으니.

밖으로 빠져나오자, 찬 공기가 몸을 감쌌다. 의현은 손에 들고 있던 교복 재킷을 챙겨 입고 걸음을 옮겼다.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저택 애들이 옹기종기 모일 공간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오빠!”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은영이 눈을 크게 떴다.

“깜짝 놀랐네! 난 또 누가 우릴 잡으러 온 줄 알았어요!”

“죄지었어? 왜 잡으러 와.”

“죄는 안 지었지만요. 뭐 그 비슷한 뭔갈 하긴 했죠. 음……. 말하자면, 사고랄까요?”

따분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던 혜영이 빈정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니, 말을 안 해 주는데, 들어가는지 못 들어가는지 어떻게 아냐고요. 그래 놓고 다들 저것도 모르냐는 듯이 비웃고. 그래, 잘났다 이거예요. 어차피 자기들은 우리랑 다르다 이거죠.”

“그 사람들 심심해서 그래. 지금은 아무도 기억 못 할걸.”

“그것도 열받아요. 아무도 기억 못 할 거면, 그 순간에 웃지나 말든지. 그 사람들은 웃으면 그만이겠지만, 저한테 오늘 기억은 관 닫고 들어가는 순간까지 따라붙을 거라고요.”

혜영이 본래 자격지심이 심한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일전에 차동민 바다 사건으로도 몇 개월 동안 혜영은 분노에 차 있었으니까.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었기에 의현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근데 왜 셋밖에 없어?”

“정재이는 밖에서 붙들렸어요.”

“뭐? 누구한테?”

“들어올 때 못 보셨어요? 대단하신 기자님께서 정재이 연예인 시키겠다면서 붙잡고 난리를 쳤는데.”

혜영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은영이 흥분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다가 우리 저택에서 연예인 나오는 건 아니겠죠? 솔직히 재이가 생긴 건 어디서 꿀리지 않잖아요. 꿀리지 않는 게 뭐야, 그 정도면 사실 미쳤죠! 성격이 좀 문제긴 한데, 그건 뭐 소속사가 커버 쳐 줄 거고!”

의현은 카메라 앞에서 억지웃음 지으며 연기하는 정재이의 모습을 상상해 봤다. 모순적이었지만, 정말로 꽤 잘 어울렸다.

“재이 좀 보고 와야겠다.”

“혹시 걔 연예인 한다고 하면 말리지 마세요, 오빠. 저 유명한 지인 한 번쯤 만들어 보게요.”

혜영의 무료한 표정을 뒤로하고 의현은 서재를 빠져나왔다. 직선으로 쭉 뻗은 복도를 지나 코너를 돌자마자 카메라를 든 기자와 마주쳤다. 거의 부딪힐 뻔했다. 의현은 발끝에 힘을 주고 자리에 멈춰 섰다.

“어우, 안녕하세요.”

기자는 넉살 좋은 얼굴로 의현에게 인사했다. 악수하기 위해 쭉 내민 팔엔 값이 나가 보이는 시계가 걸려 있었다.

“외부인은 2층에 올라오면 안 된다고 아는데요.”

“아,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내려가려고요.”

기자는 예리한 눈으로 의현을 훑었다. 신발, 입은 옷, 정돈된 소매 등을 차례로 타고 올라오다가 시선은 금세 의현의 얼굴에 콕 박혔다.

“……잘생기셨네. 혹시 연예인이에요?”

뜬금없는 말에 의현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아닌데요.”

“분명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내가 또 이런 건 기가 막히게 안 잊거든요. TV 나온 적 있어요? 인터뷰라든가 뭐? 아니, 참, 이럴 게 아니라…….”

남자는 양복 재킷 속에 손을 넣더니 손바닥만 한 명함을 꺼내 들었다.

“H 방송국 출신 기자입니다.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항상 이상한 사람이던데요.”

무례한 사람은 딱 질색이었다. 잘 보일 필요도 없는데 굳이 시간 써 가며 마주하고 있을 이유도 없었고.

명함을 받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하는 의현의 모습에 기자의 표정이 굳었다.

“성격 되게 별로네. 명함 좀 받아 주면서 어른한테 사근사근 대하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네, 전 좀 어렵네요.”

“뭐라고?”

“외부인 2층 출입 금지라고 두 번 말씀드렸는데, 언제쯤 내려가실래요?”

이런 싸가지는 처음이라는 듯 기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H 방송국은 너무 유명해 하층 지구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런 무식한 대접이라니…….

“나한테 이렇게 군 거 분명 후회할 거야. 이 정도 되는 파티에 왔다면 네 부모님도 꽤 상류층일 텐데, 자식 성격 이 모양이라고 알려져 봐야 좋을 게 있겠어?”

“네, 뭐. 좋을 건 없겠죠.”

“이놈이나 저놈이나! 별 볼 일도 없는 것들이……!”

무섭지도 않은 협박이었다. 의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기자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쓸데없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동민이 서 팀장을 감당해야 할 시간만 늘어났다.

“그럼 살펴 내려가세요.”

