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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88화 (88/185)

88화.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권중섭은 평소엔 인자한 척 굴다가도 상대가 자신의 완벽한 지배하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섭게 돌변했다. 그의 폭력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일련의 장면들을 포착하는 과정은 쉬웠다. 그게 뭐든 다수가 모이면 전보다 큰 힘을 갖기 마련이었다. 의현이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한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더 많은 증거를 모으기 위해서.

“재이야, 형 얼굴 좀 봐 봐.”

의현은 재이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오늘은 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권중섭은 식탁을 뒤엎으며 씩씩거렸다. 유리 접시가 깨지며 근처에 서 있던 재이의 얼굴에 튀었다. 의현은 몹시 놀랐지만, 그걸 티 낼 수는 없었다. 의현이 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권중섭이 알면 안 됐으니.

“아팠겠다. 괜찮아?”

의현은 재이의 얼굴을 소독하고 약을 발라 주었다. 하필 얼굴에 튈 건 뭐람. 딱 보이는 곳에 남은 상처가 퍽 신경 쓰였다.

“으아…….”

정재이는 팔을 벌리고 의현의 품으로 파고들어 왔다.

“방금 약 발랐는데…….”

“우으이…….”

“언제 또 말을 가르치냐, 너한테.”

의현은 작게 한숨 쉬며 재이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어릴 땐 원래 좀 응석 부리는 성격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어, 이런 갑작스러운 행위에도 쉽사리 놀라지 않았다. 이래서 경력자를 우선하는 모양이라고 쓸데없는 생각도 한번 해 봤다.

방금 바른 약이 의현의 교복에 다 묻었다. 후원회 저택이 다 지어질 때까지 재이를 집에서 데리고 있으려는 의현의 계획은 이런 사고가 터질 때마다 희미해지곤 했다.

윤화와 수찬의 거처와 교육 장소를 구하는 것도 일이었다. 의현이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기엔, 지금 나이가 지나치게 어렸다. 뭐 하나 깔끔하게 떨어지는 게 없었다.

윤화야 능력자니 권중섭 앞에 데려가도 환영받겠지만, 수찬의 경우는 좀 난감했다. 걘 어디서 때려도 그냥 맞으며 살 애였다. 그래서인지 되도록 그런 환경에 놓아두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좋을까…….”

정재이가 몸에 착 달라붙어 있어 의현의 상체가 완전히 뒤로 젖혀진 채였다. 바닥에 양손을 짚고 작게 중얼거리자, 정재이는 알 수 없는 동물 소리를 내며 확 의현의 코앞에 얼굴을 갖다 댔다.

“뭐, 인마.”

하도 죽었다 살아나서 그런가, 이젠 정재이가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다. 얘 자라는 데 또 한세월이 걸릴 텐데, 그걸 어떻게 기다리나 싶어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그렇게 보면 어쩔 건데.”

“…….”

“약 다시 바르게 얼굴 대 봐.”

정재이는 아무 말이 없었다. 슬슬 가까이 오더니 코끝이 의현의 뺨에 살짝 닿았다. 어리니까 하는 무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해도 낯선 건 어쩔 수 없었다. 의현은 슬쩍 고개를 뒤로 뺐다.

“진짜 동물이냐고…….”

말을 못 하니, 대화가 안 됐다. 사실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정재이의 바닥난 사회성이 다시 툭 튀어나올까 봐. 그게 교육으로 어떻게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얘 본성일까 봐.

“형 입 모양 잘 봐 봐. 보고 따라 해 봐.”

“우으…….”

“우으가 아니고.”

의현은 다리를 벌리고 그 안에 재이를 앉혔다. 영문도 모르고 품에서 떨어진 재이는 의현을 향해 다시금 손을 뻗었다. 나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안녕하세요.”

의현이 단어에 힘을 주고 말했다. 정재이는 가만히 입을 벌리고 의현을 쳐다보았다.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따라 해 봐. 안녕하세요.”

