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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91화 (91/185)

91화.

서 팀장은 흔쾌히 특별 대리인이 되어 주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가 어떤 이유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서 팀장이 소파를 박차고 일어난 순간, 의현은 일이 성사됐음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둘은 별장에서 아주머니가 차려 주는 음식을 먹고 돗자리 깔고 앉아 마당에서 꽃구경도 했다. 물론 이 중에서 의현의 의사가 포함된 건 한 개도 없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쭉쭉 기가 빨렸지만, 그래도 일이 잘 풀렸으니 다행이었다.

“근데, 수찬아.”

윤화를 목에 태우고 빙글빙글 도는 서 팀장을 흘겨보며, 의현이 말했다. 네? 옆에서 빵 껍질 뜯어 먹고 있던 수찬이 고개를 들었다. 원래도 체구야 있었지만 잘 먹고 잘 자서 얼굴에 부쩍 생기가 돌았다.

“너 성이 뭐야. 이름이 그냥 수찬이야? 외자?”

“오…….”

“왜 감탄해?”

“아니, 제 이름이 오수찬인데요.”

“네 이름이 오수찬이라고?”

갑자기 뭔가 낯설었다. 의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되물었다.

“진짜, 오수찬? 네 이름이?”

“네. 오수찬.”

“오…….”

의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좀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오수찬, 오수찬…….

“지내는 건 좀 괜찮아?”

“네. 재밌어요. 그리고 마음이 편하고요.”

“그래. 그거면 됐다.”

덫에 걸리지 않아, 수찬의 다리는 멀쩡했다. 분노로 일그러진 표정 대신 지루하리만치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이 훨씬 보기 좋았다.

“위에서 자리 잡히면 연락 줄게. 너희 지낼 수 있는 곳이랑, 교육받을 학교, 생활하는 거 도와주실 분들 전부 아쉽지 않게 챙길 테니까.”

“근데 왜 잘해 주세요?”

머릿속으로 슬슬 계획을 정리하는데, 수찬이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마치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물음이었다.

“음…….”

의현은 작게 신음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찬에게 이렇게 예리한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딱히 잘해 주려는 건 아니야. 그냥…….”

흘러가는 모든 것에 명확한 이유가 있으면 좋겠지만, 가끔은 그렇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몇 회차에 걸친 의현의 생을 압축한 듯한 말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지점을 되짚으면서 같은 행동 안 하려다 보니까 이렇게 되더라.

“흥! 시시하네요.”

의현의 알맹이 없는 말을 들은 수찬은 입술만 삐쭉였다. 거창한 이유를 기대한 모양이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해 미안했지만, 없는 말을 지어내고 싶진 않았다.

“그래도 갑자기 마음 바꿀 생각은 없어.”

“…….”

“내내 주던 거 갑자기 끊을 일 없다는 거야.”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

“거, 걱정 안 했는데요! 진짜 웃겨!”

수찬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러든지 말든지 의현은 벌러덩 뒤로 드러누웠다. 눈가를 간질거리는 따사로운 햇살과 길게 늘어진 수찬의 그림자가 꽤 나쁘지 않았다.

* * *

사실 의현이 아는 정신계 능력자가 한 명 더 있긴 했다. 김해수라고. 실력은 좀 부족했지만, 믿고 맡길 정도는 됐다. 물론 그 전에 과거 조사를 좀 해 볼 필요는 있었다. 의현은 해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권중섭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다만, 몇 개의 바뀌지 않는 미래가 있다는 전제하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김해수는 신입 사원 연수에 참가한다.

의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의 선택은 모여 하나의 결과로 귀결된다. 처음 권중섭에게 의심을 받기 시작한 게 언제였더라……. 잠시 고민했다.

맨 처음 시작은 아마도 윤화를 저택에 들여놓겠다고 말했을 때가 아닐까? 홍삭 때문에 세인트 해피 보육원에 왕래가 잦아진 이후에는 실제로 싫은 소리를 몇 번 하기도 했었고.

감정이 가장 격해지기 시작한 건 확실히 김철춘 사건 이후. 위험한 사상 어쩌고 얘기하는 걸 보면, 권중섭은 사람이 자유 의지를 갖는 것 자체를 이해 못 하는 것 같다. 그러니, 명령하지도 않은 일을 했던 나에게 분노가 치솟았던 거겠지.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이었지만, 언젠가 반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꼭두각시처럼 살기라니…….”

연기하는 건 쉬웠다. 의현이 지금껏 살아왔던 대로 똑같이 살면 됐다. 권중섭이 하라고 한 것만 열심히 하고, 그 외에는 관심도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전부 쓰레기니까. 우매하고 멍청한 자들의 입을 빌려 나오는 말은 죄다 허상에 불과하니까.

의현은 계획을 점검했다. 권중섭이 이 집 안에서 부리는 행패는 카메라를 통해 녹화되고 있었다. 의현은 그중에 쓸모 있는 부분만 선별해 비밀스럽게 저장해 놓았다. 이것들은 적당한 때에 풀 생각이었다. 권중섭이 표독스럽게 모든 권력을 독차지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을 때, 바로 그 시점에.

엇나가는 짓을 하지 않고서 어디까지 엇나갈 수 있을까.

당신은 총 한 발에 깔끔하게 나를 보냈지만, 나는 징그럽고 잔인하게 당신을 끌어내릴 거야. 준비는 끝났어. 조금만 기다려 줘. 내가 숨겨진 과거를 파헤칠 때까지.

* * *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게임에서 보스 나오듯 정해진 미래가 하나씩 튀어나올 때마다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실감하게 됐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 불필요한 분쟁을 줄일 수 있어 큰 도움이 됐다. 예를 들면, 애들을 데리고 함께 갔던 바다.

