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3월 13일. 홀수가 두 개나 들어간 오늘은 권중섭의 생일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오늘 날씨를 확인한 의현은 오늘도 눈이 예정되어 있다는 소식에 깊이 좌절했다. 가뜩이나 번거로운 하루가 될 텐데, 날씨까지 기승이라니…….
보이는 곳에서는 서 팀장과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다. 학생이라는 직위의 한계였다. 가뜩이나 외근이 있다거나 회사 잔업이 있다는 이유로 집을 비울 수도 없었는데, 심성과는 별개로 권중섭의 충실한 수족인 윤 기사는 의현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관찰해 보고했다. 굳이 그 감시망에 걸려들 이유가 없었다.
생일 파티에 참석하는 건 질색이었다. 시끄럽고 사람 북적거리는 곳을 혐오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인사만 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오늘은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정재이와 서 팀장이 만나야만 했으니까.
단순한 의미의 ‘대면’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과거의 일을 진솔하게 까발린 상대에게, 미래의 시초 능력자를 소개하는 것은 의현에겐 아주 거대한 의미가 있었다.
“도련님, 일어나셨어요. 좋은 아침입니다.”
1층으로 내려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키퍼들이 의현을 반겼다. 위화감이 들었다. 의현은 태연한 척 물었다.
“아버지 집에 계신가요?”
“그럼요. 오랜만에 도련님과 같이 아침 식사하고 싶으시다네요.”
“아.”
집에 안 붙어 있더니, 오늘은 또 왜 아침을 먹겠다고 난리야.
의현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구겨졌다. 물론 이 정도 변화는 너무 사소해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식사 준비되면 말씀드릴게요.”
과거에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던 남자와 한 식탁에서 얼굴 맞대고 밥을 먹는 건 확실히 고역이었다. 하지만 세상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의현은 권중섭과의 아침 식사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일찍 일어난 김에 욕실에서 한가롭게 물 받아 놓고 반신욕이나 했다. 수증기가 가득 찬 욕실과 방금 막 새로 뜯은 비누는 의현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욕조 난간에 발을 올려놓고 몸을 길게 늘였다. 간단히 오늘 계획이나 좀 점검해 볼까 했다.
저택 소속 아이들은 기사 사진 찍혀 줘야 하니, 권중섭 생일 파티에 무조건 초대된다. 헌터부 현장 1팀 서주연 팀장도 초대장을 받았다고 하니, 방문하는 건 확실하다. 의현이 해야 할 일은 대충 상황을 봐 가며 둘을 인사시키는 것이었다. 겸사겸사, 한 팀장이 있다면 눈도장도 좀 찍고 수상한 점이 있으면 캐 보고…….
틀만 잡고 그 안에서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은 기존의 의현과 거리가 멀었지만, 이제는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망할 거 세세하게 틀을 잡는 건 시간 낭비였다.
눈 쌓인 바깥이 꽤 낭만적으로 보였다. 3월의 폭설이라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애늙은이 같은 생각이나 하다가 얼굴에 후끈 열이 오를 때가 되어서야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손가락이 다 쪼글쪼글했다.
“아버지, 생신 축하드립니다.”
건조한 말투였다. 식탁이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음식에 눈이 돌아갈 만도 했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수저를 들지 않았다. 의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로 웃었다. 잠을 잘 자서 안색이 좋아 보였다.
“네 얼굴을 보고 직접 축하를 받으니 기분이 참 좋구나. 이렇게 같이 얼굴 맞대고 식사하는 것도 말이다. 꽤 오랜만이지 않니.”
젊고 패기 넘치는 얼굴의 권중섭이 말했다. 쇳소리가 섞인 건 여전했지만, 확실히 위압감이 있었다.
“그럼요. 아버지께서 워낙 바쁘셔야죠.”
“공부는 잘되어 가고 있는 거니?”
“그럼요.”
“하하. 네가 나를 닮아서 머리는 늘 좋았지.”
이건 또 무슨 개소리?
순간 진짜로 표정 관리가 안 될 뻔했다.
‘나는 네 진짜 아버지가 아니다.’
