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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의 회귀식 생존법-87화 (87/185)

87화.

주말 오후였다. 의현은 택시를 타고 헌터부 건물 앞 공원으로 향했다. 때 되면 색깔 바뀌며 물 뿜는 대형 분수대가 있어 가족 단위로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어린애들이 와아 소리치며 주변을 뛰어다녔다. 우리 애들도 이런 데 데려오면 좋아하려나……. 아이 셋 낳은 부모 같은 생각을 하며 의현은 무심하게 분수대 앞을 지났다.

“예약하셨나요?”

“권의현이요.”

분수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많이 쳐 봐야 고등학생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애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온 걸 보고, 직원은 노파심에 물었다.

“한 번만 더 확인하겠습니다. 저희 레스토랑 예약한 거 맞으시죠?”

“맞아요.”

“네,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옷 입은 모습이나 말하는 습관을 보면 대충 파악이 가능했다. 1지구에는 별사람들이 다 살았다. 이제 막 태어난 아이가 몇십 개의 건물을 증여받는 경우도 파다했으니, 학생이 레스토랑 예약하고 온 것쯤은 대수롭지도 않았다.

창가 자리에 가 앉았다. 주말이었음에도 서 팀장은 회사에 출근했다고 했다. 의현이 기억하기로는 아마 이즈음 팀장을 달았을 거다.

한 십 분 기다렸을까. 연두색 머리의 여자가 의현의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검은 뿌리가 한참 자라 전체적으로 지저분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서 팀장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 여자 진짜 이상하다’라고 생각했을 거다.

“안녕하세요, 서주연 팀장님.”

하지만 의현은 서 팀장을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단순히 ‘진짜 이상하다’로 형용할 수 없는, 아예 돌아 버린 사람이었다.

“어머, 안녕. 웬 아기가 있네?”

“메일 드렸던 권의현입니다.”

“말투 보고 나는 서른이 넘은 사람인 줄 알았어. 도대체 성장 과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거야?”

서 팀장은 의자에 앉자마자 분홍색 선글라스를 벗었다. 의현의 기억보다 확실히 젊은 인상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그 두 눈을 마주하는 순간, 의현은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제 제안이 마음에 들어서 나오셨다고 생각할게요.”

“아가야, 어른 놀리면 못 써. 혹시 옛날에 내가 구해 줬던 일 있니? 그때 이 누나한테 반한 거야? 그래도 개인 메일로 연락하면 안 되지. 이 누나는 바쁜 사람이라 오늘 시간 내려고 어제 퇴근을 못 했어요-.”

확실히 피곤해 보였다. 바쁘겠지. 현장 1팀 돌아가는 꼴을 의현이 모를 리 없었다. 의현은 손을 들어 음식을 주문했다. 입에 잘 붙지도 않는 메뉴를 줄줄 읊는 의현을 보며 서 팀장은 픽 웃었다.

“그래, 뭐. 부잣집 도련님인 건 알겠는데, 뭐랄까……. 너무 진부해. 패턴이 말이야. 나는 원래 좀…….”

“좀 이상한 거 좋아하시잖아요.”

“뭐?”

“알고 있어요. 이상한 거 좋아하시는 거.”

의현의 말에 서 팀장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메일 확인해 보셨죠? 제가 좀 몸집이 큰 거랑 싸워야 해서요. 저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아직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었지만, 의현은 솜씨 좋게 약을 팔았다.

“제가 미래를 좀 봐요. 다는 아니고 단편적인 부분만이요. 제 일을 도와주신다면 서주연 팀장님께서도 가장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의현의 말에 서 팀장은 꽤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뭔데?”

‘형이 궁금한 거 해결할 수 있어.’

형체도 없는 정재이의 그 말에 속아 의현은 아무것도 모른 채 1지구까지 올라갔고, 그게 진심으로 궁금한 것인지 아닌지도 확신하지 못한 채 해결을 떠안았다.

가장 __한 것.

사실,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마음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이라는 단어에 속아, 사람들은 얼마나 무지한 선택을 하고야 마는가.

“시초 능력자의 재림.”

“…….”

“보고 싶지 않으세요?”

지나온 시간선에서 서 팀장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잘 아시네요. 신도셨나 봐요?’

‘어머, 앙큼해라. 은근히 나를 떠보네?’

분명 서 팀장은 과거 시초교 신자였다. 아니, 이게 비단 시초교로만 국한될 일인가? 시초 능력자가 재림한다고 하면 하등 관심 없는 일반인도 한 번쯤은 뒤돌아볼 게 분명했다.

“어머나, 일을 어째, 재앙이 따로 없잖아. 잘생겼는데, 사이비라니…….”

“전형적이죠. 원래 전도할 때 얼굴마담 내보내잖아요. 물론 저는 그 종교 믿는 사람 아닙니다.”

“뻔뻔하기까지. 시초 능력자 재림 어쩌고 얘기하는 사람이 지금 사이비가 아니라고 말하는 거야? 본인이 말하면서도 앞뒤 너무 안 맞지 않아?”

요리 나왔습니다. 웨이터는 테이블 위에 그릇을 놓았다.

피아노 반주자가 앞으로 나와 인사했다. 레스토랑에 앉은 손님들이 손뼉 쳐 주었다. 의현과 서 팀장이 알맹이 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뜬금없이 낭만적인 연주가 시작됐다.

“제 이름이 권의현이라고 말씀드렸죠?”

의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손수건을 펼쳐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서 팀장은 그래서 뭘 어쩌란 거냐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

“권중섭 헌터부 장관이 제 아버지예요.”