하늘 다리가 끊어져 동민과 혜영이 그 아래로 추락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번엔 가지 않았으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저택에 윤화가 없어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았다. 한 사람 빠졌다고 큰 차이가 있을까 싶었지만, 차이는 꽤 컸다.

의현은 동민과도 적당히 거리를 두었다. 차동민의 잘난 인생이 고작 권의현에게 붙잡혀 끌려 내려오는 꼴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자고 할 때마다 득달같이 바쁜 일 있다며 자리를 피하니 동민은 섭섭함을 느끼는 듯했지만, 아직까진 별문제 없었다.

물론 의현도 제 머릿속에는 분명 존재하는 일이 현실에서는 없는 일이 될 때마다 간혹 씁쓸한 기분이 들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 또한 의현이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뭐 해요?”

서주연 팀장이 보낸 메일을 확인하고 있는데, 정재이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의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노트북을 닫았다.

“다 씻었어?”

“네.”

“숙제도 다 했고?”

뭐 그런 어이없는 걸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하긴, 얜 정해진 규범은 잘 지키는 편이었다. 문제는 왜 지켜야 하는지 그걸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오늘 자고 가는 날인 거 알죠?”

의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재이 책상 위에 올려진 달력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너무 크게 쳐 있어서 모른 척하고 싶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홍삭이랑 같은 학교더라고요.”

“그래?”

“걔가 얼마나 시끄러운지 몰라요. 애들이 다 싫어한다니까요.”

정재이는 바닥에 앉아 의현의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의현은 책상에 턱을 괸 채로 대답했다. 발음이 약간 뭉개졌다.

“보기 드문 인연이네. 친하게 지내봐.”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성격인데.”

“그 정도야?”

“무식한데 목소리만 큰 애들 질색이에요.”

홍삭이 재이와 같은 중학교에 들어간 건 의현이 뒤에서 힘을 쓴 게 컸지만, 굳이 이 일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래도 너희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고 생각해. 재이 너는 좀 무던하니까, 홍삭처럼 수다스러운 성격이랑 상성이 잘 맞을지도 모르지.”

“아, 홍삭 얘기 그만해요. 시간 너무 아까워.”

정재이는 질색을 했다. 의현이 옛날만큼 홍삭을 싸고돈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 홍삭이 싫다고 꾸준히 언급한 과거 정재이의 말이 단순히 투정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쪽에 힘이 실렸다.

“머리 쓰다듬어 주면 안 돼요?”

“덜 말랐잖아.”

“만져주면 빨리 마를걸요?”

“얘가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 왔네…….”

애교가 늘었다. 둘만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건지, 투덜거리는 게 확실히 전보다 줄었다. 윤화와 집을 분리한 게 잘한 선택이었던 듯싶다.

의현의 무릎에 닿는 정재이의 볼이 말랑했다. 덜 마른 머리 때문에 남색 파자마가 축축하게 젖었다.

“매번 말하지만, 몸에 이상 있으면 바로 말하고. 어?”

“또 시작이네…….”

“가출하면 진짜 다신 안 봐. 알지?”

“가출 안 해요. 진짜 안 해.”

좋은 상황에서 굳이 초를 치냐는 말투였다. 다른 건 명확하게 날짜가 맞아떨어졌다. 같은 날 같은 시에 문제가 터졌으니, 그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아예 방지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정재이의 경우는 달랐다.

얜 의현이 스물넷일 때 세상을 망하게 했다가도 저번 생에선 갑자기 가출을 해서 의현의 속을 까맣게 태웠다. 이 조그만(물론 실제로는 그다지 작지 않았지만) 애가 뭐라고,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어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나는 다 쉬운데, 네가 제일 어려워.”

“왜지? 난 진짜 모르겠는데.”

가만히 의현의 손길을 느끼던 정재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진해 보이는 표정에 속지 않기 위해 의현은 질끈 눈을 감았다.

“나는 쉽죠. 형 말 잘 듣잖아요. 하라는 거 다 하고. 착하게.”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네 말이 맞아.”

“……뭐지? 못 믿겠다는 말투인데.”

의현의 양 볼에 정재이의 손이 닿았다. 꾹 아프지 않게 눌러오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의현은 두 눈을 감았다.

“얼른 자. 키 안 큰다.”

“눈은 왜 감아요?”

“네가 불쌍한 척할까 봐. 그거 안 보려고.”

정재이가 무슨 표정을 짓든지 동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볼을 가볍게 매만지던 손은 미묘하게 위치를 바꿨다. 정재이의 왼손은 의현의 관자놀이를 타고 올라가 간지럽게 눈 아래쪽을 문질렀다. 꽤 민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의현의 속눈썹을 간질이고 코끝을 훑고 돌아온 손은 다시 눈 밑으로 직행했다. 그 순간, 예전에 정재이가 말했던 이상형이 떠올랐다.

‘눈 아래쪽에 점이 있으면 좋겠어. 섹시하니까.’

점 같은 것도 취향일 수 있나? 정말 이상하고 집요하다.

의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눈을 떴다.

장난스러운 표정일 줄 알았는데,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은 깊었고 입은 살짝 벌어져 있었으며 드러난 귀 끝이 죄다 빨갰다. 어른인 척해도 이런 부분에서 감정을 못 감추는 게 좀 귀여웠다.

“너, 눈 아래에 점 있는 거 좋아하지?”

“…….”

“어쩌다 그런 취향이 생긴 거야?”

“…….”

“위험하잖아.”

의현이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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