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동민은 넋이 나가 보였다. 악마한테 영혼이라도 판 것 같은 표정에, 의현은 그의 턱을 툭 쳐올렸다. 헤 벌어진 입이 다물렸다. 차나 마시러 가자고 의현은 동민을 이끌었다. 온천물 때문인지 그다지 춥지 않게 느껴졌다. 물론 이것도 착각일 수 있었다. 동민은 지금 누군가에게 뒷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으니까.
“안 와?”
“……어, 어, 가야지! 가!”
동민은 허둥지둥 의현의 뒤를 따랐다. 그와 친해지고는 싶었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적어 그다지 친하지 못했다. 그래서 초대받았을 때, 동민은 내심 기뻤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관계를 좀 쌓으면 지금보단 더 친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와아…….”
안쪽 역시 깔끔했다. 흰 벽과 어울리는 금색의 샹들리에가 높은 천장 위에 매달려 있었다. TV에서 많이 보던 유명인들이 하하 호호 웃으며 동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파티 때마다 매번 보는 사람들이었다.
“되게 조용하네?”
“여긴 아무도 모를걸? 나 어렸을 때 자주 숨어 있던 곳이거든.”
고전적인 분위기의 찻주전자와 찻잔이 동민의 앞에 놓였다. 익숙하게 중앙 계단을 올라간 의현은 개방되어 있지 않은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흡사 창고 같았다. 천장이 낮고 정돈이 덜 된 방엔 테이블 하나만 덜렁 있었다. 큰 통창을 내 두어 밖을 내려다보기엔 더할 나위 없었지만, 그 외에는 특별할 게 없었다.
“근데 왜 좋은 곳 다 놔두고 굳이 여기로 나를 데려온 거야?”
“아, 부탁이 있어서.”
“부탁?”
이미 한 차례 의현에게 충격받은 동민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전부 고개를 끄덕일 것 같았다. 그래도 가벼운 사람으로는 보이고 싶지 않아 동민은 눈을 부릅떴다. 큼큼…….
“나는 네가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초대한 줄 알았어. 부탁하려고 여기까지 데려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고…….”
죄책감 느끼라고 한 말이 아니라, 그냥 한번 튕겨 본 거였다. 이것도 안 하면 자존심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바짝 엎드릴까 봐.
“……아.”
차를 따르던 의현의 손이 살짝 떨렸다. 살짝 내리깐 속눈썹과 왼쪽 눈 아래에 콕 박힌 점이 동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생각해 보니 단둘이서 이렇게까지 가까이 붙어 있어 본 적도 없었다.
“미안해.”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 몰랐어.”
맙소사.
이번엔 단순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게 아니라, 누가 망치로 머리를 깨고 지나간 것 같았다. 동민은 입을 벌린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의현이 제게 사과할 줄 몰랐다. 정말로 사과할 줄 몰랐어. 원래 이런 이미지야? 아니지 않나? 뭐라고 설명이 안 됐다.
“어…….”
뇌에 피가 돌 때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동민은 외마디 신음을 뱉었다.
“괜찮아! 부탁 뭐야? 다 들어줄게!”
“아니야.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다. 너한테 미리 말을 해야 했는데.”
“아니야! 진짜 괜찮아! 나 너 돕고 싶어!”
진심이 왁 튀어나왔다. 남이 보면 도대체 누가 누구한테 부탁하는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의현이 찻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동민은 충동적으로 그 손을 붙잡았다.
“나 너 돕고 싶어! 돕게 해 줘!”
“아, 고마워. 고마운데……. 손 너무 꽉 잡은 것 같다.”
당황한 의현이 붙잡힌 손을 꼼지락댔다. 허옇게 질린 피부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악! 미안해! 동민은 소리치며 파드득 떨어져 나갔다. 의현은 작게 픽 웃으며 주머니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뭐야, 누구셔?”
동민의 앞으로 밀어진 사진 속의 여자는 특이한 차림으로 정면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처럼 나를 좀 도와주기로 한 사람인데.”
“응.”
“후원 재단에 재이라는 애가 있거든. 이 사람한테 걔를 좀 소개해 주려고 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다. 의현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도 아니거니와 후원 재단 아이 얘기는 왜 나오는지, 동민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결국은 널 돕는 사람이라는 건데, 그게 재이라는 애랑 무슨 상관인데?”
“음, 좀 복잡한데…….”
의현은 차분히 말을 골랐다. 찻잔을 만지는 손가락은 마디가 굵고 희었다. 학교에서 무력으로 겨루는 일이 많아 도련님답지 않게 손이 꽤 거칠었는데, 열심히 노력한 것처럼 느껴져 동민은 그 손을 좋아했다.
“후원 재단은 감시가 철저해서 재이가 뭘 하든 아버지께 보고가 올라가. 하다못해 얘가 오늘 몇 시에 나가서 몇 시에 들어왔는지까지 속속들이 말이야. 그런데 재이는 내가 직접 골라서 데리고 온 애라, 나한텐 의미가 남다르거든. 얠 좀 자유롭게 해 주고 싶어. 어떻게든.”
정신계 능력자인 서 팀장도 속인 전적이 있는 의현에게, 순진한 동민 하나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진실에다가 거짓을 교묘하게 섞은 말은 어딘지 모르게 인류애가 넘쳤다.
불쌍한 고아를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서 아버지의 눈을 피해 친구인 자신에게 비밀스러운 부탁을 건네는 권의현.
“와, 와…….”
동민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뭔가 인간적이고 합당한 일에 발을 들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원래 동민은 이런 부분에 특히 약했다. 사회적 약자,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 마냥 도와주지 못해 늘 마음이 쓰이던 차였다. 의현은 아주 현명하게 이 부분을 파고들었다.
“……동민아, 나 도와줄 수 있겠어?”