“뭐?”

“물론 사실은 진짜 아버지가 아니죠. 어떤 복잡한 이유로 양아들이 됐어요. 이 사실을 안 지는 저도 얼마 안 됐고요.”

“잠깐, 잠깐-.”

서 팀장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진도가 너무 빨라! 도대체 갑자기 무슨 소린데!”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의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식전 빵을 뜯어 수프에 찍어 먹었다.

“저 그 사람 끌어내리고 싶어요. 완전히 나락까지요. 기왕이면 죽어도 상관없죠. 그 사람뿐만이 아니에요. 위에 앉은 정신 나간 사람들 전부 꼴 보기 싫어 죽겠거든요.”

“미친…….”

“몸집이 큰 거랑 싸워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단순히 몸집이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혹시 지금 제정신이 아닌 거야? 도대체 어쩌자고 이래? 권중섭 장관은 아들을 도대체 어떻게 키운 거야? 가정 교육을 얼마나 망친 건데!”

서 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낭만적인 피아노에 어울리지 않는 격한 단어에 근처에 앉은 사람들이 이쪽을 흘끗댔다. 의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더 재밌는 사실 알려 드릴까요?”

“……미친, 이거보다 더 재밌는 게 있다고?”

서 팀장은 이제 흥미롭다 못해 두려워 보였다. 의현은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거리다가 씩 웃었다.

“일단 드세요. 식으면 맛없어요.”

“저기, 아가. 지금 나랑 장난치니?”

“저는 한 번도 장난친 적 없어요. 잘 아시면서.”

의현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서 팀장은 헛웃음을 쳤다. 이 모든 일이 어린애의 치기 어린 장난이라고 믿고 싶은 건 자신 쪽일지도 몰랐다. 그래, 서 팀장은 인정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어린 남자애한테 보기 좋게 휘둘리고 있었다.

“하필 나를 찾은 이유가 뭐야? 그 메일 주소는 개인용이라서 아는 사람도 얼마 없어. 가만 보니 콩가루 집안인 것 같은데, 높으신 장관님께 내 메일 주소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진 않았을 테고…….”

“아, 더 재밌는 사실이 바로 그거랑 관련되어 있어요.”

의현은 먹기 좋게 자른 스테이크 그릇을 서 팀장의 것과 바꾸었다.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작업 치는 방법만 배워 왔다고 생각하며 서 팀장은 스멀스멀 올라가는 제 입꼬리를 억지로 잡아 내렸다. 웃지 마. 서주연. 외모가 전부가 아니잖아. 얘랑 엮이면 분명 위험할 일이 생기고야 만다. 서 팀장 안에 숨겨진 본능은 명확히 그렇게 경고했다.

“제가 사실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거든요.”

“……맙소사.”

서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비싸고 맛있는 스테이크에 얼굴 잘생긴 미남이라고 해도 정신 나간 사람을 품어 줄 자신은 없었다. 애석하지만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4월에, 8지구에서 포탈이 터질 거예요. 주택 단지 안에서요. 사람이 꽤 많이 죽는데, 제 기억이 맞는다면……. 음, 아마 마흔 가구 정도 돼요. 서주연 팀장님은 외근 나갔다가 바로 합류하게 될 텐데, 거기서 일 제대로 못 해서 상부에 잔뜩 까여요. 2주 동안은 매일 야근하고 경위서 쓰고요.”

“지금 저주하는 거야?”

“저주라뇨. 사실인데.”

의현은 언젠가 뉴스에서 봤던 사건을 줄줄 얘기했다. 이럴수록 더 소름 끼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한 번쯤은 정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작정하고 파려면, 가진 걸 다 내놔야 한다면서요.”

“…….”

“저는 다 내놓을 준비 됐어요.”

“…….”

“그러니까 이번엔 서 팀장님께서 준비되면 말씀해 주세요.”

“…….”

“기다릴게요.”

정중했으며 동시에 뻔뻔했다.

“생긴 대로 좀 살아. 도대체 어쩌려고 이래.”

“그러게 말이에요.”

“오늘 나오겠다고 며칠 야근한 내 시간이 아까워. 다신 연락하지 마.”

서 팀장은 혀를 차며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의현이 썰어 준 스테이크는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피아노 연주곡도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의현은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공원에서는 때맞춰 형형색색의 분수가 터졌다. 어린애들이 신이 나서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걸 가만히 내려다보며 의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다음엔 애들을 데리고 나오는 게 좋겠어.”

물론, 자유분방한 그 애들을 지혜롭게 통솔할 자신은 없었다. 보호자 한 명씩 껴서 데리고 나오면 분수 구경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 생각을 할 즈음, 씩씩거리며 1층을 지나가던 서 팀장이 위를 올려다보았다. 층이 그다지 높지 않아, 얼굴이 훤히 보였다.

의현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머지않아 서 팀장에게 연락이 올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제발, 정신 좀 차려.’

입 모양이 선명했다. 하하. 의현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웃었다. 옛날 같았으면 서 팀장 놀리는 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항상 예측을 불허했으니까. 그래서인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모래성처럼 쌓으면 쓸려 가고, 또 쌓으면 쓸려 가는 관계가 문득 안타깝게 느껴졌다.

“인사를 하고 왔으면 좋았을걸…….”

의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한번 알고 나면 몰랐던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

그 말이 맞았다. 모르고 살면 편했겠지만, 한번 알고 나면 몰랐던 때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후회하지 마.’

그래서 당신은 내게 후회하지 말라고 말했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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