‘너는 조작된 기억을 붙잡고 평생을 살아왔던 거야.’
저기요, 권중섭 씨. 도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진심으로 이렇게 묻고 싶었으나, 의현은 작게 웃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버지께 폐 되지 않아야 하니까요.”
“너야 늘 나의 자랑 아니겠니.”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분위기는 꽤 좋았다. 권중섭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수저를 들었다. 아침부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가 권중섭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질겅질겅 씹는 치아는 맹수와 다름없었고, 눈은 마치 사나운 매 같았다.
“저택 아이들은 사진 찍고 일찍 돌아가는 거겠죠?”
“그럼. 그 애들은 파티에 오래 있어 봐야 지저분할 뿐인걸. 원랜 점심만 먹이고 바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거긴 석양이 멋지지 않니. 구도가 괜찮게 나오려면 좀 뒀다가 보낼까 싶기도 하고.”
“사진……. 중요하죠.”
“온천 풀장과 공연도 준비했으니, 마음껏 쉬다 가렴. 뭐, 그래 봐야 너는 별로 즐기지 않겠지만 말이다.”
“네. 참고하겠습니다.”
권중섭도 의현이 그 풀장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놀진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공연을 즐기며 풀장에서 수영하는 권의현? 죽었다 깨도 그런 일은 없겠지.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어? 나 참…….”
뭘 하든 권중섭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수행원들이 슬쩍 시간을 알렸다. 권중섭은 손목에 걸린 시계를 훑어보고 손수건으로 입매를 톡톡 닦았다.
“도착하면 연락하도록 해. 먼저 일어나야겠구나.”
“네.”
“생일도 마음 편히 즐기질 못하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쯧.”
거칠게 의자가 뒤로 밀렸다. 권중섭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을 빠져나갔다. 이윽고 번거롭게 여기저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 편히 밥을 먹을 상황이 못 됐다. 의현은 수저를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도련님, 식사…….”
지독한 향수 냄새 때문에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어깨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의현은 깊은 무의식 속에서 정신을 찾았다.
“네?”
“음식이 식겠어요. 따뜻할 때 좀 드시는 게 어떠세요?”
걱정스럽다는 듯 키퍼는 의현을 내려다보았다. 권중섭이 빠져나간 집은 몹시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차창 밖에 펑펑 내리는 눈, 향기로운 커피 냄새, 바싹 마른 머리카락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나쁠 게 없었다.
“먹어야죠. 먹을게요.”
“장관님께선 조금 전에 나가셨어요.”
“네. 알겠습니다.”
“편히 식사하세요.”
의현이 어릴 땐 권중섭이 심심하면 식탁을 뒤엎곤 했기에, 키퍼들도 내심 그를 불편해했다. 의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아직 식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을 입에 넣었다. 딱 체하지 않을 정도로만, 먹어 둘 생각이었다.
* * *
권중섭의 생일 파티는 1지구에 있는 권중섭의 첫 번째 별장에서 이뤄졌다. 1지구는 땅값이 미친 듯이 비싸, 별장까지 소유한 사람은 몇 안 됐다. 뼛속부터 기득권층, 힘들다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나 별장에서 매일 파티하며 숨 쉬듯 제게 주어진 호사를 누렸다.
“벌써 피곤해…….”
“장관님 어디 계셔? 얼른 먼저 인사드리자.”
한숨 쉬는 의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의현은 눈을 흘겨 떴다.
“일단 좀 쉬자.”
“뭐? 방금 왔잖아!”
“사람 너무 많아. 나…….”
“그래서 몸이 아파? 어지러워?”
“아니, 짜증 나. 개열받고.”
의현은 교복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팍 구겨진 미간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이 사람이 얼마나 까다로운 인간인지를 여실히 보여 줬다. 하지만 동민은 마냥 좋았다.
“갑자기 초대해서 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불러 줘서 고마워. 네가 나를 친구로 인정해 준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좋다.”
“…….”
“근데 표정 좀 풀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너만 쳐다봐.”