의현이 동민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아주 느리고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동민은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도와줄게. 뭐, 뭘 어떻게 하면 돼?”
크게 난 창문 사이로 익숙한 차가 멈추어 선 것이 보였다. 가만히 고개를 돌려 아래를 확인한 의현은 후원 저택의 아이들이 도착했음을 알았다.
죄책감일까? 이 감정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현은 알 수 없었다. 온전한 친절로 물든 동민과 눈을, 의현은 똑바로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로지 이것만이 의현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이라고.
“……고맙다. 이 은혜는 꼭 갚을게.”
의현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후 한 시, 점심 먹기엔 다소 늦은 시간이었다. 후원 저택 아이들과 사이좋게 식사하는 모습을 찍기 위해, 기자들이 떼로 몰렸다. 권중섭이 차기 대통령이 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의 하루 중 보기 좋은 부분은 늘 교묘하게 편집되어 대중들의 앞에 던져졌다.
[헌터부 권중섭 장관, 후원 재단 아이들과 호화로운 만찬.]
[“너무 행복해요”, 후원 재단 아이들의 함박웃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헌터부 권중섭 장관이 생각하는 평등과 평화란?]
방금 뜬 듯한 기사들이 포털 메인에 자연스레 걸렸다.
의현은 감흥 없이 쭉쭉 스크롤을 내렸다. 올라온 기사들은 죄다 권중섭을 떠받들고 있었다. 이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 이젠 뭐 어이없을 것도 없었다.
기사 사진 속에서 정재이는 저 구석에 처박혀 음식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권중섭의 옆에 앉은 애들은 혜영과 은영이었다. 장래가 유망하면서도 카메라를 가리지 않는 그 아이들은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말했단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다.
지겨워 죽겠네, 의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메일함으로 들어갔다. 서 팀장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업무가 늦게 끝나 도착까지 한 시간은 더 걸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메일이 딱 한 시간 전에 온 거였으니, 얼추 도착할 때가 됐을 것이다.
“어? 쟤네 풀장에 발 넣는다.”
동민이 바깥을 손가락질했다. 식사가 끝나 시답잖은 잡담이나 하고 있던 차였다. 의현의 시선이 밖을 향했다. 교복을 입고 있던 혜영과 은영이 까르르 웃다가 풀장에 발을 집어넣었다. 신기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저게 장식용이라는 걸 몰라서 할 수 있는 과감한 행동이었다. 그 순간 정말 무섭도록 모든 사람의 시선이 훅 집중됐다.
“와, 진짜 사람들이 다 쳐다보네…….”
동민은 짧게 한탄했다. 마치 동물원 속 동물처럼, 금기를 깬 아이들은 순식간에 도마 위에 올랐다. 찰나의 압력이 강렬했다. 발을 물속에 집어넣고 따뜻하다며 흔들던 애들은 곧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애들 당황한다……. 어떡하냐, 진짜…….”
동민은 지나치게 안타까워했다. 애들을 관찰하는 방관자적 시선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혜영과 은영은 얼른 물에서 발을 빼고 신발을 구겨 신었다. 정적은 그 애들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깨졌다. 재미있던 구경거리가 하나 사라졌다는 듯 사람들은 다시금 말을 이어 갔다. 누구래요? 글쎄요, 뭘 잘 모르는 애들이겠죠. 신기하네요.
의현 역시 그쪽에 닿았던 시선을 거두었다. 이건 혜영과 은영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니 사실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었던 건데…….
“어렵다, 진짜.”
의현의 말에 동민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어려운 게 뭔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의미는 적당히 전달됐다. 아름다운 재즈 선율 속에 사람들의 잡담이 섞였다. 멀리 떨어져서 듣기엔 이만한 백색 소음이 없으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식사를 마친 의현은,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재이를 만나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묻는 동민의 얼굴에 약한 흥미가 서려 있었다. 의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여자가 와야 시작할 수 있어.”
“언제 오는데?”
“올 때가 되긴 했는데……. 내가 못 봤을 수도 있으니까 한번 찾아보고 올게.”
동민은 가만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 레스토랑처럼 꾸며진 안쪽 공간에선 공연 무대가 한눈에 보여 시간 보내기엔 딱 좋았다. 그래, 갔다 와. 동민은 바삭한 쿠키를 씹으며 의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태연하게 고개 돌리던 의현의 시선이 정확히 한 곳에서 멈췄다. 미간에 골이 접히고 동공이 커졌다. 감정 변화가 크지 않은 의현에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던 모습에, 동민 역시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핸드백을 맡기고 안으로 들어오는 여자의 새빨간 드레스가 질질 바닥에 끌렸다. 얼굴을 절반이나 가린 검은 선글라스, 당당한 걸음걸이, 십오 센티미터는 돼 보이는 높은 킬 힐까지. 스타일이 말도 안 되게 이질적이었다.
“어…….”
동민이 당황하는 사이, 의현은 순식간에 뒤돌아 도망쳤다.
주변을 둘러보던 여자의 시선이 테이블에 혼자 멀뚱히 앉은 동민에게 와 꽂혔다.
“아니, 왜, 나한테…….”
히죽 웃던 여자는 엄청난 속도로 동민을 향해 뛰어왔다. 아까 그랬던 것처럼, 이 안에 모인 상류층 사람들이 다 이 여자를 쳐다보았다. 분홍색의 물 빠진 머리카락은 너무 상해 부스스했다. 동민은 꿀꺽 침을 삼키고 앞에 선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안녕?”
여자는 손을 들어 동민의 입술 끝을 훔쳤다.
“과자를 묻히고 먹네, 귀엽게.”
그렇게 말하며 선글라스를 벗는 순간, 동민은 이 여자가 의현이 말했던 그 ‘서주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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