그래도 꽤 친절을 베풀었다고, 의현은 생각했다. 기자는 쾅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정재이가 거기 서 있었다.

“기자님 불쌍하다. 그렇게 못되게 말하면 어떡해요.”

“이놈이나 저놈이나 어쩌고 하는 거 보면, 너도 썩 친절하게 말한 것 같지는 않아.”

“뭐, 맞는 말이에요.”

정재이는 그렇게 대답하며 작게 웃었다. 일 년에 몇 센티미터씩 훌쩍 자라나는 정재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매일매일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것같이 느껴지곤 했다.

“너 소개해 줄 사람 있어.”

“……그, 메일?”

“맞아. 근데 서로 초면이니까 아는 척은 하지 말고.”

재이는 순순히 의현을 따라왔다. 메일 보내는 사람 누구냐며 내내 귀찮게 하더니 정말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춥게 입고 왔어요?”

“안이라서 벗은 거야. 원래 겉에 코트도 하나 입었어.”

“다행이네요. 난 또 이것만 입은 줄 알고.”

헤실헤실 웃는 얼굴에서 장난기가 뚝뚝 묻어났다. 의현은 핸드폰을 확인했다. 공연장 앞에 있는데, 제발 좀 살려 달라는 문자가 와 있었다. 부탁까지 한 처지에 동민을 죽일 수는 없었기에 의현은 걸음을 좀 빨리했다.

무대 근처는 따뜻했다. 온도를 관리하는 헌터부 직원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서 계속 적정 온도를 맞춰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만 두고 본다면, 불 능력자에게 쇼를 시키던 동민의 큰아버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근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괜찮아요?”

정재이는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이 만남이 알려지면 좋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듯 보였다. 확실히 얜 눈치가 빨랐다. 말한 적도 없었는데.

“오히려 사람 많아서 덜 수상하게 보이지 않을까?”

“의도가 그렇다면 맞죠.”

“그리고 딱 얼굴 보고 통성명만 할 테니까, 그렇게 요란한 일도 생기지 않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서 팀장 드레스만 봐도 평온하게 끝나기가 글렀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무대에선 오래된 재즈가 연주되었다. 인상적인 선율에 맞추어 노래하던 가수의 앞으로 넓은 잔디 바닥과 조명, 그리고 수증기 펄펄 올라오는 풀장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 많으니까, 잘 따라와.”

의현은 간헐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애 다루듯이 한다고 정재이가 투덜거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꽤 많아 틈을 비집고 지나기가 쉽지 않았다. 오후에 무슨 행사가 있다고 했나? 추워지기 전에 춤이나 한바탕 추자고 나온 건가? 의현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음악이 크게 바뀌었다.

분명, 이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새빨간 드레스라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인파에 몰려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정재이, 너 잘 따라오고 있지?”

의현은 목소리를 높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옆에 풀장이 있어 혹시 여기 빠지기라도 할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글거리는 사람들 무리에서 손 하나가 튀어나와 의현의 몸을 툭 밀었다. 굵은 시계가 걸린 손을 분명히 보았다.

의현은 상대를 놓치지 않았다. 풀장에 빠지기 직전, 남자의 손을 붙잡고 아주 세게 당겼다. 마치 무 뽑히듯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밀어내며 한 남자가 물속으로 같이 넘어왔다.

풍덩-!

그렇게 커다란 노랫소리마저 멈춘 듯한 착각이 일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물에 빠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모락모락 수증기가 올라왔다. 물속에 빠진 의현은 머리를 털며 물 밖으로 나왔다. 이거야말로 그렇게나 걱정하던 아주 개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았다. 멱살이라도 잡아 쥐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남자의 어깨를 잡아챈 의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저 미셨죠? 분명히 봤는데요.”

같이 물에 빠진 남자의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왔다.

사람이 물에 빠졌다며 누군가가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서 팀장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재밌는 구경 놓치기 싫어 달려왔는데, 그 대상이 의현일 줄은 몰랐던 듯 표정은 꽤 흥미로워 보였다.

“……뭔가 착각했겠죠. 실수입니다.”

“얼굴 보고 사과하셔야 하지 않나요? 누구 덕분에 지금 주목받게 생겼는데.”

“…….”

“지금 사과하면, 실수였다고 생각하고 묻을게요.”

“…….”

“뒤로 돌아서서 사과하세요.”

주눅 든 기색이 전혀 없는 목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굴 수 있는 어린애는 얼마 없었다. 이상해, 이상하잖아……. 남자는 혼자서 중얼거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도 넘어지려다가 옆을 좀 붙잡았는데, 그게 이렇게 불편한 상황을 만든 것 같네요. 어쨌든 저 때문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사과라는 게 티가 났다. 하지만 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을 툭 내밀고 사과하는 얼굴이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 한 팀장! 자기 거기에서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 꼴을 구경하고 있던 서 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형, 손잡고 올라와요. 정재이가 위에서 손을 뻗어 주었다. 의현은 재이가 내민 손을 붙잡고 풀장 위로 올라서며 주변을 훑었다.

한 팀장이 있다. 그렇다면 혹시 지금 여기 어디에 김해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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