초대장과 신분증을 철저히 확인하고서야 파티가 열리는 별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행복해 죽겠다는 듯 몸부림치는 동민을 보며 의현은 약간 죄책감을 느꼈다.
“헐, 저 사람 좀 봐! 작년에 헌터 조사에서 1위 했던 사람이야! S급 인재! 실물도 되게 잘생겼다……. 역시 헌터부 장관쯤 되시니까 파티에도 대단한 헌터가 많이 오는구나. 멋지다……. 우리 집안은 학자가 많아서 헌터분들은 많이 못 봤어.”
동민을 데려온 이유는 하나였다. 하나보다 둘이 나으니까. 남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의현은 ‘평범함’이 필요했다. 수준 맞는 집안의 친구, 특수 능력 고등학교 교복, 아무 일도 안 하고 철없이 파티만 즐기고 가겠다는 듯한 몸짓. 그 모든 것이 결국엔 의현의 진심을 왜곡해 포장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구경 좀 할래? 나도 이 별장엔 파티장 꾸미고 처음 와 봐.”
“좋아. 되게 깔끔하다. 이런 데서도 성격이 딱 보인다니까. 우리 큰아버지께서는 말이야. 생일 때마다 꽃을 트럭째로 공수해 오셔. 진짜 난리도 아니야. 특수 능력자가 중간에서 불꽃 쇼하고 있고. 그냥, 솔직히 말이 안 될 정도로 좀 요란해.”
동민이 말하는 큰아버지 파티에 다녀온 적 있던 의현은 공감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둘은 아치형의 대리석 기둥을 지나쳐 중앙 공간으로 나왔다. 공연한다고 하더니, 무대가 크게 설치된 상태였다. 마이크를 붙잡고 재즈 음악을 노래하던 여자의 뒤로 엄청난 규모의 악기가 세팅되어 있었다.
“요란하긴 이쪽도 마찬가지네…….”
“그러게. 온천 파티라니…….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우리만 교복 입어서 좀 민망해. 왜 교복을 입으라고 한 거야?”
“난 좋아, 교복. 눈에 안 띄고.”
“그래도 난 좀 어른처럼 보이고 싶었어.”
“어른 되면 피곤할 일만 있을걸? 난 나이 안 먹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거 자체가 나이 들어 보인다, 야.”
동민은 의현을 타박했다. 공연장 앞으로는 풀장이 세팅되어 있었는데, 온천이라는 말 그대로 수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툭툭 떨어지는 눈송이랑 조화가 기가 막혔다. 별장은 언덕 위에 자리했기에 풀장에서 바깥을 내려다보면 고급 저택들이 한눈에 보였다.
“우리도 수영복 입고 들어가면 안 되겠지?”
“저게 들어가서 놀라고 만든 거로 보여?”
“응! 그럼 뭔데?”
이렇게 재밌고 특이한 게 있는데, 사람들이 아무도 들어가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듯 동민이 대꾸했다. 의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얜 여전히 똑같구나. 도련님이고. 눈치 없고…….
“관상용이야. 애초에 그러라고 만든 거야.”
“그럼 왜 쓸데없이 크게 해 놨는데? 수영도 못 하게 할 거면, 도대체 뭐를 위해서?”
“네가 말하는 그 ‘뭐’ 때문이겠지.”
“어?”
동민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손에는 권중섭 선물 준다고 포장해 온 브랜드 넥타이가 들려 있었다. 의현은 눈이 덮인 하얀 세상을 내려다보며 목소리를 죽였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체면이 중요해서 아무도 여기 안 들어가. 기자 쫙 깔린 곳에서 수영복 입고 수영하고 싶겠어? 집에 개인 수영장 없는 사람 아무도 없는데, 굳이?”
“…….”
“볼 수는 있지만, 들어가지는 못해. 그게 여기 모인 사람들의 불문율이야. 체통, 자존심. 천박한 짓 안 하겠다는 오만.”
“…….”
“위계 서열 확실히 하기에 이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 눈치 없는 새끼 골라내기도 딱 좋지.”
“…….”
“누가 내 편인지 아닌지……. 아버진 기가 막히게 아신다고.”
그렇게 말하며 의현은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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