“아우으.”

“그래. 잘하네. 저는 정재이입니다.”

비슷한 발음 하나 했다고 의현은 꽤 좋아했다. 머리가 좋아 똑똑한 선생님 한 명 붙여 주면 반년 만에 말을 뗀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거랑 별개였다.

“해 봐. 싫어?”

입 모양이 잘 안 보여서 그런 건가?

의현은 허리를 숙여 재이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전보다 더 또박또박 발음했다. 저는 정재이입니다. 저엉재에에이이-.

“이이, 아이우!”

“그래, 됐다. 그만하자.”

불현듯 왜 이러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의현은 손가락에 연고를 짜 재이의 얼굴에 톡톡 발라 주고, 어디 문지르지 못하게 밴드까지 꼼꼼히 붙였다.

“재이야, 형 기다리다 지치겠다. 얼른 커. 알겠지?”

의현의 말에 정재이는 뭣도 모르고 좋다며 방긋 웃었다. 어린 얼굴이 꽤 귀엽게 보여, 의현은 볼을 살짝 꼬집고 복도로 나왔다. 윤화와 수찬 관련해서 통화해야 할 일이 있었다.

복도에 나와 벽에 등을 기대고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짧게 연결음이 울린 후, 상대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저 의현이에요. 별장에 별일은 없나 하고요.”

일전에 수찬을 보내려고 했던, 바로 그 별장이었다. 윤화와 수찬을 믿고 맡길 만한 장소는 이곳 외엔 없었다.

―그럼요, 아주 좋아요. 복작복작하니 사람 사는 것 같고요.

“사고 안 쳐요? 그 둘도 일반적이진 않아서요. 인간 대 인간으로 소통하기가 쉽진 않을 거예요.”

―하하하, 도련님도 참. 말씀을 재미있게 하신다니까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윤화는 귀여운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사람 혼을 빼 놓는 데 일가견이 있었고, 수찬이는 그냥 같이 있으면 왠지 모르게 지쳤다. 그 맹목적으로 쏟아지는 신뢰와 애정을 받고 있으면 부담스러워서 숨도 잘 안 쉬어질 정도였다.

“제가 대리인을 찾을 때까지만, 좀 부탁드려요. 괜찮은 사람이 있는데, 아직 충분히 설득이 안 됐거든요.”

―도련님, 너무 성급히 모든 걸 해결하려 하진 마세요. 마음에 여유를 좀 가지시고요. 저는 언제나……. 어린 도련님께서 뭔가에 쫓기듯이 사는 게 마음이 아팠어요.

방에 들어가 있던 재이가 문을 열고 슬쩍 얼굴을 내밀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 중이던 의현이 손을 휘저었다. 안에 들어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저는 정말 도련님이 너무 가엾어서……. 흑, 흐윽……. 권중섭 그 사람은 아버지 자격도 없어요. 자기 핏줄이라면 그럴 수가 없죠. 제가 이 집에 아직까지 붙어 있는 이유도 모두 도련님 때문인 거 아시죠? 이 늙은이는 정말로 도련님이 좀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흐윽…….

“네, 네. 알죠.”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왜냐면 정말 몰랐으니까.

이 유모도 자기 행복 찾아서 일찌감치 떠났으면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과거에 잃었던 아이를 새로 낳거나, 입양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자는 꿋꿋하게 권중섭 아래에 남았다. 단지 권의현이 가엾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니, 어쩌면 알 수도 있다.

모든 불쌍하다는 감정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아 답답한 구석이 있었다. 뭐 어떻게 해결이 안 됐다. 내가 도와준다고 안 불쌍해질 수 있나? 누군가를 행복 속에 절여 놓는다고 해도 그 사람을 보는 내 마음이 영영 편안할까? 가엾고 불쌍하다는 감정은 도대체 뭐길래.

“다음 주 중에 한번 들를게요. 그때까지만 어디 소문 안 나게 좀 부탁드려요.”

대체 뭐길래, 깨달은 순간부터 사람을 이리 절절매게 만드는 건지.

―그럼요. 제 마음 같아서는 이 사람들이랑 별장에서 같이 살고 싶은걸요. 얼마나 마음이 잘 통하는지 몰라요. 그러니 너무 걱정은 마세요.

의현의 표정을 민감하게 살피던 정재이는 금세 다가와 다리를 꽉 붙들었다. 부르면 쪼르르 달려오는 강아지 같았다. 물론 의현은 부른 적 없었지만.

“끊겠습니다. 쉬세요.”

―도련님도 밥 잘 챙겨 드세요. 너무 공부만 하지 말고 친구들과도 좀 어울리시면서요.

곱슬한 밝은 갈색의 머리통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의현은 이내 재이의 머리카락을 살살 뒤로 넘겨 주었다. 역시 강아지 같아.

“네. 알겠습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어진 전화였다. 핸드폰이 뜨끈뜨끈했다.

서로 사이가 좋은 편도 아니거니와 1지구와 거리도 좀 있었으니 권중섭이 별장에 들를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의현은 가능한 한 빨리 윤화와 수찬의 거처를 제대로 정해야만 했다. 여차하면 윤화는 전처럼 후원회 저택에 넣더라도, 수찬만이라도 어떻게…….

“으아! 우으…….”

“안에 있으라니까 왜 나왔어……. 뭐야, 밴드 언제 뗐어?”

의현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재이의 얼굴에서 덜렁거리는 밴드를 손으로 살살 눌렀다.

“이거 떼면 안 돼. 얼굴에 흉 지고 싶어?”

“우아이, 우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 돼.”

단호한 말투에 정재이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직 꼬질꼬질한 티를 벗지 못했지만, 오히려 이게 더 신선했다. 얜 이 모습을 기억할까? 사진이라도 찍어 놓으면 나중에 놀려 먹기 좋겠어.

“여기 한 번 봐 주라. 옳지.”

찰칵, 찰칵-. 의현은 핸드폰 카메라로 뚱한 표정의 재이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입이 툭 튀어나온 게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이러니까 그래도 좀 애 같고 귀여운 맛이 있었다.

“너는 얼굴이 재산이야. 어? 표정 자꾸 그렇게 해? 정재이. 너는 네 얼굴 잘난 거 조만간 알게 돼. 그때 되면, 오늘 얼굴에 흉 안 지게 도와준 거 감사하다고 나한테 절이라도 해야 할 거다.”

문득 17지구 예배당에서 만났던 정재이가 떠올랐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굴던 그 능글맞은 얼굴. 사실 그건 의현의 취향이 아니었다. 더 마음에 들었던 건 당혹감에 물들어 어쩔 줄 모르던 순진한 얼굴이었지.

“어아!”

“형아라고 한 거야, 방금?”

카메라를 들고 잠깐 추억에 빠졌던 의현은 금세 정신 차렸다. 정재이는 안아 달라는 듯 의현의 목으로 손을 감아왔다. 보육원에만 있더니, 애가 애정 결핍이 있나…….

“알겠어, 알겠어.”

의현은 못 이기는 척 정재이를 다시 품에 안았다. 영양 섭취를 제대로 못 해 비쩍 마른 몸은 의현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냥 공기를 끌어안고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니까.

“너 진짜 잘 자라야 해. 갑자기 이상하게 자라면 안 돼. 알겠지? 오늘을 꼭 기억하란 말이야.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의현이 하는 말을 알아듣긴 하는 건지, 재이는 발을 달랑달랑 흔들며 웃었다. 볼살이 동그랗게 올라와 의현의 어깨에 닿았다. 의현은 한 손으로 재이를 안고, 남은 한 손으로 핸드폰 뉴스를 보며 정원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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